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네, 뭐. 저희 연인 맞아요. 사귄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익숙하지는 않지만요.”
“아, 그렇군요. 그럼 앞으로 좋은 시간들 많이 가지셔야겠네요?”
“네, 그래야죠.”
나는 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리고 이렇게 태연한 나와는 달리.
“에? 어? 으? 어어? 뭐,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이민아는 상당히 당황한 얼굴이었다.
* * *
‘네, 뭐. 저희 연인 맞아요. 사귄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익숙하지는 않지만요.’
박유진이 직원에게 한 대답.
그 말을 듣자마자, 이민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에? 어? 으? 어어? 뭐,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왜? 맞잖아?”
“…에?”
너무나도 태연히 대답한 박유진에 이민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박유진은 직원과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직원이 박유진과 이민아 근처에서 멀어진 후.
“미안. 방금은 그냥 직원에게 설명하기 귀찮았거든.”
“…뭐가?”
“우리 연인 아니라고 설명하는 거. 게다가 그걸 설명하면 또 분위기 어색해질까 봐, 그냥 대충 넘어간 거야.”
“아, 아아. 그랬던 거구나.”
“왜? 많이 당황했냐?”
“바, 방금은 누구나 당황한다고!”
“하기야, 그럴 만도 하지.”
박유진은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어갔다.
하지만 이민아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박유진과 연인?’
이민아에게 있어 박유진은 소중한 친구였다.
그래서 그녀는 박유진에게 있어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만약에 박유진과 연인이 된다면…….
‘너무 앞서가는 건가? 하지만 만약, 진짜 만약 그렇게 된다면… 박유진이 나를 절대 버리지는 않을 거야.’
이민아에게 있어 매혹적인 선택지이기는 했다.
하지만 문제는 박유진에게 그럴 생각이 있냐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민아 본인이 박유진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냐는 거였는데.
‘이성으로서의 호감… 없다고는 말 못 하지.’
박유진은 이미 친구 이상의 존재가 된 지 오래였다.
거기다 무엇보다, 이민아는 박유진의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고픈 욕망이 있었다.
‘연인이 되면 나를 가장 소중하게 대해 주겠지?’
이민아는 자기 옆의 박유진을, 붉어진 얼굴로 살짝 바라봤다.
어느 순간부터 이 남자는, 자기 인생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버렸다.
‘으음…….’
이민아 본인은 얼마든지 마음이 있었다.
다만 박유진이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랐다.
“그, 있잖아?”
“응? 왜?”
“너 혹시, 연애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그래서 이민아는 박유진에게 넌지시 물어보고자 했다.
“아아, 다, 다른 게 아니라, 그냥 이야기 나온 김에, 그, 궁금해서.”
“연애? 연애에 대해서는 딱히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그, 그치? 그렇다면 말이야, 만약에 있잖아. 진짜 만약에 너랑 내가 사귀게 된다면 어떨 거 같아?”
이민아는 질문을 하며, 동시에 자신도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내가 박유진과 사귄다면…….’
행복하게 둘이서 지내는 모습, 그리고 박유진과 함께 웃으며 식사하는 등.
그 모습들을 상상하자, 이민아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동시에 깨달았다.
‘아, 나 이제 진짜 얘 없이는 못 사는구나.’
자기 곁에 어떻게든 박유진을 둬야 한다는 걸, 이민아는 이 순간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민아가 속으로 이런 생각들을 하던 중.
“음, 너랑 사귀는 거?”
박유진은 나름 진지하게 이민아의 질문에 대해 생각했다.
이에 이민아는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박유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귀는 거 자체는 문제없을 거야.”
“그, 그래?”
마침내 나온 박유진의 대답에 이민아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응, 게다가 굳이 해야 한다면, 내게 있어 네가 가장 좋은 상대이기는 하겠지.”
“그치. 솔직히 나만 한 상대를 네가 또 어디서 구할 수 있겠…….”
“근데 나중에 문제가 생길 거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아마, 너랑은 오래가지는 못할 거다.”
“왜? 혹시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거라면…….”
“아니, 너에게 문제는 없어.”
박유진은 헛웃음과 함께 한숨을 쉬었다.
“문제는 내게 있는 거지.”
* * *
이민아와의 연애.
뭐, 솔직히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말했듯, 굳이 해야 한다면 지금으로서는 이민아가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나랑 은근 잘 맞는 구석도 있었고, 무엇보다 이 녀석의 멘탈을 지속적으로 케어하기에도 좋을 터였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민아와 사랑을 나누기 힘들었다.
“문제가 너에게 있다니?”
“내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거든.”
정신적인 문제, 정확히 말해 트라우마가 하나 있었다.
“그걸 고치지 않는 이상, 너와의 연애는 오래가기 힘들 거다.”
“무슨 문제인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면…….”
“이건 도와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도움 자체는 어쩌면 받을 만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이민아가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 트라우마를 내게 선물한 게 이민아였으니 말이다.
‘이민아 씨? 대체 왜 이러는 거죠? 지금 왜 저를…….’
‘미안, 박유진. 버티기 힘들어. 그러니까, 부탁할게.’
‘이민아 씨, 이건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문득 옛날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날 그녀가 내 마음에 남긴 상처까지도 전부 기억이 났다.
‘이민아와 이렇게 일상적인 시간을 보내는 건 전혀 문제가 없어.’
하지만 만약에.
진짜 만약에 내가 이민아와 사귀게 된다면, 일이 좋게 끝나지는 않을 거다.
그도 그럴 게, 이민아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면 결국 내 트라우마가 다시 기어 나올 테니 말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내가 도와주면, 너의 그 문제를 고칠 수 있을지도.”
“그치. 그건 모르는 거지. 근데 왜 그렇게까지 나를 도와주려는 거냐?”
“네가 그 문제 때문에 나와 못 사귀는 거면…….”
“나와 사귀는 건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 아니었냐? 그런 것에 이렇게까지 나를 도울 필요 없어.”
“…아.”
이민아는 나를 멍하니 쳐다봤다.
마치 자신의 본심을 들킨 것처럼 말이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알겠지?”
나는 그런 그녀를 피식 웃으며 바라봤다.
그렇게 그냥 대충 이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 했는데.
“아니, 신경 쓸 거야.”
이민아는 이내 진지한 어투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야. 너를 돕는 건 당연히 해야 하는 거고.”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다.”
나는 옅게 미소를 지은 채, 내 손을 이민아의 손 위에 올렸다.
이에 이민아는 놀라며 몸을 움찔했지만, 나는 하려던 말을 마저 했다.
“하지만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거든. 마음은 고맙지만,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
“…알겠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이유가 있는 거겠지.”
“응, 이유가 있기는 하지.”
나는 이민아를 조용히 바라봤다.
회귀하기 전, 유나를 잃은 게 가장 큰 트라우마였다.
하지만 그다음으로 아픈 기억으로 남은 건 이민아였다.
‘멋대로 나를 두고 갔으니까.’
물론 시간이 약이기는 했다.
하지만 중요한 때에, 이 트라우마는 언제 또 기어 나올지 몰랐다.
그걸 어떻게든 해야 내가 누구와 진심으로 사랑을 하든가 할…….
‘하아아, 됐다.’
지금 이런 생각들을 해 봤자 의미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민아. 저 검은 고양이 뭔가 괜찮게 생긴 거 같다?”
“아, 그, 그래? 그럼 저 녀석 구경하러 갈까?”
“그래. 그러자.”
“그, 그럼 어서 가자.”
이민아는 이 말과 함께,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잡는 거 자체가 긴장됐는지, 이민아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는 미소를 그녀에게 보였다.
“귀엽네.”
“으, 응?”
“너 말고 고양이들.”
“…이씨. 나, 나도 알거든!”
이민아는 내 손을 붙잡은 채, 나를 이끌었다.
우리의 이런 모습만 보면, 보통은 우리를 연인이라 생각을…….
‘넌 절대 나를 벗어나지 못해, 박유진. 절대로.’
“…아.”
다시금 떠오르는 회귀 전의 기억.
그게 떠오르자, 나는 나도 모르게 이민아의 손을 놓았다.
“박유진?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손이 아파서.”
“아, 내가 너무 세게 잡았나? 미안.”
“…아니야.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방금 떠오른 기억들 때문에 몸도, 마음도 고통스러웠다.
‘미치겠네.’
이민아가 내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다만 알면서 최대한 모르는 척했을 뿐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옛날의 잔재가 이렇게 나를 괴롭힐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방금도 그런 거였지.’
나랑 이민아가 연인 같은 모습이라고 인식을 하자마자, 회귀 전의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 이민아와 최대한 친구처럼 지내는 게 맞지 않을까 싶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 여기서 한 시간만 있다가 가자. 유나를 혼자 집에 너무 오래 놔두면 좀 미안할 거 같거든.”
“응, 알겠어. 그리고 들어가는 길에 맛있는 것도 좀 사 갈까? 유나, 지난번에 보니까 족발 같은 거 좋아하던 거 같은데?”
“맞아, 걔 그런 거 좋아하거든.”
“으흠. 게다가 나처럼 귀여운 것들도 좋아하던 거 같던데? 다음에 유나도 여기 데려올까? 유나 고양이들 엄청 좋아할 거 같은데.”
“하기야. 유나도 여기 오면 좋아하기는 하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근데 나중에 유나 방학 시작한 후에 데려오자. 유나 지금 공부하느라 바쁠 시기거든.”
“에이, 중학생 때 공부가 뭐가 중요하다고. 고등학교 때가 중요하지.”
“다들 너처럼 놀면서 지내는 게 아니야, 인마.”
“야, 나도 대학 오기 전에 나름 공부했었거든?”
“어련하시겠어.”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문득 든 생각이 하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기말고사까지 얼마 안 남지 않았냐?”
“야, 괜찮아, 괜찮아. 공부는 시험 일주일 전부터 해도 충분히…….”
“그렇게 말한 애들 치고 잘 보는 녀석들 없더라.”
“아, 아니거든! 너 딱 대고 기다려! 나 올 A 받고 올 테니까.”
“아, 네네. 알아서 하세요.”
나는 대충 대꾸한 뒤, 속으로 생각들을 정리했다.
‘그나저나 기말고사라…….’
기말고사 자체야, 그냥 적당히 준비하면 될 듯했다.
하지만 기말고사가 끝나면 방학이 있고, 방학 중에 헌터 대전 본선이 있을 예정이었다.
‘앞으로 한 달 동안은 바쁘게 움직여야겠네.’
이민아와 다시금 합을 맞추는 것부터 시작해, 내 능력을 조절하는 것까지.
특히 내 능력을 조절하는 게 중요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주말 동안 엄청난 힘을 얻게 되었다.
그 엄청난 힘에 빠르게 적응한 후, 똑바로 다룰 수 있게 되어야 했다.
‘내일부터 다시 빡세게 달려야겠네.’
하지만 그건 내일의 문제.
오늘만큼은 이민아와 마음 편하게 쉴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흘렀고, 나아가 일주일, 그렇게 또 한 달이 지났다.
어느새 기말고사 기간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