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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사는 전격계 헌터-132화 (132/240)

132화

“이 빛을 계속 보고 내 말을 들어 봐.”

“으, 으읏…….”

“그냥 전부 잊는 거야, 전부.”

“이걸 어떻게 잊는…….”

“하긴, 그건 힘들려나?”

하윤경은 피식 웃었다.

그녀는 상당히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세리야, 이 의자에 앉아 있어. 그리고 아무 생각하지 말고, 움직이지도 마. 내가 다시 지시를 내리기 전까지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 알겠지?”

“뭔…….”

“알겠지?”

“…네.”

계속 빛에 노출되던 하세리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어느새 초점이 풀려 있었다.

“…네, 고모.”

하세리는 하윤경이 가리키던 의자에 가서 앉았다.

이에 하윤경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정신 공격 관련 내성은 없나 보네.”

빛나는 막대기를 하세리에게 계속 겨누며, 하윤경은 미소를 지었다.

“박유진이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하윤경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을 정리했다.

“정수민, 이지현, 그리고 조원선. 나름 공들여 만들었지만, 셋이 동시에 덤벼도 박유진은 못 이기겠지.”

박유진의 전투를 직접 봤기에, 하윤경은 합리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윤경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근데 그 셋을 이겨 봤자 거기까지지. 나를 잡지는 못할 거야.”

하윤경은 초점 잃은 눈으로 멍때리는 하세리를 바라봤다.

“세리가 이렇게 됐으니, 박유진은 더더욱 아무것도 못 하겠지.”

박유진은 강했다.

일대일 전투부터 시작해 난전, 근접전, 원거리, 그리고 전류를 이용한 엄청난 화력까지.

그 어떤 전투에서도 활약할 수 있는 만능 헌터였다.

‘하지만 이곳은 박유진 혼자서 못 무너뜨려.’

박유진이 낼 수 있는 최대의 화력이 얼마인지, 하윤경은 진작에 계산했다.

그래서 잘 알았다.

박유진의 전류로는 이 지하 연구소를 못 무너뜨린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화력만큼은 강한 세리를 데려온 것 같은데……. 솔직히 너무 뻔한 수법이었어.’

박유진이 강한 건 인정했지만, 머리를 굴리는 건 본인이 위였다.

“박유진을 너무 과대평가했네. 이것보다 재밌는 걸 준비해 올 줄 알았는데.”

너무나도 쉽게 이곳에 침입한 건 칭찬할 만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이 이렇게 쉽게 타파된 것에, 하윤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심심풀이 정도는 됐네. 아무튼, 이제 다시…….”

하윤경은 다시금 하세리를 바라봤다.

‘일단 뇌를 건드려서, 기억 쪽을 손보든가 해야지. 아니, 기억만 손보지 말고 그냥 아예 내 꼭두각시로 만들까? 인격 자체를 없애면…….’

하윤경에게 가족의 정 따위는 없었다.

그동안 가족을 전부 이용했고, 하세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세리는 이런저런 유용한 기밀들을 가져와 준, 꽤 유용한 장기말이었다.

그래, 지금까지는 그랬다.

“이제 굳이 기밀들을 가져와 줄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곧… 마지막 단계에 들어서니까.”

하윤경은 인간을 진화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나아가, 자기 자신을 인간 이상의 존재로 만들고자 했다.

‘조금만 더 준비하면 되겠지. 그러니 세리는 이제……. 그냥 내 경호원 같은 것으로나 만들어야지.’

하세리를 자기 말만 듣는 완벽한 꼭두각시로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윤경은 그 전에 먼저 처리할 일이 있었다.

“박유진을 처리해야 하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재밌게 끝내 보자.”

하윤경은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이채민. 곁에 있지?”

“예, 하윤경 님. 여기 있습니다.”

하윤경의 말에 중년의 남성이, 투명화를 풀며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이동할 건데, 세리가 혹시라도 중간에 이상한 짓 할 낌새라도 보이면 제압해. 세뇌만으로는 불안하거든.”

“예, 알겠습니다.”

이채민이라 불린 남자는 대답을 한 뒤 다시금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하윤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하세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리야. 따라와.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네.”

하세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여전히 초점 풀린 눈을 유지했다.

“좋아. 그럼 네가 좋아하는 박유진이나 보러 가자.”

“…박유진?”

“따라와. 그리고 내 말만 듣는 거야, 알겠지?”

* * *

“박유진! 박유진! 너는 내가…….”

“X발, X나 시끄럽네.”

“케윽?!”

나는 이지현의 얼굴에 무릎을 날려, 그녀를 그대로 날려 보냈다.

나름 힘을 담아 날린 공격이었으나, 이지현은 큰 타격이 없는 듯 바로 몸을 일으켰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어. 너만 죽이면…너만 죽이면!”

이지현의 코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하지만 이지현은 그런 상처를 바로 치유했다.

근본이 힐러였던 덕에 가능한 것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치유하는 건가?’

원래 치유 기술들을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지현은 정신이 저 모양인 와중에도 치유를 잘만 했다.

아마 이지현의 치유 능력도 하윤경이 건든 게 분명…….

“…으윽.”

“죽…일…거…야.”

“고통스러워 보이네요, 조원선 씨.”

나는 조원선의 창을 힘겹게 막으며 말했다.

‘움직임은 느려졌지만, 힘이 더 세졌네.’

팔다리가 기계가 된 탓인지, 조원선의 움직임도 기계의 것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대신 내가 기억하던 조원선의 힘보다 몇 배는 더 강했다.

아마 힘 자체는 지금의 나를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잠시 빠져 있으세요.”

파지직―

나는 조원선의 가슴에 달린 생명 유지 장치들을 향해 전류를 날렸다.

“으, 으아아아…….”

그러자 조원선은 비명을 지르며, 힘겹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상당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저게 약점이구먼.’

조원선은 기계들 덕에 겨우 살아 있는 것이었다.

저것만 제대로 고장 내면, 조원선은 의외로 쉽게 잡을지 몰랐다.

‘이지현도 많이 강해졌지만, 내가 못 잡을 수준은 아니야. 그렇다면 남은 건…….’

나는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까으으아크아아.”

“저 인간은 어떻게 하냐.”

조원선과 이지현은 할 만했다.

하지만 정수민, 저 장수풍뎅이 인간은 조금, 아니 많이 귀찮았다.

‘힘이 엄청 센 것도 아니고, 속도도 빠른 게 아니야. 하지만 문제는 저 방어력이지.’

정수민의 급소를 전부 지키고 있는 껍질들.

저걸 어떻게 하지 않으면 내게 승산이 없었다.

“귀찮네.”

빨리 이 방을 벗어나 하세리에게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이 셋은 내 발을 계속 붙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들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박유진 씨. 지인들과의 재회는 잘 하고 계셨나요?”

“음?”

다시금 움직이려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박유진 씨를 위해서 특별히 개조해 봤는데,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네요.”

“마음에 들었을 리가 있겠어요?”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이 방에 나타난 하윤경을 바라봤다.

“그쪽이 정말 인간 말종이라고, 이 셋을 보면서 다시 느꼈어요.”

“칭찬으로 받아들이죠.”

하윤경은 피식 웃은 뒤, 내게 다가오던 세 개조 인간 쪽을 바라봤다.

“셋 다 멈춰. 대기하도록 해.”

하윤경의 말에 셋은 진짜로 멈추었다.

마치 기계처럼 말이다.

“…따로 세뇌라도 해 놓았나 보네요?”

“세뇌는 아니고, 안전장치 같은 거죠. 제가 개조한 모든 인간들에게 그런 안전장치들이 있어요. 그리고 세뇌는…….”

하윤경은 손짓을 했다.

그러자 방 안으로 또 다른 인물이 들어왔다.

“세뇌는 지금 세리가 당한 거고요.”

“…하세리 씨?”

나는 하세리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초점이 풀려 있었다.

“자, 자. 세리야. 이거 보고, 내 말 잘 들어야지.”

“…네, 들을…게요.”

“좋아, 좋아. 아, 혹시 이게 박유진 씨에게도 통하려나?”

하윤경은 빛나는 막대기를 하세리 앞에 흔들다, 내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바로 주머니에서 실키의 가면을 꺼냈다.

“박유진 씨. 이 막대기를 보고 한 번…….”

“소용없어요. 그딴 세뇌는 제게 안 통하니까.”

“흠, 저 가면. 정신 내성을 올려 주나 봐요?”

“그쵸. 하지만 이 가면 없어도, 하윤경 씨의 그딴 세뇌쯤은 이겨 냈을 겁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하윤경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박유진 씨가 지는 건 확정된 사실이니까요.”

“왜 확정된 건지 여쭤도 될까요?”

“박유진 씨는 세리를 이길 자신 있나요?”

하윤경은 하세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 세리야. 내 말 들리지?”

“네……. 고모 말, 들려요.”

“박유진을 쓰러뜨리도록 해. 지금 당장.”

“박유진이요?”

“내 말 들어야지? 어서 움직여.”

“…네.”

하세리는 몽환적인 목소리로 대답하며, 한 발자국 앞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내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박유진을… 쓰러뜨…….”

“하세리 헌터님. 제 말 안 들리나요?”

나는 자바니아를 들어 올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하세리는 내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화르르륵―

하세리는 멍한 눈빛으로 불길을 불러냈다.

이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일이 이렇게 되네.’

내 계산 범위 내의 사태는 맞았다.

하윤경이 하세리를 세뇌, 그리고 내가 하세리와 싸우는 것.

회귀 전에 하윤경이 썼던 방법이었고, 실제로 이에 당했었다.

‘또 당하네.’

한 번 당했고,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대처법을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뭐가 어찌 됐든, 일이 많이 귀찮아질 예정이었다.

‘일단 이 방을 무너뜨린 뒤, 어떻게든 하윤경과 일대일로 싸울 좁은 공간으로… 으음?’

속으로 빠르게 계획을 점검하던 중,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하세리의 초점이 내게 맞춰졌었다.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

하지만 그걸 보자마자, 나는 알 수 있었다.

‘세뇌가 완벽히 된 게 아니야.’

하윤경이 세뇌를 대충… 하지는 않았을 테고.

아마 지금, 세뇌를 깨기 위해 하세리가 노력하고 있는 것일 거다.

그 노력 덕에 세뇌에 약간의 틈이 보였고, 그 틈이면…….

“하세리 헌터님. 제 말 들어요. 하윤경의 말을 듣지 말고, 제 말을 들으세요.”

“겨우 그런 말로 세뇌에서 깨어나겠어요?”

하윤경은 여유롭게 말했다.

하지만 하윤경은 몰랐다.

지금 하세리가 만든 그 틈이 얼마나 큰지 말이다.

“하세리 헌터님. 제 말을…….”

화르륵―!

주위의 불길이 더 세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하세리와 진짜 싸워야 될지도 몰랐다.

‘더 강한 게 필요해. 더 강한, 하세리의 정신을 확 들게 할 만한 말.’

나는 빠르게 기억을 되짚었다.

최근 하세리와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했었다.

그중 하세리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을 만한 거라면…….

“…아.”

하나 있었다.

헌터 대전의 팀전이 끝난 날, 경찰서 앞에서 나누었던 이야기.

그때 하세리가 내게 쳤던, 전혀 하세리답지 않았던 장난.

그걸 떠올리자, 나는 자바니아를 단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따뜻한 미소, 그리고 따뜻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리 누나? 내 말, 진짜 안 들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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