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확인해 보세요.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 각오하고 보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왜…왜 각오해야 하는 거죠?”
“…충격적일 테니까요. 그리고 정신 줄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셔야 할 거예요.”
“…….”
하세리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떨리고 있었다.
항상 여유가 넘치던 하세리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나 같아도 제정신을 유지 못 할 테니까.’
알고 보니 자신의 가족이 끔찍한 실험을 하고, 사람들을 납치해 가두었다.
이것만 해도 어지간한 사람은 정신 줄을 놓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부모님의 이름이 나온 것이었다.
“…후우우.”
깊게 숨을 내쉰 뒤, 하세리는 마우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클릭을 몇 번 한 뒤, 이내 모니터에 영상 하나가 재생되었다.
- 윤경아. 그냥 못 본 척 해 줘. 이 아이를 봐서라도 제발.
남자의 목소리가 영상에서 들려왔다.
이 목소리를 들은 하세리는 움찔했다.
하세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것일 터였다.
- 오빠. 우리는 새 시작을 할 수 없는 핏줄이야.
그리고 이내 하윤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동안 오빠가 한 실험들을 생각해 봐. 이상한 약품 투여하고, 몬스터 유전자 넣고, 키메라로 합성하고. 이런 짓들을 저지르고, 해외에서 새 출발을 하겠다고?
- 지금까지 그게 잘못된 건 줄 몰랐다고! 인류의 발전을 위해,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어! 그래서 가족들과 함께한 거야!
- 그랬지. 근데 오빠가 들고 있는 저 아기. 저 아기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 적어도 이 아이에게만큼은 좋은 세상을…….
- 역겨워 죽겠네, 역겨워 죽겠어. 다른 아이들은 상관없고, 자기 아이는 살리고 싶다?
하윤경의 웃음소리가 영상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하윤경은 다시금 말하기 시작했다.
- 새언니도 마찬가지야. 새언니도 다를 바 없어.
- 윤경아. 제발.
들려오는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
영상 슬쩍 보니, 하세리의 아버지 옆의 여자가 말하고 있었다.
하세리와 상당히 닮은 여자였다.
- 이 아이에게만큼은 다른 삶을 선물해 주고 싶어. 그러니까 우리를 그냥 보내 주면…….
- 새언니도 실험을 꽤 했었잖아, 안 그래? 몸에 기계를 넣고, 그, 또 이런 말도 했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면 결국 기계가…….
- 이제는 아니야. 이 아이를 낳고, 인간 그 자체가 아름답다고…….
- 헛소리하지 마. 인간이라는 이 육체가 족쇄다. 이걸 나한테 가르친 건 새언니와 오빠니까.
하윤경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 그리고 생각해 봐. 오빠와 새언니는 근본부터가 글러 먹은 인간들이야. 그런 인간들이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을 거 같아?
- 할 수 있어. 이 아이만큼은 내가 올바르게 키워 낼 거야.
하세리의 아버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 그리고 윤경아. 너도 같이 가자. 너도 새 삶을 시작하는 거야. 너의 능력이라면 보다 더 나은…….
- 오빠. 나는 새 삶 따위를 시작할 생각 없어. 애초에 내가 오빠를 막으러 온 건, 오빠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야.
- 윤경아, 맹세하는데 어디 가서 절대 말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제발…….
- 미안하지만, 나는 오빠를 못 믿겠어. 오빠가 혹시라도 어디 가서 우리 가족, 내 연구 시설에 대해 말하면, 모든 게 끝이야. 내가 그동안 쌓아 온 지식들이 불타 버리겠지.
나는 모니터에 재생 중인 영상을 슬쩍 바라봤다.
그 영상에서 보이는 젊은 모습의 하윤경.
그녀의 손에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 내가 쌓아 온 지식들을 절대 안 뺏길 거야. 나는 이 지식들로 반드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거니까.
- …너는 미쳐 있어, 윤경아.
- 아니야. 정해진 운명을 뛰어넘는 게 뭐가 잘못인데? 신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가는 게 뭐가 잘못인데?
하윤경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 오빠는 내가 가는 길을 방해하려는 거야. 나는 그런 방해를 용납 못 해. 그러니까 오빠와 새언니를 잡을 거야. 잡고, 실험에 마음껏 써 줄게. 나랑 같은 핏줄이라,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야.
- 윤경아. 적어도 이 아이만큼은…….
- 바라는 것도 많네.
이 말을 끝으로 하윤경은 하세리의 부모와의 전투를 시작했다.
그리고 결과는 당연히 하윤경의 승리였다.
“아, 아아. 왜…….”
하윤경의 손에 쓰러지는 남녀.
그리고 하윤경이 그 두 사람을 마무리 지으려는 순간, 나는 영상을 종료시켰다.
“여기까지만 보시죠. 이 뒤는 안 보는 편이 더 좋을 테니까.”
“제 부모님… 어떻게 됐나요? 죽었나요? 아니면 실험으로…….”
“…쓰일 대로 쓰이다가 죽었죠.”
편하게 즉사했다고, 거짓말할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진실을 말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아아, 아, 아. 아.”
하세리는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
마치 이 사실이 안 믿긴다는 듯이 말이다.
“고모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게다가 어머니와 아버지도 이런 끔찍한 짓을……. 우욱.”
하세리는 또다시 헛구역질을 했다.
나는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려 줬다.
“…하아, 하아. 박유진 씨. 박유진 씨는 이 모든 걸 알고 있던 건가요?”
“하윤경에 대해 조사하다가 알게 됐죠.”
“…제 고모, 그러니까 하윤경. 그 인간이 왜 나를 안 죽인 거죠? 왜 부모님과 같이 저를 안 죽였던 거죠?”
“하세리 헌터님에게 재능이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죠.”
나는 차분히 설명했다.
“하세리 헌터님이 쓸 만하다고, 하윤경이 그렇게 판단한 거예요. 그래서 하세리 헌터님을 키워, 높은 자리에 놓을 생각을 한 거죠. 그리고 그걸 통해…….”
“국가 기밀들을 알아낸다. 그러니까 나를 스파이로 삼은 거네요. 하지만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정보들을 하윤경에게 말했네요.”
하윤경은 여전히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까 전보다 조금은 이성을 되찾은 듯했다.
“그냥 나를 키워 준 분이니까. 가족이니까 편하게 기말 사항들을 말했는데… 그냥 완전히 놀아난 거였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인형처럼……. 보기 좋게 이용당했네요.”
하세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기밀. 그래, 기밀이면 절대 말하고 다니면 안 되는데……. 가족이니까 말해도 괜찮다고, 하윤경이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말해서… 나도 모르게…….”
“지나간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미 끝난…….”
“끝났죠. 네, 지나간 일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에요. 제가 흘린 기밀들 때문에 누가 피해를 봤을지 모르니까요.”
하세리는 상당히 복잡하다는 표정이었다.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헌터가 됐는데, 나도 모르게 피해를……. 게다가 애초에 헌터 협회에 들어간 게 전부 하윤경이 원하던 대로… 그럼 지금까지의 내 삶에는 무슨 의미가…….”
“하세리 헌터님은 헌터로서 많은 사람들을 구했어요. 의미 없던 삶이 절대로 아니에요.”
회귀 전에도, 하세리는 이 장소에서 멘탈이 무너졌다.
여기서 그녀가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내가 할 일이었다.
그래야지만 하세리의 도움을 받아, 하윤경을 보다 수월히 잡을 수 있었다.
“하윤경이 원하는 대로 헌터 협회에 들어갔다지만, 하세리 헌터님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어요. 그건…….”
“네. 그렇죠.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어요. 알겠고…….”
하세리는 내 쪽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 의미심장했다.
“박유진 씨는 이 모든 걸 왜 제게 알려 준 거죠?”
“말씀드렸다시피, 이 모든 걸 알리는 게 맞는 일이라고 판단을…….”
“겨우 그 이유뿐인가요?”
“무슨 말씀이시죠?”
“무언가 저에게 더 원하는 게 있어, 저를 데리고 여기 온 거 아닌가요?”
하세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혹시 박유진 씨, 오늘 하윤경을 잡을 생각인가요? 그리고 이 모든 걸 제게 보여 준 이유가, 저의 도움을 원해서인가요?”
예리했다.
충격을 받았다고 해도, 하세리는 노련한 헌터였다.
그녀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뭐, 이 정도는 예상했지.’
회귀 전에도 하세리는 빠르게 내 노림수를 파악했었다.
그랬기에, 여기서 어떤 수를 던져야 하는지 잘 알았다.
“네, 맞아요. 저는 오늘 하윤경을 잡을 생각으로 여기 왔어요. 그리고 하세리 헌터님을 데려온 건, 도움을 받기 위해서죠.”
“하윤경을 잡아야 하는 것에는 저도 동의해요.”
하세리는 조금씩 침착함을 되찾으며 내게 말했다.
“헌터로서, 저 수많은 사람들을 반드시 구해야죠.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제 고모를 잡아야죠.”
“네, 저랑 말이 통하시네요.”
“하지만 박유진 씨. 과연 이걸 저희 둘이서 처리할 일인지 모르겠네요. 이 정도 규모의 시설이면 저희 둘이서 무리이지 않을까요?”
“아니요. 가능해요.”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저만 믿고 따라오면, 하윤경을 잡고, 이 시설을 완전히 폐쇄시킬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하세리 헌터님은…….”
내 예상대로 하세리와 말은 통했다.
이제 남은 건 그녀를 설득해서, 우리 둘이서 이곳을…….
“이 시설을 폐쇄시킨다라, 말은 참 잘하네요, 박유진 씨.”
“…음?”
“하지만 과연 그게 쉽게 될까요?”
이야기하던 중, 내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잘 알던 목소리였다.
“하윤경 씨.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신 거죠?”
뒤로 돌자, 문을 열고 방금 들어온 하윤경이 있었다.
“분명 CCTV를 전부 피해서 왔을 텐데 말이에요.”
“후문 CCTV들이 한 번에 맛이 갔었어요. 그건 누가 봐도 수상했죠.”
“CCTV 담당하는 인간이 안전 불감증이기를 바랐는데, 너무 많은 걸 바랐었네요.”
“제가 부하 교육은 철저히 하거든요. 약간의 이상도 바로 보고해라, 이런 식으로요.”
하윤경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후, 그녀는 하세리 쪽을 바라봤다.
“그래서 세리야. 어디까지 확인했니?”
“진짜로 고모가 죽였나요? 제 어머니와 아버지를 고모가…….”
“으음, 그 영상까지 봤구나. 그냥 일기 느낌으로 거기에 뒀던 건데, 설마 네가 여기 와서 그걸 볼 거라고는…….”
“대답하세요. 고모가 제 부모님을 죽인 건가요? 그리고 이 시설. 여기에서의 실험들도 전부 고모가…….”
“들킨 이상 숨길 필요도 없겠지.”
하윤경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맞아. 내가 네 부모님을 죽였어. 그리고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전부 내가 시킨 일들이고.”
“자랑처럼 말씀하시네요.”
“자랑이지. 인류가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게, 내가 매일 같이 노력하는 모습이니까.”
“그동안 몰랐는데… 미치셨네요.”
하세리는 이 말과 함께, 자기 주위로 불꽃을 불러냈다.
“고모. 얌전히 잡히세요. 이건 감옥에 평생 들어가 있어도…….”
“감옥? 세리야, 내가 경찰 따위에게 잡혀서 감옥에 들어갈 사람으로 보이니?”
“고모는 이게…….”
“하윤경 씨의 말이 맞아요, 하세리 헌터님.”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입을 열었다.
“하윤경 씨는 감옥 따위에 갇혀 있을 사람이 아니죠. 너무 위험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자바니아를 꺼내 들었다.
“죽여야죠. 살려 두기에 너무 위험하니,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이는 편이 나아요.”
“네? 하지만 박유진 씨, 아무리 그래도 죽이는 건…….”
“재밌네요. 재밌어요.”
하윤경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저를 상대하기 전에, 박유진 씨는 다른 사람들부터 만나고 오는 게 어떨까요?”
“다른 사람들?”
“보면 알 거예요.”
하윤경은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내가 뭘 반응하기도 전에, 내 앞의 풍경이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