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 * *
“음냐, 으음……. 응? 에?”
이민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딘가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여기는…….”
이민아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다.
작은 거실이었다.
그것도 그녀에게 있어 익숙한…….
“언니, 일어났어?”
“…응? 유나야?”
고개를 돌리자, 근처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박유진의 여동생이 있었다.
“언니 잘 자더라.”
“…여기 너희 집이지?”
이민아는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에 박유나는 피식 웃으며 이민아에게 다가갔다.
“우리 집이니까 내가 여기 있는 거지.”
“아, 그, 그렇지? 근데 나 왜 여기에…….”
“설마 필름 끊길 정도로 마신 거야?”
“필름 끊기다니? 무슨… 아. 맞다. 나 어젯밤에…….”
“술에 잔뜩 취해서 들어왔더라.”
박유나는 이민아에게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
“오빠가 새벽에 언니를 집에 데려왔어. 그리고 거실에 재웠고.”
“…아, 그랬었지.”
박유나의 말에 이민아는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제 술집에서 함께 박유진과 술을 마신 기억들이 말이다.
거기다가…….
회상//‘유진아. 우리 앞으로도 잘 지내는 거다?’//
술에 취해 박유진에게 한 말들이 일부 떠오르자, 이민아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그 기억을 재빨리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나 박유진에게 이상한 짓 안 했지?”
“안 했던 거 같은데. 언니 새벽에 완전히 뻗은 채로 들어왔거든.”
“그럼 다행이기는 한……. 근데 박유진, 걔는 지금 어디 있냐? 안 보이네?”
“오빠? 오빠는 어제 언니 거실에 놓고 바로 나가던데.”
박유나의 대답에 이민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 놓고 바로 나갔다고?”
“응. 새벽 1시였나, 2시였나. 그때 오빠와 언니가 들어오는 소리에 깼거든. 뭔가 싶어서 나와 봤는데, 오빠가 언니 놓고 바로 나가더라고.”
“어디 가는지 들었어?”
“물었는데 그냥 뭐 실험해 해 볼 게 있다면서 나가더라. 어디 가는지는 말 안 하고.”
“실험해 볼 거라면…….”
이민아는 그 말에 박유진이 또 고연대의 훈련장에 갔을 거라고 짐작했다.
박유진이 무언가 실험한다는 건, 훈련장에 있을 거라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근데 걔가 또 뭘 할 게 있나?’
이민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박유진은 최근 새로운 기술을 연습하는 기미가 안 보였다.
그래서 박유진이 무슨 새 기술을 실험하러 갔는지 궁금했다.
“잠깐, 근데 지금 몇 시야?”
“아침 7시야. 나 이제 곧 학교 가야 해.”
“박유진 나를 새벽 2시에 두고 갔다면서? 그럼 걔 밤새서 밖에 있던 거야?”
“그치. 새벽에 또 들어오는 소리 못 들었거든.”
“…걔 대체 뭐하러 간 거래?”
“나야 모르지. 그보다 언니.”
박유나는 자신의 방으로 가, 학교 갈 준비를 하며 말했다.
“언니 부모님에게 연락해 봤어? 언니 오늘 외박한 거잖아.”
“…아, X발. 그러네.”
이민아는 다시는 술에 취하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했다.
* * *
“…뭐야. 벌써 7시네.”
훈련장에서 잠시 쉬던 중, 나는 그제야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밤을 새게 될 줄은 몰랐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냥 적당히 늦게 들어가 잠이나 잘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 못 했다.
근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 손가락에서 거미줄이 나올 거라고 생각을 못 했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지난번에 스타페리아, 그놈이 손가락에서 거미줄을 뽑아내는 걸 봤으니까.
당연히 나도 그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이렇게 간단히 성공할 줄은 몰랐다.
“근데 거미줄을 뽑아내는 것까지야 좋은데…….”
나는 한숨을 쉬며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에서 거미줄이 나오는 상상을 하자, 검지에서 얇은 실 한 가닥이 나왔다.
그래, 엄청나게 얇은 실이 말이다.
“이걸 대체 어디에 써먹냐고.”
나는 근처의 벽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자 거미줄이 벽을 향해 날아갔다.
‘여기까지는 괜찮네.’
내가 밤새서 이 거미줄을 이리저리 날려 본 결과, 거미줄을 원하는 방향으로 날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미줄 그 자체에 있었다.
“너무 약해.”
거미줄을 향해 손등을 내리치자, 거미줄은 바로 끊겼다.
지난번 스타페리아의 거미줄과는 많이 달랐다.
그의 거미줄은 내 것과는 달리 쉽게 끊기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이것도 뭐, 연습이라도 해야 하는 거냐?”
회귀 전에 이런 힘을 가진 적이 없었고,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새로 가지게 된 이 힘을 어떻게 키울지 전혀 감이 안 잡혔다.
“거미줄이 있으면 좋을 거 같기는 한데 말이지.”
거미줄을 이동기로 쓸 생각은 아니었다.
애초에 내게는 와이어라는 더욱더 익숙한 수단이 있었으니 말이다.
내게 있어 거미줄의 가장 큰 의의는 설치기라는 점이었다.
‘이거 잘만하면 개활지에서도 고지대를 만들 수 있겠지.’
나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와이어로 이리저리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개활지에서 그 장점이 퇴색되었다.
하지만 이 거미줄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장소에 상관없이 거미줄을 설치할 수 있게 되면, 나는 어디서든 와이어로 날아다닐 수 있겠지.’
게다가 이 거미줄의 점성은 만만치 않았다.
만약 전투 중에 이 거미줄에 걸린다면, 어지간한 상대는 빈틈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이 능력은 큰 단점이 없었다.
그래서 숙달해 놓으면 좋을 거 같기는 했다.
“근데 어떻게 마스터하는 거냐고, X발.”
나는 한숨과 함께 거미줄을 또다시 벽에 날렸다.
거미줄 자체는 벽에 잘 날아가 달라붙었다.
하지만 여전히 얇고 매우 위태로웠다.
“이 위에 올라탈 수도 없겠네.”
분명 이 거미줄의 내구도를 올릴 방법은 있을 거다.
내 직감이 그렇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나중에 따로 알아보든가 해야지. 그리고 그 전에…….’
나는 훈련장을 둘러봤고, 그 광경에 한숨을 쉬었다.
“이걸 언제 다 치우냐.”
훈련장 곳곳에 거미줄들이 쌓여 있었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이 거미줄로 이런저런 짓들을 한 결과였다.
‘그래도 수확이 아예 없던 건 아니지.’
약 다섯 시간 동안 거미줄을 날린 덕에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거미줄을 약 200m가량 뽑아내면, 이후 약 10분 동안 거미줄을 만들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지금 거미줄을 왼손의 엄지, 검지, 중지에서만 뽑아낼 수 있다는 등, 중요한 정보들을 알아냈다.
‘특히 거미줄을 무한으로 못 뽑아낸다는 건 중요하지.’
약 200m를 내면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
이건 전투할 때 있어 반드시 유의해야 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거미줄 만드는 것 말고 다른 능력은 더 없나?’
나는 내 왼손의 반지를 슬쩍 바라봤다.
일단 지금까지 이 반지가 내게 준 능력은 해독과 거미줄.
이 두 가지였고, 둘 모두 내게 있어 상당히 유용했다.
‘분명 뭐가 더 있을 거 같은데.’
내 목에 걸린 엔드리온의 조각과 마찬가지로, 이 반지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아니, 알 수 없는, 깊고 오래된 힘이 느껴졌다.
“…차근차근 알아가면 되겠지.”
나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렸다.
명확한 답이 없는 상황에서 고민해 봤자 의미가 없었다.
단서가 생기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었다.
‘아무튼, 얼른 거미줄이나 치우자.’
나는 새벽 내내 만들어 낸 거미줄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몇 시간 동안 거미줄만 날린 탓에, 그 양이 상당했다.
‘그나저나 거미줄이 내게는 끈적거리지 않네.’
내가 이 힘의 주인이 된 덕인지, 이 거미줄에 내 몸을 가져가도 달라붙지 않았다.
만약 나 이외의 존재들만 거미줄에 걸리는 거라면, 이 점 또한 유용하게 써먹지 않을까 싶었다.
“일단 이 거미줄을 내일 개인전 때는 못 쓸… 아니, 기습적으로 쓰면 되려나?”
나는 거미줄들을 치우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그렇게 적당히 거미줄을 치우고, 집에 들어갈 잠이나 잘 생각이었는데.
위잉―
“음?”
그 순간, 내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가 온 것이었다.
“이 시간에 또 누구야?”
오전 7시가 막 지난 시간이었다.
이런 이른 시간에 내게 전화할 사람은 몇 없었다.
‘이민아나 유나이려나.’
당장 생각나는 건 그 두 사람밖에 없었다.
아, 하세리도 가능했다.
그 누나라면 이 시간에 내게 충분히 전화할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누군지 추측하며 전화가 온 번호를 확인했는데, 나는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였다.
그래서 뭔가 싶어서 전화를 받았는데.
“여보세요? 혹시 박유진 씨 맞으신가요?”
“네? 아, 네. 맞는데, 혹시 누구신가요?”
“경찰이고요, 여쭤볼 게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경찰이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게, 아침부터 경찰에게 전화가 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무슨 일 있나요?”
“다름이 아니라, 혹시 어제저녁에 이지현 씨를 따로 만났나요?”
“이지현이요? 아니요, 못 봤는데……. 이건 왜 물으시는 거죠?”
“그게 그러니까… 이지현이 실종됐거든요.”
“실종이요?”
이건 더욱더 예상 못 한 것이었다.
“이지현이요?”
“네. 조사를 위해 따로 찾아갔는데 집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도주한 줄 알고 찾으러 나섰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갑자기 사라졌다는 건가요?”
“네, 말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죠.”
내게 독을 먹였고, 그걸 들킨 이지현.
아마 경찰에 안 붙잡히기 위해 도주했다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아무 흔적도 없이 도망갔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도 그럴 게, 사람을 흔적도 없이 납치하는 건 그 여자의 특기였기 때문이다.
그 여자, 그러니까 그 붉은 머리의 아줌마 말이다.
* * *
“후훗. 마음에 드네.”
비슷한 시각.
하윤경이 한 아파트 앞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 끄아아악! 꺄아악! 푸, 풀어 줘! 제발!
스마트폰에서 재생되는 영상.
그 영상 속에서, 이지현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적당히 잘 되는 거 같네.”
하윤경은 부하가 보낸 영상을 끄며 미소를 지었다.
“속 좁고 찌질한 마음으로 생겨난 증오지만, 이런 증오도 충분히 쓸만하지.”
하윤경은 이 상황이 만족스러웠다.
최근 들어 만족스러운 실험 결과가 계속 나오는 덕이었다.
‘특히 정수민. 캅테리온의 유전자를 발현해서, 많은 결과들을 축적할 수 있었어.’
하윤경은 권력에 욕심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지식만을 탐구할 뿐이었다.
하지만 최근, 그녀의 일이 너무나도 잘 풀리고 있었다.
단순히 지식의 탐구만 하기 아까울 정도로, 그러니까 더 큰 욕심이 생길 정도로 말이다.
‘이대로만 가면, 내년 초에 충분히 정부 쪽에 협박을…….’
그렇게 하윤경이 속으로 생각하던 중.
“아줌마. 저 불렀어요?”
아파트에서 덩치가 큰 남자가 나왔다.
그의 등장에 하윤경은 미소를 지었다.
“조원선 씨였죠? 만나서 반가워요. 지난번 헌터 대전에서의 활약을 잘 봤어요.”
“활약은 뭔 활약이요? 그냥 털리기만 했는데.”
조원선은 한숨을 쉬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아무튼 아줌마는 누구고 왜 왔어요? 이 아침부터 뭔…….”
“내일 개인전이잖아요? 그래서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박유진을 이기고 싶나요?”
“…그 새끼는 당연히 이기고 싶죠.”
조원선은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제가 이길 수 있는 새끼가 아니에요. 직접 싸워 보니까, 저보다 훨씬…….”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원선 씨도 박유진을 이길 수 있어요.”
“…네?”
“제게 약이 하나 있는데, 으음, 괜찮다면 따로 이야기가 가능할까요?”
하윤경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조원선을 바라봤다.
그리고 조원선은 하윤경의 말에 눈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