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 *
‘생각보다 강하지는 않네.’
게이트에 들어간 지 약 10분 뒤.
나는 자바니아로 거미들을 베며 속으로 생각했다.
‘머릿수가 많은 것뿐이지, 개체들 자체는 그리 강한 놈들이 아니야.’
물론 징그럽기는 엄청 징그러웠다.
타란튤라들이 내 몸에 기어오르고, 성인 남성 크기의 거미들이 내게 달려드는 등의 모습이 말이다.
더한 것을 겪은 나였기에 어찌어찌 버티는 거지, 비위 약한 사람이라면 진작에 혼절했을 듯했다.
‘그나저나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몸길이가 2m는 되어 보이는 거미를 쓰러뜨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수백의 거미들과 온갖 거미줄로 장식된 게이트 내부.
내가 환각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무언가가 달랐다.
‘환각에서는 분명 위협적인 기운이 느껴졌는데, 지금 그게 느껴지지가 않아.’
괜한 걱정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게이트 내에 보다 큰 위협이 있다고, 내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키이이엑!
“…쉴 틈을 안 주는구먼.”
내게 달려드는 거미들을 향해 전류를 몇 방 날려 주었다.
이 게이트에서 이상한 점들이 많이 느껴졌지만, 당장은 눈앞의 전투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건 그렇고, 이 거미줄들이 은근히 거슬리네.’
나는 거대한 타란튤라를 자바니아로 베며, 내 근처를 둘러봤다.
엄청난 머릿수의 거미들도 문제였지만, 주위에 쳐진 거미줄들도 문제였다.
이게 그냥 큰 거미줄이라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엄청 끈적거리네.”
거미줄의 접착력이 일반 거미줄 수준이 아니었다.
왼팔이 거미줄에 닿자, 팔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힘을 이용하면 어찌어찌 떼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힘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전투 중에 이런 방해 요소는 꽤 치명적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쉽게 끊어지지도 않아.’
자바니아로 거미줄을 베어 내려고 했으나, 예상외로 한 번에 안 끊겼다.
거미줄의 두께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거미줄들을 보자, 나는 확신했다.
‘이 게이트에 더 크고 강한 녀석이 있어.’
지금 내가 상대하는 거미들 중 가장 큰 녀석의 몸길이는 해 봤자 3m였다.
거기다 이 거미들의 수준을 봤을 때, 잘해 봤자 5급 위험도.
그것도 많이 쳐줘야 5급이지, 여기 대부분은 6급 위험도 미만이었다.
‘저런 거미들 따위가 이런 거미줄을 만들 수 없어.’
더 강한 녀석들이 분명 이 게이트 안에 있었다.
회귀 전, 거미 형태의 몬스터들 또한 상대한 적이 많았다.
그리고 이런 거미줄을 만들 거미라면 분명 만만한 녀석이 아닐 것이었다.
‘게이트의 깊숙한 곳에 있는 건가? 아니면 이 작은 녀석들을 해치우다 보면 모습을 드러내려나?’
보통의 게이트는 특정한 패턴이 있어, 몬스터들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했듯, 이 게이트는 보통의 게이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언제 어디서 강력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쉬에에에!
“그래, 너희들부터 다 잡아 줄게.”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을 지워 내며 다시금 전투에 집중했다.
자바니아와 전류들을 이용해 거미들을 죽이며, 와이어를 이용해 빠르게 이동했다.
하지만 싸움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거미들을 상대하는 건 문제가 없었으나, 문제는 역시 거미줄이었다.
‘더럽게 많이 쳐 놓았네.’
거미줄에 걸리게 되면 상당히 위험했다.
물론 힘으로 거미줄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잠깐의 틈을 보인다는 게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거미줄을 최대한 조심하며 싸웠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신경 쓸 게 많아지다 보니,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 없었다.
‘그냥 엔드리온을 써서 거미줄을 다 태워 버릴까?’
사실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지만, 위험 부담이 있었다.
엔드리온의 힘을 쓰면 내 신체 능력이 저하되고, 잘못했다가 탈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거미줄들을 없애는 편이 좋았다.
리스크가 있더라도 시도를 해 보는 편이…….
크으으으……. 케에에에.
엄청난 수의 거미들을 상대하던 중, 저 멀리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울음소리는 지금까지 상대했던 거미들과 달랐다.
아니, 울음소리뿐만 아니라,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기운부터가 달랐다.
“…이런 X발.”
그 울음소리의 주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나는 나도 모르게 욕을 했다.
사실 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아크라맨튤라, 아라크네론, 아난시. 저 셋이 대체 왜 같이 있는 거야?’
내 앞에 나타난 세 마리의 거대한 거미.
각각 3급, 3급, 4급 위험도를 지닌, 거미 형태의 몬스터들 중 최강이라 불리는 몬스터들이었다.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급인 녀석들일 텐데, 왜…….’
지금까지 수많은 게이트를 토벌했고, 저 세 마리 또한 전부 한 번씩 상대했었다.
하지만 저 셋이 같은 게이트에 있는 건 처음 봤다.
아니, 애초에 보스급 몬스터 세 마리가 같은 게이트 내에 있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여기는 대체 뭐 하는 게이트야?”
나는 내 목에 걸린 돌멩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를 이곳으로 이끈 돌멩이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미치겠네.”
나는 자바니아를 들며, 내 앞에 나타난 세 마리의 거미들을 바라봤다.
전부 탱크 이상의 크기와 상당한 전투력을 지닌 놈들이었다.
‘한 마리면 내 짬밥으로 어찌어찌 이겨 보겠는데, 세 마리는 도저히 무리인데.’
게다가 저 세 마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내 주위의 수백 마리의 거미들이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되지?’
엄청난 머릿수의 거미들과 내 움직임을 제한시키는 거미줄.
거기다 보스 몬스터급의 거대한 거미 세 마리.
여기는 나 혼자서 레이드할 곳이 아니었다.
‘일단 도망치자.’
여기를 다시 올지 모르겠지만, 온다면 제대로 된 팀을 짜고 와야 할 듯했다.
그도 그럴 게, 보스 몬스터급 거미 세 마리가 있는 던전은 암만 생각해도…….
우웅.
게이트 밖으로 향하려던 순간, 갑자기 엔드리온의 조각이 진동했다.
근거는 없었지만, 이 돌멩이는 내가 게이트 밖으로 나가는 걸 막으려는 듯했다.
“야, 또 뭐가 문제인데?”
우웅—!
“내가 저것들을 혼자 이길 수 있을 거 같냐?”
회귀 전의 나라면 가능했겠지만, 지금의 내 몸으로는 무리였다.
그걸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여기서 빠져나가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조그마한 돌멩이는 나보고 나가지 말라고 시위하는 듯했다.
“미안하지만 이번만큼은 네 말을 무시하는 게 맞다.”
나는 이 말과 함께 왔던 길을 돌아가려고 했다.
근데 그러려던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키이이이아아.
쉬익. 시아아카이.
내게 다가오던 거미들이 갑자기 물러서기 시작했다.
작은 거미들뿐만 아니었다.
아크라맨튤라, 아라크네론, 아난시.
그 보스 몬스터급 거미들 세 마리 모두 내게서 멀어졌다.
‘뭐지?’
지금 상황 자체가 거미들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거미들 입장에서는 지금 물러설 이유가 전혀 없던 것이다.
“으음?”
의문을 품던 중, 거미들은 더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거미들이 길을 터 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게이트의 깊은 곳으로 갈 수 있게끔, 거미들이 비켜 준 것이었다.
“대체 이게 뭔…….”
그동안 수많은 게이트를 토벌했고, 수많은 몬스터들을 죽였다.
하지만 이런 행동을 보이는 몬스터들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공격을 멈추고 물러나더니, 이제 아예 길을 내준다고?’
수상했다.
마치 나를 함정으로 유인하는 것만 같은…….
우웅! 우웅!
그때 또다시 울리는 엔드리온의 조각.
어서 나아가라고, 나를 보채는 것만 같았다.
“…어쩔 수 없나.”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이곳을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니, 이미 거미들이 내 퇴로를 완전히 막고 있었다.
여태 상대했던 것들뿐이라면, 막힌 퇴로를 뚫고 이곳에서 벗어났을 테지만.
‘저 세 마리는 절대 못 뚫지.’
엄청난 크기의 거미 세 마리까지 합세해, 내 퇴로를 막고 있었다.
보스 몬스터급 거미 세 마리가 직접 나서서 내 퇴로를 막다니… 이거 참,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이 게이트, 진짜 뭐지?’
갈수록 이곳에 대한 의문이 더 쌓여만 갔다.
그리고 이 의문을 해결할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하나였다.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천천히 게이트 안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길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미들이 내가 단 한 방향으로만 갈 수 있게끔 나를 둘러쌌기 때문이다.
‘후우우. 방심하지 말자.’
나는 자바니아를 꽉 잡은 채 계속 주위를 살폈다.
무슨 일이 언제 일어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쪽 길은 분명 환각에서 봤던 길이야.’
게이트의 깊숙한 곳으로 이어지는 길.
갈수록 거미줄이 점점 더 많아져 갔다.
하지만 그에 반비례하듯, 거미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자, 이내 커다란 광장에 도착했다.
‘아니, 광장이라기보다는… 신전 같네.’
거미줄이 쳐져 있어 잘 안 보였지만, 주변에 석상들이 많이 보였다.
정체 모를 인물들의 모습을 한 커다란 석상들이…….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나는 신전의 중앙 쪽을 바라봤다.
중앙에 돌로 된 커다란 왕좌가 있었고, 그 위에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온몸을 망토로 덮은 사람 말이다.
‘환각에서 봤던 그 사람이네.’
나는 속으로 확신하며, 그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환각에서 봤던 것처럼, 그의 오른손에는 검은색 보석이 박힌 반지가 있었다.
“크크크큭.”
“음?”
“이곳에 인간이 온 건 오랜만이군, 크큭.”
남자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는 정체 모를 언어로 내게 말했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말이 전부 이해가 되었다.
“나를 죽이기 위해 그동안 많은 인간들이 찾아왔지. 그리고 장담컨대, 네가 마지막은 아닐 거다.”
“죽이다니요? 저는 전혀 그럴 생각 없습니다.”
나는 일단 한국어로 그에게 대꾸했다.
“저는 그저 그쪽이 끼고 있는 그 검은색 반지만 얻으면 되거든요. 그러니까 그것만 넘기면, 평화롭게 넘어갈 수 있어요.”
솔직히 말해, 저 반지는 이제 뒷전이었다.
저 반지를 얻는 것보다, 이 게이트가 뭐 하는 곳인지 더 알아내고 싶었다.
“흐으음. 한국어인가? 이번에는 한국에서 온 인간인가 보군.”
“…이번에는?”
“게이트를 지구의 각 나라마다 하나씩 열어 놨거든. 지구의 누구든 내 힘에 도전할 수 있게끔 말이야.”
“뭐라고?”
방금 저 남자의 말을 해석하면, 이곳으로 이어지는 게이트가 한국에만 있다는 게 아니었다.
지구 곳곳에 이곳으로 이어지는 게이트가 있다는 뜻이었다.
회귀 전에 그런 게이트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나저나 너. 이 반지를 노리는 거면……. 후훗. 너도 역시 나의 힘, ‘거미의 왕’의 힘을 노리러 온 거구나.”
“뭐? 아니, 저 반지… 그냥 체력을 증가시켜 주는 물건 아니었나요?”
“체력 증가? 아아아, 그래. 그런 부가적인 힘이 담겨 있기는 하지. 하지만 말 그대로 부가적인 것일 뿐. 이 반지에 봉인된 힘은 그딴 것보다 훨씬 위대한 것이다!”
…아무래도 일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는 듯했다.
체력 문제를 해결하고자 저 반지를 얻으러 온 건데, 알 수 없는 일들만 자꾸 일어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방금 말한 ‘거미의 왕.’
저 칭호가 어째 상당히 불안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아아, 그런 거면 제가 잘못 찾아왔네요. 원하는 물건이 아니니 다시 돌아가겠…….”
우웅! 우웅!
“아, 또 왜?”
내 목에 걸린 푸른 돌멩이가 또다시 강하게 진동했다.
진동하는 것뿐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이 돌멩이가 내게 무언가 말하는 거 같았다.
마치 나보고 돌아가지 말라고, 저 반지를 어떻게든 얻어 내라고…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근데 뭐, 어차피 엔드리온의 조각이 이러지 않아도…….
“돌아간다고? 웃기는 소리!”
저 남자는 나를 그냥 보내 줄 거 같지 않았다.
“여기에 온 이상, 이 힘을 얻어 내거나 죽음뿐이다! 그러니 목숨 걸고 이 반지를 얻어, ‘거미의 왕’이 되도록 해라!”
“아니, 그러니까 그게 뭔…….”
“히얏!”
남자는 내게 더 이상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주변의 거미줄을 타, 내게 매우 빠른 속도로 접근해 왔다.
이에 나는 한숨을 쉬며, 내 목에 걸린 푸른 돌을 슬쩍 바라봤다.
“내가 다시 네 말을 듣나 보자.”
이 말을 끝으로, 나는 자바니아를 남자를 향해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