65화
* * *
“다녀왔습니다.”
“어머, 왔니?”
밤 12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
집에 조용히 들어온 이민아를 맞이한 건 그녀의 어머니, 고세연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어디 가더니, 엄청 늦게 들어왔네. 친구 만나고 온다 했었지?”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던 고세연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딸을 바라봤다.
“아침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엄청 차려입고 갔었구나. 살다 살다 네가 교복 치마 말고 다른 치마 입는 걸 볼 줄이야.”
“이상한가요?”
“아니, 예뻐. 평소에도 자주 그렇게 입고 다니렴.”
고세연은 자신의 소파 옆자리를 툭툭 건드렸고, 이민아는 바로 그녀 곁으로 가 앉았다.
“흠, 이렇게 입으니까 예쁘기는 하네. 근데 너 옷이 왜 이렇게 더러워졌어? 어디 흙바닥에서 굴렀니?”
“…뛰다가 넘어졌거든요.”
“대체 어떻게 넘어졌으면 옷이 이렇게… 물론 별로 안 비싼 옷이지만, 그래도 아깝잖니.”
“다음부터 조심할게요.”
이민아는 늑대 우리에서 있었던 일을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언니는 지금…….”
“길드에서 늦게까지 훈련하고 온단다. 네 아버지야 평소처럼 하는 거고, 네 언니와 오빠. 그 둘은 조만간 길드에서 간부 자리를 맡기로 했잖니? 그래서 요즘 더 열심히 하는 거야.”
“아, 그렇군요.”
“그래서 민아야. 친구 만나고 이렇게 늦게 집에 들어온 거라고?”
“…네.”
“친구라면 누구? 아, 혹시 그 남자애? 너를 이겼던 E급? 유진이었나?”
“네, 박유진이요.”
“흐음, 그렇구나.”
고세연은 자신의 딸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민아야. 나는 네 아버지와 다르게 네가 어떤 친구를 만들든 크게 신경을 안 써. 너도 알지?”
“네, 알죠.”
“하지만 네 미래에 대해서는 신경 쓰고 있단다. 이것도 알지?”
“…네, 알죠.”
이민아는 고세연의 시선을 피한 채, 소심히 대꾸했다.
“저도 제가 앞으로 뭘 할 건지에 대해 항상 신경을…….”
“하루 이틀 노는 건 괜찮아. 근데 너무 자주 그러는 건 안 좋을 거야. 알겠지?”
“…네.”
“좋아. 그리고 있지. 그 박유진이라는 친구. 남자잖니?”
“네. 근데 그게 왜요?”
“혹시 그 친구와 연애하는 건 아니지?”
“그, 그런 사이 아니에요.”
“네 쪽에서 연애할 마음도 확실히 없고?”
“…네, 없어요.”
이민아는 자기도 모르게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하지만 고세연은 눈치 못 챈 건지, 그녀는 하던 말을 계속했다.
“다행이네. E급 헌터보다 더 좋은 남자들 많으니까, 선택은 신중히 하렴.”
“…네.”
이민아는 마음 같아서는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언니와는 달리, 고세연은 이민아가 함부로 대들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위험한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였으니 말이다.
“알았으면 됐단다. 아, 그리고 연애 이야기 나온 김에, 내가 저번에 말한 승준이라는 친구, 기억나?”
“홍채 그룹 회장의 아들분이요?”
“응, 배승준. 내가 그 친구 소개시켜 줄 수 있는데, 소개받을래?”
“아, 아니요. 저는 일단 학교생활에 집중하고 싶은…….”
“알았어. 하지만 명심하고 있으렴.”
고세연은 자신의 딸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성과가 없으면, 너는 그냥 적당한 곳에 시집보낼 거야. 이해했지?”
“하, 하지만…….”
“그렇게라도 우리 가족에게 보탬이 되어야지, 안 그래?”
“…네.”
“알았으면 열심히 하렴. 너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해서.”
“아, 알겠어요.”
“그래. 그럼 이만 들어가 쉬어. 그리고 너무 늦게 씻지 말고 지금 바로 씻고.”
“네. 어머니도 쉬세요.”
이민아는 고세연에게 간단히 인사한 후, 도망치듯 거실에서 벗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하아아아.”
자신의 방에 들어선 이민아는 문을 닫으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후,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제 나도 모르겠다.”
이민아는 자신이 몇 달 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예전 같았으면 가족의 저런 말들을 무조건적으로 따랐을 텐데,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옳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
이민아는 자신의 가족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들에게 자신만의 길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민아는 이런 생각을 전혀 못 했을 터였다.
하지만 최근 친해진 한 남자 때문에, 그녀의 사고방식이 여러모로 달라졌다.
“그보다 아까 성과가 없으면 나를 결혼시킨다고 했지? 성과가 없으면.”
성과가 없다.
이 말 또한, 예전의 이민아에게 꽤 크게 다가왔을 거다.
그도 그럴 게, 이민아는 최근 1년 동안 성장의 성과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내 본능을 받아들이면 더 강해진다고, 박유진이 그렇게 말했어.”
이민아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중얼거렸다.
“본능을 한 층씩 받아들일 때마다, 나는 더 강해져.”
이민아는 눈을 감은 채, 놀이공원에서의 일을 회상했다.
이성을 잃고 날뛰던 그때를 말이다.
분명 그녀는 완전히 본능에 잡아먹힌, 그저 야생의 늑대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때 이민아는 확실히 느꼈다.
‘나는 그때 더 강해졌었어.’
이성을 잃은 동안, 그녀의 힘과 속도가 상승했다.
그것도 어쭙잖게 상승한 게 아닌, 박유진을 제압했을 정도로 상승했었다.
물론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하겠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내게 잠재력이 아직 있다는 거야.’
최근 성장이 전혀 없어, 이민아는 자신에게 더 이상 성장 가능성이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 박유진 덕에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그녀에게 아직 가능성이 있었다.
“그나저나 박유진. 박유진…….”
이민아는 천장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언제나 생각해도, 참 특이한 남자였다.
‘첫 만남이 최악이었는데 나를 계속 도와주고. 나랑 친구도 해 주고, 나랑 계속 어울려 주고…….’
이민아는 속으로 중얼거리다,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나 그 새끼에게 고마워할 게 X나 많구나.”
당장 오늘만 해도 그랬다.
함께 놀이공원에 가 시간을 보내고, 무엇보다 자신이 더 성장할 수 있게끔 판을 깔아 줬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민아가 박유진을 물어뜯는 일이 있었지만, 박유진은 그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게 자기 잘못이라고 하며, 이민아를 전혀 탓하지 않았다.
“그 새끼도 은근히 착하다니까.”
이민아는 미소와 오늘 놀이공원에서의 시간을 다시금 떠올렸다.
박유진과 같이 놀이 기구 하나하나 타는 것부터, 그와 줄 서서 이야기 나눈 것, 그리고 같이 점심을 먹으며 시간을 보낸 것까지.
“…게다가 걔 쇄골을 물어뜯기도 했지.”
이민아는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이민아는 박유진에게 추한 모습을 보인 거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오늘 하루만큼은 박유진에게 좋은 모습들만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박유진은 신경 안 쓰는 거 같았고, 무엇보다 걔는 오늘이 즐거웠다고 했어.’
그것도 그냥 즐거운 게 아닌, 자기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날이라 했다.
물론 이민아는 그건 그저 과장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뭔가 기분은 좋네, 히.”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
그 친구에게 인생 최고로 즐거운 날을 선물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민아는 여러모로 기분이 좋았다.
“히히, 흐.”
이민아는 침대에 누운 채, 행복하다는 듯이 실실 웃었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건 덤이었다.
그리고 한편 같은 시각.
“오빠. 오늘 놀이공원 갔다고 하지 않았어?”
“갔었지.”
“아니, 놀이공원에서 뭐 하면 이렇게 다칠 수 있는 거야?”
박유진은 집에서 자신의 여동생에게 질문 세례를 받고 있었다.
* * *
“피 엄청 흘린 거 같은데, 오빠 괜찮은 거 맞지?”
“안 괜찮으면 내가 병원에 있지, 집에 왔겠냐?”
“아니, 그래도 이건 피를 너무 많이 흘렸잖아.”
유나는 내가 오늘 입었던 흰색 상의를 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건물 모서리에 어깨를 부딪쳤는데, 너무 세게 부딪쳐서 저렇게 상처가 생겼다고?”
“뭐어어, 대충 그렇지?”
“오빠, 그게 현실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해?”
유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건물에 부딪쳤다고 피가 이렇게 많이 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조금 많이 나기는 했네.”
지금 보니까 내 옷에 피가 상당히 많이 묻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민아의 치악력이 생각보다 좋은 듯싶었다.
“그래도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오빠, 그럼 상처라도 내게 보여 줘 봐.”
유나는 내 어깨 부근의 붕대에 손을 가져갔지만, 나는 그런 유나의 손을 피했다.
“딱히 보여 주고 싶은 상처는 아니거든. 네가 이해해 줘.”
“…진짜 괜찮은 거지?”
“응, 진짜로 괜찮아.”
“알겠어. 오빠가 그렇다면야 믿어야지.”
유나는 피가 가득 묻은 내 옷을 세탁기에 던지며 말했다.
“근데 오빠, 어디 가서 함부로 싸우거나 몸 굴리지 마. 그리고 혹시라도 그런 일 있으면 바로 내게 말하고. 알겠지?”
“…알겠어.”
“약속이다?”
“…응.”
물론 이 약속을 내가 잘 지킬지는 확신이 안 섰지만 말이다.
“그럼 됐어. 그보다 오빠.”
유나는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오늘 민아 언니와 데이트 잘 하고 온 거지?”
“데이트인지는 모르겠지만, 걔랑 재밌게 놀다 오기는 했다.”
“그걸 데이트라고 하는 거야, 오빠.”
유나는 어딘가 소악마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둘이 진도 어디까지 나갔어?”
“진도라니?”
“아, 그러니까 그 뭐냐, 아. 혹시 오늘 민아 언니랑 손잡았어?”
“손? 손이야…….”
잡기는 했다.
롤러코스터 탈 때 이민아가 대뜸 내 손을 잡았으니까.
게다가 이민아가 이성을 잃었을 때, 그녀는 내 손을 강제로 붙잡기도 했었고 말이다.
“…손은 잡았지.”
“오? 오오오. 역시, 오빠는 마음만 먹으면 다 꼬신다니까.”
“…그건 또 뭔 소리냐?”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다른 건 없었어? 막 서로 좀 진한 신체 접촉이라든가 하는 거 말이야.”
“신체 접촉?”
나는 내 오른쪽 쇄골을 슬쩍 바라봤다.
“…혹시 물어뜯긴 것도 포함되냐?”
“미, 민아 언니가 오빠 물었어? 그럼 진짜 둘이서 설마, 말 그대로 물고 ㅃ… 악?!”
“헛소리는 이쯤하고 가서 자기나 해.”
나는 유나의 이마에 딱밤을 한 대 날리며 말했다.
“12시 넘었다. 일찍 자야 키 큰다.”
“아아, 그러지 말고 썰 좀 풀어 줘. 그래서 민아 언니랑 어떻게 됐는데?”
“그냥 둘이 분위기 좋게 하루 보낸 거 말고는 뭐 없다, 인마.”
나는 유나에게 대충 대꾸한 후, 속으로 이민아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뭐, 즐거웠던 거 말고도 꽤 수확이 있는 하루였어,’
여기서의 수확이란 다름 아닌, 이민아 안에 있는 늑대인간의 본능.
회귀하기 전의 이민아는 그 본능을 찾는 데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고 했다.
하지만 이민아는 오늘, 단 하루 안에 그 본능을 찾아냈다.
‘솔직히 한 번에 안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면 일이 수월해지겠지.’
회귀하기 전의 이민아의 말에 따르면, 시작이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시작, 그러니까 그 본능을 인지하는 것.
하지만 시작만 하면, 그 이후로는 쉬웠다고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민아는 빠르게 성장할…….
“후우, 아니다.”
이민아에 대한 건, 다음 주에 그 녀석을 직접 만난 뒤에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은 이만 가서 쉬는 게 맞는 듯했다.
안 그래도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몸이 여러모로 피곤했으니 말이다.
“야, 유나야. 나 자러 간다. 너도 이제 자라.”
“아아, 오빠. 진짜 썰 안 풀어 줄 거야?”
“풀 것도 없는데 내가 뭘 더 하냐, 인마.”
나는 유나에게 대충 대꾸하며, 거실에 이불을 천천히 깔았다.
그리고 잠자리에 누우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이민아에 대해 생각했다.
‘이민아. 그 녀석이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기대되네.’
회귀하기 전에 보여 줬던, 대한민국 최강의 탱커의 모습을 절반만큼만 보여 줘도, 나는 더 바랄 것도 없었다.
* * *
주말이 지나고, 어느새 다시 찾아온 월요일.
대학교의 수업을 전부 마친 나와 이민아는 바로 훈련장에 와 훈련용 골렘들을 상대했는데.
“바, 박유진? 나 어땠어? 이번에는 괜찮았어?”
“어어, 으으음.”
내게 조심스럽게 묻는 이민아.
이에 나는 턱을 매만지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 솔직히 말하자면,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