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입국을 위한 이런저런 절차들을 전부 마무리한 후.
나는 피닉스 한가운데 위치한 국제 터미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온 순간, 엄청난 열기의 햇빛이 나를 반겨 주었다.
“아, 여기 피닉스였지.”
피닉스, 미국에서 가장 덥기로 유명한 도시 중 하나였다.
뭐, 그래도 나 같은 경우에는 네메이아의 코트가 있어 그나마 괜찮았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코트라, 피부가 햇빛에 다칠 위험이 없었다.
게다가 이 코트는 착용자에게 최적의 온도를 제공해 주니, 이런 더위에도 오히려 시원했다.
‘그래도 필수품들은 챙겨야겠지.’
나는 터미널 안으로 다시 들어가, 건물 내에 있던 편의점으로 향했다.
거기서 선크림과 선글라스를 하나씩 구매했다.
‘코트로 얼굴은 못 가리니, 선크림이라도 발라야지.’
선글라스는 이곳에서 가급적 쓰는 편이 좋았다.
햇빛이 너무 강하다 보니, 안 쓰면 눈을 다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회귀하기 전, 이 도시에 자주 파견된 덕에 이런 것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대충 다 준비된 거 같으니까.”
놓고 가는 짐이 없는지 확인한 후,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일단 숙소에 가 짐을 내려놓은 뒤, 바로 다음 목적지로 향할 생각이었다.
그 목적지는 다름이 아닌…….
“그랜드 캐니언. 거기도 거의 10년 만에 가는 거겠네.”
미국 최대 관광지 중 하나.
나는 그곳에서 내 성장의 발판을 얻어 올 생각이었다.
【 천둥새들의 영역 】
출발하기 전, 나는 시내에 있던 적당한 모텔에 방을 잡아 짐들을 거기에 놓고 왔다.
‘뭐, 짐이라고 할 것도 별 것 없지만 말이야.’
짐이라고는 배낭에 챙겨 온 여벌 옷들이나 여권 등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물건들을 들고 다니기 애매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향할 곳은 언제 전투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투 도중에 여권 같은 거라도 잃어버리면 곤란하게 될 테니 말이다.
‘뭐, 그건 그렇고. 이 셔틀 버스는 이때에도 운영을 했구나.’
나는 몇 분 전에 탑승한 이 하얀 버스의 내부를 둘러봤다.
회귀하기 전, 30살 때 피닉스에 파견됐다.
당시에 피닉스에서 그랜드 캐니언을 갔어야 했는데, 그때 유일하게 운영하던 셔틀버스가 이 버스였다.
그래서 오늘, 나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이 버스가 서던 정류장으로 갔는데…….
‘진짜로 있을 줄은 몰랐네.’
다시 보니, 참 대단한 셔틀버스였다.
그도 그럴 게, 10년 후에도 이 셔틀 버스는 꾸준히 운영했다.
그게 뭐가 대단한 거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10년 후의 상황을 알면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피닉스가 천둥새들의 습격에 의해 반쯤 망하니까.’
게다가 천둥새들의 서식 장소는 그랜드 캐니언.
그러니까 이 셔틀 버스는 위험천만한 몬스터들의 서식지 앞으로 헌터들을 데려가 주던 버스였다.
‘그나저나 천둥새들과 그랜드 캐니언이라.’
그랜드 캐니언은 수식어란 수식어가 다 붙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 명소 중 하나였다.
그리고 동시에 천둥새의 서식지이기도 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약 300마리의 천둥새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내가 직접 토벌해서 잘 알고 있지.’
회귀하기 전, 지구의 몬스터가 갑자기 급증했던 시절.
그때 천둥새의 수 또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동안 애리조나의 주 정부는 천둥새를 일종의 관광 요소로 보고 방치했으나, 그 수가 너무나도 많아지자 그들을 사냥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성체가 된 천둥새의 전류는 무시 못 하니까.’
제대로 큰 천둥새 한 마리만 해도 A급 일렉트로 마스터만큼의 위력을 가진 전류를 뿜어 냈다.
근데 그 수가 수백 마리나 되니, 당시 애리조나의 입장에선 큰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미국은 해외에 증원을 요청했고, 나는 헌터 협회에 의해 반강제로 끌려갔다.
뭐, 애초에 나 말고 파견할만한 사람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때의 한국에서 가장 강한 일렉트로 마스터는 나와 최서희였는데, 최서희는 부산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덜 바빴던 나를 보낸 것이었다.
‘혼자 가게 되어서 여러모로 억울했지만, 생각해 보니까 혼자 갔던 게 신의 한 수였지.’
그때 나는 혼자서 약 100마리의 천둥새들을 사냥했다.
하지만 전부 사냥하기는 무리라 판단했고, 계획을 변경했었다.
사냥 대신, 천둥새들과 협상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협상이 통해서 다행이지. 안 통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먹잇감 행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이번에 그랜드 캐니언에 가면, 천둥새들과 협상해야 할지도 몰랐다.
물론 일단 그들의 영토에 몰래 들어가는 게 목표지만, 천둥새들은 그리 만만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내가 그들에게 붙잡힐 경우에 어떻게 할지 미리 생각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근데 뭐,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자.’
피닉스에서 그랜드 캐니언까지 대략 세 시간이 걸린다.
이제 막 출발했으니,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도착하면 4시나 5시쯤 되겠네. 그럼 해가 지기 전에 빠르게 천둥새들의 둥지를 찾아서…….’
나는 앞으로 일어날 수 있을 상황에 대한 대처법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의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인생은 생각했던 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 * *
피닉스에서 출발한 지 몇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어찌어찌해서 그랜드 캐니언 국립공원의 입구에 도착했었다.
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바로 출발해, 어느새 그랜드 캐니언의 거대한 협곡에 도착한 상태였다.
‘여기는 지금이나 그때나 아름다운 건 똑같네.’
회귀 전에 자주 봤던 광경이지만, 그럼에도 볼 때마다 아름다웠다.
거대한 붉은 빛의 협곡, 거기에 노란빛 노을.
이 두 가지가 요소 덕에 엄청난 장관을 볼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장관을 더 보고 싶었지만, 나는 관광을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스켈레톤 포인트. 그쪽으로 얼른 가자.’
스켈레톤 포인트는 원래 그랜드 캐니언의 유명한 사진 촬영지 중 하나였다.
그래, 지금으로부터 몇십 년 전에는 그랬다.
‘지금은 천둥새들의 영토 일부가 됐지.’
현재의 스켈레톤 포인트는 천둥새 영토의 남쪽 경계선.
그리고 내 기억에 맞는다면, 남쪽 경계선은 가장 경비가 덜한 곳이었다.
나는 그쪽을 통해, 천둥새들의 영토에 몰래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렇게 붉은빛의 협곡에서 몇 분을 더 걸은 뒤.
“…도착했네.”
거대한 철조망들이 길을 막았다.
그리고 철조망들 앞에 영어로 무어라 쓰인 표지판이 있었다.
그 표지판의 내용을 대충 요약하면…….
‘이곳부터는 천둥새들의 영역이니 일반인은 출입을 금한다. 출입하고자 하는 사람은 주 정부에게 문의할 것. 무단 침입할 시에 입게 되는 피해는 책임지지 않음. 뭐, 대충 이런 내용이네.’
회귀하기 전에도 이 표지판을 본 거 같았는데, 이곳은 참으로 변하지 않는 듯했다.
‘아무튼. 철조망은 낮게 지어졌으니 그냥 뛰어넘으면 될 거 같네. 그리고 영토에 들어서면 최대한 기척을 지우는 게…….’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내 계획을 점검했다.
별의별 상황들에 대한 대처 방법들을 전부 다 생각해 놨으니, 어지간하면 당황하지 않고…….
- 카아아악!
“…어?”
그렇게 생각하던 중, 하늘에서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내게 있어, 상당히 익숙한 울음소리였다.
- 카악! 카아아악!
하늘을 올려다보자,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내 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어지간한 성인 남성보다 훨씬 큰 새가 말이다.
그 광경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을 못 했기 때문이다.
‘뭐야? 대체 왜?’
천둥새는 영역에 매우 민감한 몬스터 중 하나다.
그래서 영역에 조금만 발을 들여도 바로 공격해 오는 편이었다.
- 카아악!
그랬기에 지금 상황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저놈들 영역에 아직 안 들어갔을 텐데?’
천둥새를 직접 사냥한 적 있었기에, 그들의 영역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영역 근처에도 안 간 상태였다.
분명 철조망을 지나고 약 500m는 더 가야 천둥새의 영역이었다.
- 카악! 칵!
‘대체 뭐지?’
너무나도 의문스러웠지만, 당장은 그것에 대해 생각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나는 허리에 있던 자바니아를 꺼내 들며 전투를 준비했…….
‘아니. 일단 전투는 하지 말아 볼까?’
나는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천둥새들은 인간을 크게 경계를 안 한다.
인간을 너무 자주 본 탓인지 모르겠지만, 인간들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천둥새들은 인간을 먼저 공격을 거의 안 했다.
만약 내가 평화롭게 나간다면, 지금 날아오는 저 천둥새도 나를 무시하고 그냥 다시 갈 길을…….
- 키아아아악!
…아니, 저 천둥새는 어째서인지 많이 화난 듯했다.
아무래도 전투를 피할 수 없을 듯했다.
“후우우. 침착하자.”
천둥새 성체는 3급 위험도의 몬스터였다.
상당히 강한 축에 속하는 몬스터로, 지금의 나는 저 몬스터를 혼자 못 이겼다.
‘하지만 약점을 노려서 적당히 겁만 주면, 알아서 도망치겠지.’
천둥새는 지능이 높은 편이라, 위험하다 싶으면 알아서 후퇴했다.
문제는 후퇴한 뒤 동료들을 데려오기 때문에 더 위험해질 수도 있지만, 그사이에 자리를 옮기면 그만이었다.
‘천둥새의 약점은 등의 중앙.’
천둥새가 내뿜는 전류의 원천이 그쪽이었다.
내가 그쪽만 잘 노리면, 천둥새는 놀라서 도망칠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천둥새의 시야 범위를 전부 알고 있었으니, 그 점을 잘 이용하면 충분히…….
“어? 잠깐만. 저놈은 분명….”
전투를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문득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천둥새의 가슴 쪽 부근에 난 커다란 흉터.
나는 저 흉터를 전에 본 적이 있었다.
“…마하발?”
천둥새 부족 내에서 경계 대장의 직위를 맡은 천둥새, 마하발.
내가 회귀하기 전에 알게 된 천둥새 중 하나였다.
나름 친하게 지냈던 천둥새라, 솔직히 말해 꽤 반가웠다.
마음 같아서는 저 천둥새를 향해 웃으며 인사나 하고 싶었는데,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 카아아아악!
저 녀석은 지금 내 인사를 받아 줄 거 같지가 않았다.
‘일단 힘부터 빼놓든가 해야겠네.’
뭐가 어찌 됐든, 지금 내게 날아오는 천둥새와의 전투는 못 피할 듯했다.
속으로 빠르게 결론은 내린 후, 나는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천둥새는 내가 방금까지 있던 땅에 떨어졌다.
쾅—!
엄청난 광음이 들려왔다.
만약 피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마하발의 저 발톱에 깔려 죽었을 것이었다.
‘천둥새는 3급 위험도의 몬스터. 게다가 이때의 마하발은 건강한 성체였지.’
어리거나 나이가 많은 천둥새였으면 할 만했을 텐데, 이놈은 건강한 성체였다.
이렇게 다 자란 성체는 회귀하기 전의 나도 쉽게 못 잡는 몬스터였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해야지.’
어차피 이기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
마하발의 힘을 빼, 그를 어느 정도 진정시키기만 하면 됐다.
‘천둥새의 약점은 등의 중앙. 그러기 위해서라면…….’
나는 자세를 잡으며 내 쪽으로 바라보는 거대한 새를 바라봤다.
와이어와 단검을 준비하며, 나는 어떤 식으로 싸울지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천둥새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