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역사에 남기는 무슨. 박유진 씨는 진심으로 저희를 전부 이기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네, 저는 가능하다고 봐요.”
나는 실키의 가면을 쓰며 대꾸했다.
“적어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요? D급 혼자서 저희 일곱 명을…….”
“불가능하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저는 끝까지 싸울 생각이니까요.”
나는 가면의 안쪽에 손을 가져갔다.
가면 안쪽에 총 열 개의 버튼들이 있었다.
나는 그중 일곱 개의 버튼들을 눌렀다.
‘밑 작업부터 해 놓자.’
나는 1팀의 멤버들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조원선. 메인 탱커로 보이는 창잡이. 옆에는 보호막 주는 탱커. 몬스터 테이머인 마법사, 궁수, 마탄 사수, 프리스트, 그리고 정령사.’
나는 이 일곱 명의 목소리를 한 번씩 들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 나는 잠시 헛소리를 하기로 했다.
“조원선 씨, 혹시 옆의 탱커 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거죠?”
“아, 별것 아니고요.”
나는 대답을 하며 가면의 안쪽을 확인했다.
열 개의 버튼 중 하나가 아주 미약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일단 한 명의 목소리는 얻었고, 나머지 여섯 명도 얻어내자.’
우선 목표는 조원선 옆의 여자 탱커.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할 헛소리는…….
“다름 아니라 옆의 분이 너무 예쁘셔서요. 이름이라도 알고 싶네요.”
“…네? 제, 제게 하시는 말씀인…….”
“수현 씨, 저거 분명 수작 부리는 것일 테니까 혹하지 마세요.”
조원선이 그녀의 말을 막았으나, 이미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후였다.
가면 안쪽의 또 다른 버튼에서 다른 색의 미약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수작이라니요? 저를 너무 경계하시네요. 뭐, 그건 그렇고, 몬스터 테이머 씨? 주변의 궁수 분과 총잡이 분과의 분위기가 미묘하네요. 혹시 뭐, 삼각관계? 이런 건가요?”
“아니에요. 제가 왜 이 둘과…….”
“삼각관계라니요! 태인은 제가 먼저…….”
“저는 경쟁 따위는 안 하고…….”
내 말에 1팀의 딜러 세 명은 전부 입을 열었다,
뭐라고 따지듯이 말했지만, 나는 그들의 말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관심 있는 건 그들의 목소리였으니 말이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1팀의 프리스트 분과 정령사 분? 두 분은 사이가 좋은가요? 신을 모시는 분과 정령을 다루는 분이 같은 팀에서 싸우는 건…….”
“네 알 바냐, 이 새끼야.”
“저희의 신은 세상의 모든 존재를 수용하는…….”
이렇게 1팀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가면 안쪽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가면 안쪽의 열 개 버튼 중 일곱 개의 버튼들이 약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이걸로 준비는 끝난 것이었다.
“박유진 씨는 생각보다 말이 많으신 분이었군요. 제 팀에게 일일이 다 말을 걸 줄은 몰랐는데.”
“고루고루 친하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거든요.”
“시간을 끄려는 건 아니고요?”
조원선은 기절해 있는 이민아를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이민아 씨가 정신 차리기를 기다릴 생각이면 포기하세요. 애초에 이민아 씨가 깨어나면 박유진 씨에게 좋을 거 없어요. 어차피 저희가 또 이민아 씨를 조종하면…….”
“제가 그걸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답니다. 그리고 조원선 씨 말씀대로, 제가 말이 너무 많았네요.”
실키의 가면을 똑바로 쓰며, 나는 자바니아를 들어 올렸다.
“이제 본격적으로 붙어 보죠.”
“진짜로 싸울 생각인가요? 다시 말하는 거지만, 혼자서 저희 일곱을 이기는 건 불가능한…….”
“가능성은 스스로 만드는 거예요. 이길 가능성이 없어도, 뭐라도 하다 보면 가능성은 분명 생기겠죠.”
“박유진 씨는 뭘 하지도 못할 거예요.”
조원선은 창을 들어 올리며 내게 다가왔다.
“제 손에 잡히는 순간 승부는 끝날 테니까요.”
“잡아 보세요. 물론…….”
“이야야야!”
조원선은 창을 휘두르며 내게 돌진해 왔다.
하지만 나는 이에 피식 웃으며 와이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걸 이용해 근처의 나무 위로 몸을 옮겼다.
“잡을 수 있다면 말이죠.”
“하, 결국 한다는 게 도망인가요?”
“도망이라니요. 저는 그냥 저만의 방식으로 싸울 뿐이에요.”
이 말과 함께 나는 나무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1팀은 나를 쫓아왔으나, 나는 이미 암살에 도가 튼 녀석이었다.
도망치며 모습을 숨기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 그럼.’
1팀이 지나쳐 가는 걸 확인한 후, 나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재미 좀 볼까?’
나는 실키의 가면을 다시금 확인했다.
일곱 개의 버튼들이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 암살의 미학 】
“계속 찾아봐. 멀리 못 갔을 거야.”
조원선은 자기 팀을 이끌며 지시를 내렸다.
“보이면 바로 말해. 어차피 혼자라 우리를 절대 못 이겨.”
조원선은 자신이 이겼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4팀, 그러니까 이민아와 박유진 팀의 핵심은 이민아였다.
그리고 자기 팀이 이민아를 완벽히 파훼했다.
‘박유진에게 남은 수단은 없어.’
지금 몸을 숨겼지만, 결국 그건 시간 끄는 것에 불과했다.
박유진이 앞으로 뭔 짓을 하든, 조원선은 그걸 받아쳐 낼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최대한 조심하자.’
조원선은 자기 팀의 마법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이민아를 잡는 데 큰 공로를 세운 비스트 테이머에게 말이다.
“상수야. 혹시 모르니까 이민아 잘 봐 두고 있어. 박유진이 또 뭔 짓을 할지 모르니까.”
“네, 알겠어요.”
1팀의 마법사이자 몬스터 테이머 이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조원선 또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상수는 마법사로서의 능력은 부족했지만, 흔하지 않은 비스트 테이머였다.
이민아에 대한 대비책으로 그를 팀에 데려온 거였고, 조원선은 그러기 잘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순조롭네.’
조원선은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말이 들려오기 전까지 말이다.
“하아, X발. 하는 거 X도 없으면서 일만 시키네.”
“…상수야, 뭐라고?”
이상수의 욕설 섞인 말.
그 말에 조원선은 인상을 쓰며 그를 바라봤다.
정작 이상수는 놀란 표정이었다.
“조원선 씨. 방금 그건 제가 한 말이 아니에요. 진짜로요.”
“네가 한 말이 아니기는 뭐가 아니야. 딱 봐도 네 목소리였는데.”
“아, 그러니까 제 목소리는 맞았어요. 근데 방금 그건 제가 한 말이…….”
“뭔 개소리냐? 그럼 여기서 누가 네 목소리를 따라 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조원선은 어이없다는 듯이 이상수를 바라봤다.
하지만 정작 이상수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방금 그건 진짜 제가 아니었다고요!”
“야, 욕할 거면 안 들리게라도 하든가. 그리고 들켰으면 솔직하게라도…….”
“욕을 안 했는데 제가 왜…….”
“안 하기는 무슨. 야, 애들아. 너희도 방금 상수 내 욕하는 거 들었지?”
조원선은 다른 1팀 멤버들에게 물었다.
이에 그들은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듣기는 들었지.”
“네, 저도 이상수 씨의 목소리가…….”
“물론 이상수 씨가 그럴 분이 아니기는 한데, 방금은 너무 명백하게 이상수 씨의…….”
“아니, 나 아니라고!”
이상수는 억울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방금은 내가 진짜로…….”
“상수야. 네가 내게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는 건 너무 추하…….”
1팀의 시선이 모두 조원선과 이상수에게 집중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던 중.
“어억?!”
사제복을 입고 있던 남자가 쓰러졌다.
“석연아!”
가장 먼저 반응한 건, 그의 옆에 있던 정령사였다.
그녀는 프리스트에게 다가갔으나, 그는 이미 정신을 잃은 후였다.
“뭐야? 석연아? 너, 너 갑자기 왜…….”
갑작스러운 상황에 조원선은 당황했다.
그리고 조원선만이 당황한 게 아니었다.
1팀 모두 갑작스러운 상황에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은아 씨. 무슨 상황이죠? 석연 씨가 갑자기 왜…….”
“화, 확인 중이에요. 아마 쓰러진 게……. 여, 여기! 여기에 화상 흔적이……. 아마 전기에 감전당해서 기절을…….”
“박유진. 박유진, 그 사람 전기 쓰잖아. 그럼 설마 박유진이 김석연 씨를 기절시킨 건가?”
“…다들 진정해 봐.”
조원선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는 여전히 당황하고 있었지만, 최대한 침착한 척을 했다.
이럴 때일수록 자기가 잘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은아 씨. 석연 씨가 감전당한 거 확실해요?”
“네, 여기 흔적을 보면…….”
“알겠어요. 그럼 혹시 정령들의 힘으로 석연 씨를 깨울 수 있겠어요?”
“시, 시도는 해 볼게요. 하지만 제 정령들은 치료보다는 전투 보조에 집중되어서, 확실치는 않아요.”
“일단 해 보세요. 그리고…….”
조원선은 이 상황을 타파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내 예상외의 일이 또다시 발생했다.
“하아아. 이은아, 저 병신. 바로 옆에 있었으면서도 그걸 못 막냐.”
“네? 고서경 씨, 뭐라고요?”
정령사는 궁수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궁수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바, 방금 말은 제가 한 게 아니에요!”
“뭐가 아니에요. 평소에도 제게 불만이 있던 거 같은데, 이런 때에 그런 말을…….”
“제가 말한 거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제가 평소에 은아 씨에게 왜 불만을…….”
말다툼하기 시작한 두 여자.
이에 조원선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분명 아까, 이상수도 비슷한 말을 했기 때문이다.
분명 그의 목소리였음에도, 그 또한 자기가 한 말이 아니라고 했었다.
‘뭔가 이상해.’
이상하다기보다 위험을 직감했다.
조원선은 거미의 함정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아리 씨. 혹시 모르니까 저희 모두에게 추가적인 보호막을 주세요. 그리고 상수야. 이 근방의 동물들 같은 거 있냐? 있으면 걔네들 보고 박유진의 위치를……. 어? 사, 상수야?”
아무 대답이 없자, 조원선은 주위를 둘러봤고… 그제서야 알 수 있게 되었다.
“상수야! 상수야, 어디 갔어!?”
그의 팀의 비스트테이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에 조원선은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고.
“뭐야?!”
“바, 방금까지 옆에 계셨잖아. 언제 사라진…….”
그의 팀원들 또한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방금까지 옆에 있던 사람이 사라진 것이었다.
이 알 수 없는 상황에, 그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다, 다들 이쪽으로 모여! 어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조원선은 박유진 정도는 쉽게 잡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방심할 상대가 아니야. 긴장해야겠어.’
순식간에 한 명이 쓰러지고 한 명이 사라졌다.
그런 남자를 상대로 약간의 틈도 보여서는 안 됐다.
“다들 내 옆으로 와! 그리고 이아리 씨! 방금 말한 것처럼 모두에게 보호막을 주세요. 순식간에 안 당하려면 미리 준비를…….”
“크억?!”
“이아리 씨!”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무 위에서 검은 코트의 남자가 떨어져, 이아리의 목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남자의 손에서 전기가 튀더니, 이아리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 개새끼가!”
자신의 서브 탱커가 쓰러지는 걸 두 눈으로 목격한 조원선.
바로 반응하여 창을 휘둘렀으나, 그는 손쉽게 그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와이어를 꺼내 나무 위로 올라가, 다시금 모습을 감추었다.
이 모든 일이 3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원선 씨. 저희 이제 어떻게…….”
“…다들 모여 있어. 흩어지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모여 있어.”
조원선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박유진 떠올리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그는 아직도 몰랐다.
무엇보다 박유진이 대체 어떤 수법을 쓰는 건지 전혀 파악 못 하고 있었다.
‘침착하게 생각하자.’
조원선은 긴장을 유지한 채 지금까지의 일을 되돌아봤다.
처음으로 당한 건 프리스트, 김석연.
그다음으로 마법사인 이상수가 사라졌다.
그리고 방금, 자신의 눈앞에서 서브 탱커인 이아리가 당했다.
‘아리 씨의 경우는 그렇다 쳐도……. 석연 씨와 상수는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조원선은 더 자세히 기억을 되짚었다.
아까 이상수가 자신의 욕을 해서 그와 싸우던 중 김석연이 쓰러졌다.
거기다 자기 팀의 두 여자가 싸우던 중 이상수가 사라진…….
‘잠깐만. 분명 상수는 자기가 욕을 안 했다고 했고……. 서경 씨도…….’
분명 그 두 사람의 목소리였지만, 두 사람은 자신의 짓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조원선이 다시 생각해 본 결과, 그 두 사람은 남의 욕을 함부로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내 생각이 짧았어. 근데 만약 두 사람이 한 말이 아니라면, 그 목소리는 분명…….’
조원선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하자마자…….
“은아 씨! 왼쪽의 커다란 나무 뒤로 가세요! 어서!”
“네? 아, 네!”
“…어?”
조원선은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게, 방금의 그 말은 자기가 한 게 아니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한 누군가가 대신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원선은 그게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은아 씨! 멈춰요! 그쪽으로 가지 마세요!”
“…네?”
정령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조원선을 되돌아봤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그녀는 이미 나무 쪽으로 몸을 날린 뒤였다.
“거기서 어서 몸을…….”
조원선은 급하게 외쳤으나,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파지직―!
“꺄아악?!”
나무 뒤에서 한 줄기의 전류가 튀어나와 그녀를 덮쳤다.
그렇게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은아 씨……. 아니, 왜…….”
“다시 한번 묻죠, 조원선 씨.”
나무 뒤에서 걸어 나온 검은 코트의 남자.
눈 밑부터 턱까지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어,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미소를 짓는 중이라고, 조원선은 바로 알아차렸다.
“저를 잡을 수 있겠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