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이야기? 그래, 이야기 좋지. 가족끼리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잖니?”
하윤경은 여유롭다는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속으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파일의 백업을 거의 다 끝냈는데… 이 타이밍에 방해하네.’
하윤경은 불타고 있는 컴퓨터를 바라봤다.
너무나도 완벽히 불타, 살릴 기미가 안 보였다.
‘백업은 대충 80%까지 됐었어. 하지만 남은 20%를 버릴 수 없어. 내 계획을 실행하려면 그 파일들 전부 다 필요해.’
하윤경은 하세리를 슬쩍 바라봤다.
하세리는 강한 불길을 내뿜으며 하윤경을 노려봤다.
‘남은 20%는 다른 층의 컴퓨터로 진행하면 그만이야. 아니, 그냥 백업을 하지 말까. 하세리와 박유진. 이 두 새끼만 쓰러뜨리면…….’
하윤경은 박유진이 얼마나 강한지 정확히는 몰랐다.
그러나 하세리가 얼마나 강한지는 잘 알았다.
하세리를 어렸을 때부터 키웠던 터라 잘 알던 것이었다.
‘27층에서 약을 만들어서 먹으면, 하세리쯤은 잡아. 그리고 실험체들을 데리고 박유진을 잡으러 가면…….’
하윤경은 빠르게 계획을 생각해 낸 뒤,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게 묻고 싶은 거라도 있는 거니?”
“이런 짓을 왜 했는지는 당장 묻지 않을게요. 그건 고모를 감옥에 넣은 뒤, 면회 때 물어보면 되니까요.”
“후훗, 나를 죽일 생각은 없나 보구나?”
“가족으로서의 최소한의 정이에요. 됐고, 이제 포기하세요.”
하세리는 주위에 더 강한 불길을 불러냈다.
“고모와 여기서 고모와 협력한 모든 사람들. 전부 잡아들이겠어요. 그리고 이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세리야. 같은 가족인데, 그건 너무한 거 아니니?”
“가족이라도 이건 아니에요.”
“이 시설은 네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우리 가족이 전부 있는 곳이야. 이런 곳을…….”
“가족 전부 죽은 거 알고 있어요.”
“음?”
“아까 그 컴퓨터를 통해 확인했어요.”
하세리는 차갑게 말했다.
“제 가족들까지 전부 실험에 썼잖아요. 그리고 전부 그 실험들 때문에 죽었고요.”
“아, 그것까지 확인했니?”
“네.”
이 시설에서 행해진 모든 일들이 기록된 컴퓨터.
박유진 덕에 확인했던 그 컴퓨터에서, 하세리는 확실히 봤었다.
그녀의 가족들이 행했던 악행들, 그리고…….
“고모가 가족들 전부… 실험에 썼더라고요. 그리고 그 덕에 고모가 이 시설의 관리자가…….”
“그것까지 봤을 줄은 몰랐네.”
“왜 그랬어요? 아무리 그래도 가족까지 실험에 써서 죽이는 건…….”
“여러 이유가 있었어.”
하윤경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내게 계획이 있거든. 그 계획을 실행하려면 이 시설을 완전히 장악해야만 했어.”
“그래서 가족들을…….”
“가족들을 전부 죽여야 최고 책임자 자리를 먹을 수 있으니까.”
“겨우 그딴 이유 때문에…….”
“그것 말고도, 실험체 구하기 어려울 때 그냥 잡아다 쓰기도 했지. 아, 그리고…….”
하윤경은 연설을 하듯,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나중에 내 스스로를 한 단계 더 진화시킬 예정이야. 그걸 실험하기 위해 내 핏줄들을 이용했지.”
“…….”
그 말에 하세리는 하윤경을 차갑게 바라봤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하윤경은 말을 계속했다.
“나랑 가장 비슷한 인간을 실험에 써야 했거든. 그리고 나랑 가장 비슷한 사람이라면 내 가족들 말고 더 있겠어?”
“그럼 저도 언젠가 실험에 썼겠네요.”
“맞아, 썼을 거야. 하지만 너는 헌터 협회의 고위직이라 쓸모가 많았거든. 그래서 최대한 단물을 뽑아낸 후에 그럴 생각이었는데…….”
하윤경은 피식 웃었다.
“자기보다 어린 남자에게 푹 빠지고, 나를 치러 올 줄은 몰랐지.”
“…푹 빠질 수도 있는 거죠. 그리고 박유진을 만났든 안 만났든, 저는 결국 고모를 공격했을 거예요.”
하세리는 하윤경에게 다가갔다.
“고모가 이런 인간임을 알았으면, 저는 진작에… 헌터로서의 의무를 다했을 테니까요.”
“참 정의롭구나? 우리 가족 중에서 이렇게 정의로운 인물이 나올 줄이야.”
하윤경은 여전히 웃음을 유지한 채 말했다.
“그래서, 세리야. 나를 잡아갈 거니?”
“헌터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죠.”
하세리는 하윤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포기하세요, 고모. 이제 전부 끝났어요. 오늘 도망치는 데 만약 성공하더라도, 저는 어떻게든 고모를 잡아낼 거니까요.”
“세리야.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내가 쉽게 잡힐 거 같니?”
“그냥 잡히세요, 고모. 괜히 싸우다 다치지 말고.”
하세리가 손을 휘두르자, 불길이 밧줄처럼 하윤경 주위에 타올랐다.
하지만 하윤경은 여전히 여유가 있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그냥 잡힐 거 같아?”
“고모는 범죄자예요. 여기서 안 잡힌다고 해도 결국…….”
“나는 안 잡힐 거야, 세리야. 겨우 여기까지 왔어. 이제 와서 그만둘 수 없어.”
하윤경은 이 말과 함께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하윤경의 주위에 타오르던 불길이 사라졌다.
이에 하세리는 당황했고, 하윤경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하윤경은 또다시 손을 휘둘렀다.
“으윽?”
하세리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하윤경 주위로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이 하세리를 덮친 것이었다.
“너만 불을 쓸 수 있는 게 아니야, 세리야.”
하윤경은 이 말과 함께 더 강한 불길로 하세리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 불길은 하세리에게 닿지 않았다.
하세리가 손을 들어 올리자, 하윤경의 불길이 점차 사그라졌다.
“알아요. 고모도 불을 쓸 줄 아시죠. 애초에 불을 쓰는 법을 고모가 제게 가르쳤잖아요.”
하세리는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하윤경의 불길을 없애며 다시금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이제는 제가 불을 더 잘 다루죠. 제가 괜히 A급 헌터가 된 게 아니니까요.”
하세리가 다시 손을 흔들자, 하윤경이 불러낸 불길이 전부 사라졌다.
같은 파이로 키네시스였지만, 그 격차가 상당했다.
“그렇겠지. 나는 평생을 지식의 탐구에 투자했지만, 너는 평생을 능력 연마에 집중했으니까. 나보다 강한 건 당연해.”
“노력의 결과죠. 그리고 고모.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마법을 쓸 생각하지 마요. 쓰려는 낌새가 보이면 불로 고모의 손과 입을…….”
“그럴 생각 없으니까, 걱정 말거라.”
하윤경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근데 너 괜히 한국 최강의 화염술사라 불리는 게 아니구나. 내 불을 그냥 제압하네.”
“노력의 결과니까요.”
“크크큭. 그래, 노력. 그건 그렇고, 너 정도면 이 시설을 손짓 한 번에 전부 불태울 수 있지 않아? 이곳을 폐쇄할 생각이면, 그냥 전부 태우는 편이 좋을 텐데?”
“이곳에 납치된 사람들이 많아요. 그 사람들을 구하기 전까지 여기를 불태울 수 없어요.”
하세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애초에 여기를 태울 이유가 없어요. 여기에 고모가 저지른 범죄의 증거들이 다 있는데, 이걸 불태우면…….”
“크크큭. 크크크크. 그래, 세리야. 너라면 역시 여기를 불태울 수 없겠지. 여기에 잡힌 사람들을 구해야지, 안 그래?”
“사람들을 구하는 게 헌터로서의…….”
“그 헌터로서의 의무 때문에 너는 지게 될 거야. 너는 나를 죽일 수 있을 때 죽였어야 했어. 그리고 이곳을 무너뜨릴 수 있을 때 무너뜨렸어야지.”
하윤경은 더 크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에 하세리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고모. 뭔 짓을…….”
“네가 나보다 훨씬 강한 화염술사라는 걸 나는 당연히 알아. 근데 그걸 알고도 불로 너에게 덤볐지. 왜 그랬는지 알아?”
“네?”
“왜냐하면 너를 노리고 날린 게 아니었기 때문이야.”
이 말과 함께 하윤경은 천장을 가리켰다.
하세리는 고개를 들어 그곳을 확인했다.
천장은 무너져 있었고, 그 틈 사이로 파이프가 있었다.
그리고 그 파이프에 어느새 작은 금이 생겨 있었다.
그 틈 사이로…….
“…가스?”
“이 시설은 내가 디자인했어. 가스선의 위치쯤은 전부 기억하고 있지.”
“…X발.”
하세리는 욕을 하며 바로 주위의 불길을 없애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콰콰쾅―!
쾅―!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지하의 시설 전체가 흔들릴 정도였다.
그로 인해 하세리와 하윤경이 있던 그 층은 무너졌다.
“으윽, 아으윽.”
화염술사의 특성 덕에, 하세리는 폭발의 불길로 인해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너진 건물의 파편 때문에 다치게 되었다.
“…고모. 고모는…….”
하세리는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저 멀리, 하윤경이 비상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거기 서!”
하세리는 다친 몸을 이끌며, 하윤경을 쫓아갔다.
【 TX4869 】
‘하세리. 아까 보니까 다리를 다쳤었어.’
하윤경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녀는 빠르게 지하 27층으로 향했다.
‘27층에 약 제조실. 그리고 제조실 안에 백업 가능한 컴퓨터가 있어.’
하윤경은 지하 27층에 도작해, 그곳에 있던 커다란 방 안으로 향했다.
그 방에 들어가, 방 중앙에 있던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기계를 통해 약을 하나 제조하기 시작했다.
‘하세리는 이곳을 없앨 생각이 없어. 아니, 사람들이 있는 한, 못 없애지. 그렇다면 할 만해.’
하윤경은 하세리와 박유진.
그 두 사람을 직접 잡기로 마음먹었다.
원래는 도망칠 생각이었지만, 생각을 바꾼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백업은 전부 해 놓고, 연구원들에게 가두었던 실험체들을 전부 풀라고 시키자. 그 실험체들로 하세리와 박유진의 힘을 빼놓는 거야.’
하윤경이 만들었던 수많은 키메라들.
그 키메라들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에, 내가 그 둘을 마무리 짓는 거지.’
하윤경은 방금 제조된 약을 바라봤다.
짙은 초록색을 띠는 알약이었다.
‘이걸 먹으면… 아무리 하세리와 박유진이라도, 내게 지겠지.’
아직 시제품인 약이었다.
최종 계획을 위해 필요한, 가장 첫 단계의 약.
아직 테스트 중에 있었지만, 당장은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안정성은 보장된 약이니, 내가 잘못될 일은 없을 거야.’
하윤경은 다시금 여유를 되찾았다.
방금 제조가 완료된 저 약을 기계에서 꺼내 먹으면…….
“고모!”
그렇게 생각하던 때, 하세리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하세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다리 다친 거 아니었어?”
“닥치고, 이제 그만해요. 저도 이제 더 이상…….”
“늦었어. 너도 늦었고… 나도 이제 되돌아가기에 너무 늦었어. 나는 이제 나아가야만 해.”
하윤경은 웃으면서, 그리고 동시에 진심을 담아 외쳤다.
“인류를 한 단계 진화시키고, 인간을 뛰어넘을 거야. 지금 그 첫 단계를 보여 주도록 할게.”
하윤경은 이 말과 함께, 기계에서 약을 꺼냈다.
짙은 초록색을 띠는 약이었…….
‘음? 약 색이… 원래 이렇게 옅었나?’
하윤경은 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약이 띠고 있는 초록색이 방금 봤던 것보다 훨씬 옅었던 것이었다.
이에 하윤경은 뭔가 이상함을…….
“첫 단계고 뭐고, 고모는 제가 막을 거예요. 더 이상의 희생자를 만들 생각 없어요.”
하세리는 다시금 자기 주위로 불을 불러냈다.
그 모습에 하윤경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봐!”
하윤경은 이 말과 함께 약을 입에 넣고 삼켰다.
“하세리! 영광으로 알아! 이걸로 너는 인류의 진화를 최초로… 우욱?!”
약을 삼키고 자신만만하게 외치던 중, 하윤경은 몸에 이상을 느꼈다.
원래라면 새로운 힘이 몸 안에 들어와야 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반대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온몸에서 힘이 전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고모?”
“아윽, 뭔…….”
온몸의 힘이 풀리자, 하윤경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윤경은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으나, 단서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약을 잘못 드셨나 봐요, 하윤경 씨?”
“너, 너는…….”
“박유진 씨?”
기계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검은 코트의 남자.
그의 등장에 하세리와 하윤경, 특히 하윤경이 놀랐다.
“너… 언제부터…….”
“온 지 조금 됐죠. 그보다 하윤경 씨.”
박유진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 위에 알약이 하나 있었다.
짙은 초록색의 약이었다.
“약을 먹을 때는 신중히 먹도록 하세요. 잘못 먹으면 큰일 나니까요.”
“그 약을… 언제 바꿔치기를…….”
“제가 잔재주가 많거든요.”
박유진은 미소를 지었다.
승리를 확신하는 미소였다.
그걸 본 하윤경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패배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