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사는 전격계 헌터-96화 (96/240)

96화

* * *

고연대학교 의료실.

그 근처의 작은 휴게실 안.

나는 남자 한 명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그런 내 옆에 하세리가 앉아 있었다.

“박유진 씨.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제 명함이라도 받아 주세요. 나중에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제게 연락 주세요.”

“네, 알겠어요.”

나는 트라이온? 트라게?

아무튼 경기도의 어느 길드에서 온 헌터의 명함을 받았다.

“생각이 바뀐다면 연락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길드 관계자는 내게 인사를 한 후, 내 옆의 하세리를 조금 불만스럽다는 듯이 바라봤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하세리는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트라이온 길드의 김지훈 씨였죠? 혹시 제게 할 말이라도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하세리의 그는 바로 꼬리를 내리고 자리를 떴다.

그렇게 그 남자가 떠난 뒤, 하세리는 이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방금 저분이 마지막 분이었죠?”

“네. 제게 명함을 주려는 사람은… 적어도 오늘까지는 더 없겠죠.”

내 근처에 쌓인 수많은 명함들.

나는 방금 받은 명함을 그 위에 놔두었다.

“아무튼, 하세리 헌터님. 고맙네요. 덕분에 사람들을 쉽게 보낼 수 있었어요.”

아까까지만 해도 스물?

아니, 약 서른 개의 길드에서 나 하나를 보러 찾아왔다.

하나같이 나를 자기네 길드로 데려가겠다는 목적이었다.

‘약 서른 개의 길드면… 원래 같았으면 거의 네 시간쯤 걸렸겠네.’

회귀하기 전에 이런 일을 자주 겪어 봐서 잘 알았다.

그 당시에도 나를 스카우트하겠다는 길드들이 차고 넘쳤으니 말이다.

그들에게 일일이 거절 의사를 표시하는 것도 일이었고, 가끔 끈질긴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

그렇다 보니, 나는 당연히 몇 시간은 고생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세리 덕분에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고마워할 거 없어요.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요.”

하세리는 붉은 머리를 목 뒤로 넘기며 내게 미소를 보였다.

알 사람은 다 알겠지만, 대한민국의 길드 대부분은 헌터 협회의 소속이었다.

헌터 협회로부터 지원금도 받고, 통제도 받는 등, 헌터 협회의 영향력은 길드들 사이에서 꽤 큰 편이었다.

그리고 그 헌터 협회의 실세 중 하나인 하세리가 지금 내 옆에 있었다.

‘내가 하세리와 같이 나타나니까 다들 놀랐지.’

헌터 쪽에서 일하는 사람이면 하세리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근데 그런 사람이 나랑 같이 나타나서, 당연하다는 듯이 스카우터들에게 말했다.

“혹시나 해서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 박유진 씨는 조만간 제 밑에서 일할 예정이에요. 중요한 건 아니니, 참고만 하세요.”

짤막하게 몇 마디 한 게 전부였지만, 그 영향은 대단했다.

나를 찾아온 길드들 중 절반가량이 자리를 떠났고, 남아 있던 절반도 나를 그리 오래 붙잡지 않았다.

그래서 네 시간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던 게, 약 30분 안에 끝났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하잖아요. 박유진 씨께서 내년부터 저와 함께 일할 건데.”

“틀린 말씀은 아니네요.”

하세리가 방금 한 말 덕분에, 나는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었다.

‘내년부터 헌터 협회에서 일하는 거라.’

회귀하기 전의 나는 그 어느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는 게 취향이 아니다 보니, 그냥 적당히 프리랜서로 지냈었다.

그런 내가, 대한민국 헌터 업계의 최고봉인 협회에서 일한다라…….

‘그래도 뭐, 이 편이 지금으로서 더 낫겠지.’

회귀하기 전에는 챙겨야 할 사람이 나 자신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유나가 있었다.

‘앞으로 유나에게 들어갈 돈이 더 늘어나겠지.’

아무래도 불안정한 프리랜서보다, 안정적인 협회의 한 자리가 나을 수 있었다.

‘누군가 밑에서 일하는 건 처음이기는 한데, 어떻게든 되겠지.’

이미 더한 일들도 많이 겪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내가 함께 일할 사람은 하세리였다.

그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으니, 같이 일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듯했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죠. 하세리 헌터님 아니었으면 지금도 스카우터들에게 시달리고 있었을 텐데.”

“되게 배부른 고민이네요. 어떤 헌터들은 스카우트조차 못 받아서 우울해하던데. 뭐, 박유진 씨는 능력이 있으니까 이런 고민이 가능한 거겠죠.”

하세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저는 그런 박유진 씨를 제 손에 넣었네요.”

“그게 그렇게까지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하세리 헌터님의 사람들 중에 저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지 않나요?”

“많죠. 근데 박유진 씨는 뭔가, 으음, 특별한 느낌이에요.”

“특별한 느낌이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거예요. 그냥 제가 박유진 씨에게 무언가 특별함을 느꼈다. 이렇게만 알고 계세요.”

“네, 뭐. 알겠어요.”

하세리의 말이 의미심장했지만,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저 누나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 그리고 박유진 씨. 제가 박유진 씨를 도와줬잖아요? 혹시 괜찮다면, 저도 박유진 씨에게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너무 어려운 부탁만 아니면 가능하죠. 근데 제게 부탁할 게 있다고요?”

“어려운 건 아니에요. 그냥 이번 헌터대전 끝나고, 저랑 하루를 같이 보내 줄 수 있을까요?”

“저랑 하루를 같이 보내고 싶다고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고, 이에 하세리는 피식 웃었다.

“곧 함께 일하게 될 텐데, 제가 박유진 씨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박유진 씨에 대해 알아 가는 시간을 가지면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그렇군요. 그거라면…….”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세리와 하루 정도 어울리는 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하윤경, 그 망할 아줌마가 문제지.’

그 미친 여자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예전이었으면 하세리의 이 부탁을 거절했을 거다.

그래, 예전이었다면 말이다.

‘계획의 변경이 생겼지.’

하세리와 내년부터 같이 일하기로 했으니, 하윤경의 문제를 내년 전에 끝내야 했다.

즉, 차라리 하윤경의 시선을 끄는 것도 지금의 선택지 중 하나였다.

‘흠. 차라리 헌터 대전 끝나고, 여름 방학 끝나기 전에 먼저 움직일까? 그렇다면 하세리를 만나면서 하윤경의 시선을 끌어서…….’

나는 속으로 재빠르게 생각들을 정리한 뒤, 다시금 입을 열었다.

“괜찮을 거 같네요. 저도 하세리 헌터님에 대해 더 알아 가는 것도 괜찮을 거 같거든요.”

“잘 됐네요. 그럼 제가 나중에 연락드릴 테니, 그때 시간과 장소를 정하도록… 으음? 잠시만요.”

하세리는 문자가 온 듯한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확인했다.

그러고는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세리 헌터님? 무슨 일 있는 건가요?”

“별것 아니고, 희나 언니한테 연락 온 거예요.”

“이희나 교수님에게서요?”

“헌터 대전의 첫 번째 경기가 모두 끝났고, 각 팀마다의 점수가 나왔대요.”

“아, 그렇다면…….”

“박유진 씨와 이민아 양의 팀은 96점. 10팀 중 현재 1등이에요.”

“96점으로 1등이라면 뭐, 나쁘지 않네요.”

목표는 우승.

정확히는 이민아를 우승시켜, 그녀의 자존감을 올리는 것.

그런 식으로 이민아를 이진성에게서 독립시키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1등이 나쁘지 않다라. 역시 박유진 씨는 제 예상대로…….”

하세리는 피식 웃으며 내게 무언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갑자기 유나가 휴게실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빠. 어서 와 봐.”

“음? 왜 그래?”

“민아 언니 깨어났어. 근데 상태가 뭔가 좀…….”

“가 볼게.”

아까 이민아를 기절시키기는 했다.

하지만 내 경험상, 기절시킨다고 이성이 무조건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이민아가 또 사고 치기 전에 빨리 가 보는 게 좋았다.

“하세리 헌터님. 아무래도 제가 빨리 가 봐야 할 거 같은데, 혹시…….”

“저는 천천히 따라갈 테니, 먼저 가 보세요.”

“네, 그럼…….”

나는 하세리를 뒤로하고, 유나와 함께 빠르게 의료실을 향해 달려갔다.

제발 이민아가 또 사고 안 쳤기를 바라며 말이다.

* * *

“…재밌는 친구네. 진짜로 재밌는 친구야.”

의료실 방향으로 뛰어가는 박유진을 바라보며, 하세리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을 만났지만, 박유진과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제안을 망설이지도 않고 거절한 사람은 박유진이 처음이었지.’

박유진을 자기 편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지만, 하세리는 박유진의 거절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게다가 박유진을 자신의 편에 데려왔음에도, 하세리는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내게 조금 더 집중해 주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듣도 보도 못한 전류의 활용을 보여 준 엄청난 일렉트로 마스터.

거기다 엄청난 정찰 실력과 와이어를 이용한 기동성까지.

아직 D급이었지만, 하세리는 그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문제점이 있다면 바로 박유진의 충성심이었다.

‘내가 원래 충성심을 막 바라는 사람은 아닌데……. 박유진은 조금 다르네.’

하세리는 실제로 자기 사람에게 충성심을 요구하지 않았다.

적당히 관계를 유지하며, 기브 앤 테이크를 확실히 하는 것.

하세리는 그러한 관계가 이상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박유진은 그녀에게 있어 달랐다.

‘나만 바라보게 하고 싶네.’

지금은 하세리의 편이었다.

하지만 하세리는 박유진이 완벽한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언제 자기 곁을 떠날지 몰랐다.

‘내 제안으로 처음으로 거절한 사람이라 그런 건가. 뭔가… 뭔가 완벽히 내 것으로 굴복시키고 싶어.’

뒤틀린 욕망이라는 걸, 하세리 스스로도 자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욕망을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을 밀쳐내던 사람을 자신의 손안에 넣고 싶었다.

‘…하, 나도 많이 변했네. 인재를 양성하는 걸 좋아하지, 이런 쪽으로는 생각도 한 적이 없는데.’

하세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유진에 대한 생각들이 많았지만, 그녀는 그 생각을 잠시 머리 밖으로 밀어냈다.

어차피 그녀는 내년부터 박유진과 많은 시간을 함께할 예정이었다.

그와 함께 일하면서 관계를 조금씩 바꾸어 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하세리는 이렇게 결론 내리며 의료실 쪽으로 향했다.

‘아까 이민아 양이 깨어났다고 했지?’

이민아 또한 하세리가 노리는 인재 중 하나였다.

물론 하세리는 이진성이 신경 안 쓰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이민아가 스스로 자기 밑으로 들어오고 싶어 한다면, 그녀는 얼마든지 받아 줄 의향이 있었다.

“…음?”

그렇게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하세리는 의료실에 도착했다.

그러나 의료실에 들어서자, 예상외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민아. 이거 일단 놓고 말할까?”

“싫어. 안 놓을 거야. 너 절대 안 놔.”

난처한 표정을 짓는 박유진.

그런 그를 세게 끌어안은 이민아.

그것도 그냥 끌어안은 게 아니었다.

이민아는 박유진을 세게 끌어안은 채, 양손으로 박유진의 몸을 이곳저곳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본 하세리는…….

‘흠. 뭔가 X같네?’

자기도 모르게, 그리고 그녀답지 않게 속으로 욕을 했다.

평소에 저 둘이 뭘 하든, 하세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이민아의 저 모습이… 하세리에게 있어 많이 불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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