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경계 대장!
원로는 이번에 마하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이번 일에 대해서는 자네가 확실히 책임을 져야 할 거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인간을 여기에 데려온 것이냐?
-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 인간은 족장님을 치료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말을 듣고, 이 인간을 데려온 것입니다.
- 자네는 그걸 믿은 건가? 그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하발은 원로의 질문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 족장님은 하루가 지날수록 건강이 악화되는 중입니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얼마나 더 심해질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족장님이 힘들어하는 걸 지켜보는 것보다, 이렇게 뭐라도 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 마하발, 자네의 생각은 알겠네.
이번에는 또 다른 원로가 마하발에게 말했다.
- 자네 말대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간을 우리의 영토에, 그것도 루프티카 님의 거처에 데려온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았나?
- 이 인간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마하발은 나를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 남쪽 경계에서 이 인간과 직접 싸워 본 결과, 특출나게 강한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인간들 기준에서는 충분한 강자였지만, 저에 비해서는 많이 약했습니다.
- 이 인간이 뭔 일을 터뜨려도 아무 문제 없을 거라는 건가?
- 저 혼자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판단을…….
- 경계 대장. 나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어.
이번에도 다른 원로가 입을 열었다.
- 우리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직접 쓴다는 게, 이 인간이 평범하지 않다는 증거거든.
- 말씀드렸듯, 이 인간과 직접 싸워 봤습니다. 그리고 그리 강하지 않다고 제가…….
- 단순히 무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야, 마하발. 지금까지 우리의 언어를 쓰는 인간을 본 적이 있어?
- …없습니다.
- 맞아. 아마 우리의 언어를 쓰는 최초의 인간일 거야.
원로 하나가 내게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 단순히 잘 싸운다고 위험한 게 아니야. 그런 의미에서 이 인간은, 어쩌면 매우 위험한 존재일 수도 있지.
- 그럼 이 인간을 다시 영토 밖으로 쫓아냅니까?
- 그편이 합리적이겠지. 나도 인간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래도 이런 인간을 루프티카 님 앞에 데려오는 건 위험하다고 봐.
상황이 좋게 흘러가지 않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내가 쫓겨난다면, 여기까지 온 게 헛수고가 되고 만다.
그랬기에 나는 뭐라도 해 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제 이야기를 먼저 듣고 판단하는 건 어떤가요? 지금 루프티카 님이 어떤 병을 앓는 건지 제가 먼저 설명을…….”
나는 입을 열어 천둥새들에게 내 의견을 말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루프티카가 내 말 도중에 끼어들었다.
- 확실히, 인간을 이곳에 데려오는 건 위험한 판단이었죠. 저를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저보다는 부족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게 맞았을 거예요, 마하발.
- 죄송합니다, 족장님.
마하발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저의 불찰이었습니다. 그럼 이 인간은 다시 남쪽 경계에 놓고 오는 걸로…….
- 통상적인 경우였다면 그랬을 거죠. 원래라면 인간이 제 거처에 들어오는 걸 그리 반기지 않았을 텐데, 이 인간은 조금 다르네요.
루프티카는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천둥새들의 족장은, 원로들과는 달리 나를 따뜻하게, 그리고 동시에 호기심 있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 이 인간, 그러니까 유진은 악해 보이지가 않아요. 저를 진짜로 치료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의 눈빛에서 보이는군요.
루프티카는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줬다.
현명하고, 침착하고, 이성적인.
수십 년 동안 천둥새들을 이끈 수장다운 모습을 말이다.
“알아봐 주셔서 고맙네요.”
그런 그녀는 지금 내게 기회를 던져 줬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칠 생각 없었다.
“루프티카 님의 말씀대로, 저는 진심으로 루프티카 님을 치료하고자 이곳에 온 거예요. 그러니 저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감사하겠네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루프티카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내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원로들이 바로 반발을 했다.
- 루프티카 님.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인간에게 치료받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만약 저 인간이 다른 목적으로 루프티카 님에게 접근해 해를 입히려는 거면…….
- 다들 제 걱정을 해 줘서 고마워요.
원로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루프티카는 부드럽고 태연히 그들에게 말했다.
- 하지만 괜찮을 거예요. 아까 마하발이 말한 것처럼, 이건 밑져야 본전이니까요.
루프티카는 마하발,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나를 바라봤다.
- 제 몸은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어요. 이대로 가다가는 얼마 못 가 아예 못 움직이게 될 수도 있죠.
저는 이 인간을 믿어 보도록 하겠어요, 라고 루프티카는 원로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 아무것도 안 한다면, 저는 결국 죽게 되겠죠. 제가 죽지 않으려면 뭐라도 시도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 하지만 루프티카 님. 정체도 모르는 인간에게 치료를 맡기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저희가 보다 안전한 방법을 찾아낼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 과감할 때는 과감해야죠. 제가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았을 때처럼 말이에요.
루프티카는 무언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 그리고 여러분. 제가 아무 근거 없이 유진을 믿으려는 게 아닙니다. 다들, 엔드리온를 봐주세요.
루프티카의 말에, 이곳에 있던 천둥새들은 모두 중앙의 푸른 보석을 바라봤다.
엔드리온은 언제부터인가 푸른색 빛을 내고 있었고, 그 빛은 다름 아닌 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회귀하기 전.
내가 천둥새들과 협상하기 위해 이곳에 처음 왔었을 때처럼 말이다.
- 엔드리온이 저 인간에게 빛을?
- 이게 대체 어떻게? 어째서 엔드리온이 저희 부족원이 아닌 인간에게…….
그리고 마찬가지로, 방 안에 있던 천둥새들은 놀란 듯한 반응들이었다.
루프티카를 제외하고 모두가 놀랐다.
심지어 표정 변화 하나 없던 마하발도 이 상황에 그저 놀란 눈빛이었다.
- 이게 무슨 의미인지 다들 아시죠?
말하는 게 슬슬 힘들었는지, 루프티카의 목소리에 힘이 점점 빠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최대한 밝은 모습으로 원로들에게 말을 이어 나갔다.
- 엔드리온은 저희 부족이 나아가야 할 길을 향해 빛을 비춰 주죠. 그리고 지금 그 엔드리온이 유진을 향해 빛을 내고 있어요.
- 그렇다는 건, 설마 저 인간이…….
- 저 인간이 저희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말씀입니까?
-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지요.
루프티카는 이 말과 함께 다시금 나를 바라봤다.
- 유진. 당신이 왜 우리를 도와주러 온 건지 몰라요. 하지만 저는 유진의 눈빛에서 선함이 보였고, 엔드리온 또한 유진을 가리키고 있어요.
“저를 믿어 주시는 건가요?”
- 지금 상황에서는 안 믿을 이유가 없죠.
루프티카는 내게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후, 그녀는 내 옆으로 와 몸을 낮추었다.
- 저의 이 병을 치료해 주면,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할게요. 그러니, 잘 부탁드리죠, 유진.
“맡겨만 주세요, 족장님.”
애초에 그 은혜를 받기 위해 이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제대로 치료해 줄 생각이었다.
이 생각과 함께 나는 루프티카에게 가까이 다가갔는데.
- 마하발, 자네가 옆에서 지켜보도록 하게.
조용히 있던 원로들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 루프티카 님과 엔드리온이 이게 맞는 방향이라고 가리키긴 했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네.
- 동의하네. 그러니 경계 대장. 자네가 루프티카 님 옆에서 저 인간을 지켜보게. 혹시라도 저 인간이 허튼짓을 한다 싶으면 바로 제압하도록 하게.
- 본부대로 하겠습니다.
마하발은 나와 루프티카 옆으로 다가왔다.
- 유진. 미리 말하지만 네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나는 네놈을 가차 없이 공격할 거다. 알겠냐?
“걱정 마. 그런 일 없을 테니까.”
나는 대충 대꾸한 후, 루프티카를 다시 바라봤다.
“루프티카 님. 혹시 제가 루프티카 님의 등 위에 올라가도 괜찮을까요?”
나의 이 말에 원로들은 또다시 반발했으나, 루프티카가 괜찮다고 말하자 바로 또 조용해졌다.
- 치료에 필요한 거면 허락할게요. 어서 올라오세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루프티카 님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 먼저 설명 드리도록 하죠.”
나는 익숙하게 루프티카의 등에 올라가며 말했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루프티카님은 병에 걸린 게 아니에요.”
- 병에 걸린 게 아니라고요?
“기생충에게 감염된 거죠. 그것도 매우 특이한 기생충에게.”
특이한 기생충.
일렉트로 마스터 등, 전류와 관련된 모든 생물은 이 기생충에게 한 번쯤은 당해 봤을 터였다.
“일렉케르라는 기생충이에요. 전류를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생물에게 기생 가능한 기생충이죠.”
- 기생충이요?
“네. 숙주가 생산하는 전류를 조금씩 갉아먹는 기생충이요. 근데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전류뿐만 아니라 신체 내의 다른 것들까지 갉아먹어 버리죠.”
- 그런 게……. 그럼 유진. 그 기생충을 제 안에서 꺼낼 수 있는 건가요?
“가능하니까 제가 여기 온 거죠.”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대꾸했다.
사실 일렉케르를 몸 밖으로 빼내려면, 보통 전문적인 의사의 솜씨가 필요했다.
물론 나는 의사가 아니었지만, 대신 한 분야에서 정점을 찍었던 일렉트로 마스터였다.
‘일렉케르를 몸 밖으로 유도하는 건 쉽지.’
나는 전류를 발생시키며 작업을 시작하려고 했다.
근데 그때, 원로 한 마리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 이보게 인간. 루프티카 님 안에 기생충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아낸 건가?
“그거야, 그, 증상을 들으면 바로 알 수 있죠.”
- 증상만을 듣고 그걸 알아냈다고? 하지만 루프티카 님의 증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들은…….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일단 이것부터 빠르게 끝낼게요.”
- 네, 일단 유진이 일을 마저 하게 하죠. 이야기는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거예요.
루프티카의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다시금 일에 집중했다.
‘어디 보자. 기생충의 위치가……. 역시. 위장 쪽에 있었네. 그럼 이 녀석이 밖으로 나오도록 유도를…….’
나는 루프티카의 몸 안으로 내 전류를 조금씩 흘려보냈다.
“루프티카 님. 아직까지는 괜찮죠?”
- 네. 살짝 간지러운 정도네요.
“네. 그럼 이제부터 조금 많이 아플 거예요. 제가 기생충을 토해 내게 만들 건데, 고통스러워도 어떻게든 토해 내도록 노력해 주세요.”
- 그러니까, 기생충이 제 입 밖으로 나온다는 건가요?
“네, 뭐. 그렇죠.”
- …일단 해 보죠.
살짝 마음에 안 든다는 눈치였지만, 루프티카는 일단 내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전류를 이용해 기생충을 루프티카의 식도 쪽으로 유인했고.
- 카악! 칵! 컥! 커억!
루프티카는 고통스럽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마하발과 원로들은 놀라며 무언가를 하려는 듯했지만, 나는 그들을 무시한 채 묵묵히 내 할 일을 했다.
그리고 잠시 뒤.
- 케엑! 켁!
루프티카의 기침과 함께, 그녀의 부리에서 커다란 벌레가 튀어나왔다.
성인 남성 크기의 기생충이었다.
츠츠츠—
일렉케르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거대한 벌레는 내 쪽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튀어 올랐는데.
카악! 카악!
마하발이 바로 움직여, 거대한 발톱으로 일렉케르의 몸통을 단번에 꿰뚫었다.
“…죽었네요.”
나는 루프티카 위에서 내려와 마하발의 발톱에 찍힌 벌레를 바라봤다.
축 늘어진 걸 보니, 확실히 죽은 것이었다.
“몸은 어떤가요, 루프티카 님? 일단 아픈 것의 원인은 확실하게 제거를…….”
- 그 어느 때보다 괜찮네요.
방금까지 고통을 호소하던 루프티카는 전보다 훨씬 기운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날개를 펼치며, 몸을 천천히 움직여 봤다.
- 몸에 힘이 들어가고, 목도 더 이상 안 아프고. 네, 확실히 괜찮아졌어요.
루프티카의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둥새 원로들이 바로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 루프티카 님. 괜찮은 것입니까?
- 여보게. 어서 따뜻한 물을 준비해 오거라!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약초들도…….
- 이 사실을 어서 부족에게 알리겠소. 루프티카 님이 회복했다는 사실을…….
- 다들, 우선 조용히 해 주세요.
원로들은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루프티카는 그들을 바로 조용히 시켰다.
그런 후, 그녀는 다시금 내게 다가와 나를 내려다봤다.
- 유진.
“예, 루프티카 님.”
- 제가 완전히 나아진 건지 확인해야겠지만, 만약 진짜로 다 나은 거면, 저는, 아니. 우리 부족은 유진에게 큰 빚을 진 거네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나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다음에 나올 말이 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 그렇다 쳐도, 제가 유진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희 부족은 은혜나 빚을 반드시 갚아야만 하죠.
알고 있었다.
천둥새들은 은혜 갚는 것에 매우 진심인 몬스터들이었다.
애초에 나는 그들의 이러한 특성을 노리고 여기를 온 것이었다.
- 그러니 유진,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세요. 제 날개가 닿는 데까지,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드릴게요.
“원하는 거라. 뭐, 그게 말이죠.”
그래, 지금이 제일 중요했다.
여기서 확실하게 밀고 나가야, 내가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혹시 괜찮다면 엔드리온의 일부를 제게 줄 수 있을까요?”
- …뭐라고요?
온화하기만 하던 루프티카의 표정이 처음으로 차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