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 * *
약 15분 전.
내가 지하 23층의 약 제조실에 가기 전.
“갸아아악!”
“좀 꺼지세요, 제발.”
나는 정수민을 옆으로 밀쳐 낸 뒤, 내게 달려들던 이지현의 명치에 발을 날렸다.
그런 후, 조원선의 창을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생각보다 잘 싸우는군.”
“뭐, 제가 좀 잘 싸우기는 하죠.”
내게 주먹을 날리는 이채민을 피한 뒤, 그와의 거리를 최대한 벌렸다.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해 봐서 말이죠.”
“하지만 자네의 한계는 명확해 보이는군.”
이채민은 주먹을 들어 올려, 싸울 자세를 취했다.
“나를 포함한 이 넷을 상대로 버틴 건 칭찬하지. 하지만 버티기만 해서는 아무 의미 없어.”
“예, 알아요. 매우 잘 알고 있죠.”
나는 이채민, 이지현, 정수민, 조원선을 바라봤다.
그들은 다시금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네 분을 빨리 쓰러뜨리고 올라가야 하죠. 하지만 이렇게 막히면…….”
“자네가 패배할 확률이 더 높아지겠지.”
“그쵸. 빨리 하윤경을 잡으러 가야 하는데, 이렇게 발이 묶여 있으니까요.”
물론 하세리를 보내기는 했지만, 하세리 혼자서 하윤경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이채민도 그걸 잘 아는 듯했다.
그래서 이채민은 개조된 저 셋과 함께 나를 막아서고 있었다.
나를 죽이기보다는 시간을 끌려는 목적으로 말이다.
‘귀찮게 하네.’
시간만 충분하다면, 이 넷을 전부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내게 시간이라는 자원이 얼마 없었다.
빠르게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했다.
‘이 넷을 죽일 필요는 없어. 쓰러뜨릴 필요도 없고. 그냥… 나를 막지 못하게 발만 묶으면 되는 거야.’
나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런 후, 내 목에 걸린 푸른색 돌멩이를 슬쩍 바라봤다.
“힘 좀 빌린다.”
우웅―
마치 대답하듯 작게 진동하는 엔드리온의 조각.
그리고 잠시 뒤, 나는 그 조각에게 약간의 전류를 흘려보냈다.
그러자 엄청난 양의 전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크악?!”
“으아아악!”
내게 다가오던 네 명은 뿜어져 나온 전류를 직격으로 맞았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쿵―!
나는 전류를 이용해, 벽 뒤에 있던 철근 하나를 뜯어냈다.
그런 후, 자기장으로 철근을 휘둘러 넷을 한곳에 몰아넣었다.
“키아악?!”
“어억?!”
“박유진! 박유진! 네가 또…….”
“시끄러워요.”
나는 이지현의 고함을 무시한 뒤, 그 넷의 위, 그러니까 천장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지직―!
그러곤 방의 천장을 향해 전류를 대량으로 날렸다.
그러자 천장이 무너지며, 수많은 파편들이 그 넷 위로 떨어졌다.
“으아아악!”
“바, 박유진! 대체 무슨…….”
“잠시 쉬고 계시죠.”
나는 웃으며 이채민에게 대꾸했다.
그런 후, 더 많은 파편들을 그의 위에 떨어뜨렸다.
“이 정도면 몇 분은 조용히…….”
몇 톤 가까이 되는 파편들을 쌓은 뒤.
나는 전류를 거두며 앞을 바라봤다.
넷 위에 쌓인 파편들의 양이 상당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파편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네.”
하윤경이 개조한 인간들답게, 기본적인 힘 자체가 엄청났다.
저기서 빠져나오기 전에, 빨리 일을 진행해야 할 것 같았다.
‘하윤경이 갔을 층은 아마… 역시 거기겠지.’
나는 빠르게 방에서 빠져나가 같은 층, 그러니까 지하 30층에 위치한 또 다른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방 안에 대치 중이던 하윤경과 하세리를 발견했다.
“제 가족들까지 전부 실험에 썼잖아요. 그리고 전부 그 실험들 때문에 죽었고요.”
“아, 그것까지 확인했니?”
“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몸을 숨긴 채, 자바니아를 들어 올렸다.
‘죽일 거면 지금이 기회야.’
하윤경은 나를, 아니.
하윤경과 하세리.
두 사람 모두 나를 눈치 못 채고 있었다.
‘지금 들어가서 하윤경의 숨통을 끊으면 끝나.’
그래, 하윤경을 지금 죽이면 이번 일은 완벽히 끝난다.
끝나는데…….
‘뭔가 아쉬울 거 같은데.’
회귀 전, 나는 하윤경을 죽였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이후로 하윤경이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당시에, 내 머릿속에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만약 하윤경을 죽이지 않고 살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정확히 말하자면, 하윤경의 그 능력과 지식을 이용만 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여러모로 유용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죽이지 않고 이용한다. 하지만 이용하는 방법이…….’
하윤경은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무력 자체도 만만치 않았다.
그 무력을 없애지 않는 한, 하윤경은 살려 두기에 너무 위험했다.
하지만 그 무력을 없앨 수 있다면, 그리고 내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다면.
‘가능하려나?’
머릿속에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였지만, 실패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 여기서 죽이면 끝. 하지만 이걸 시도해 본다면…….’
만에 하나 성공하면, 하윤경이라는 장기말이 생기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결정을 내렸다.
‘죽이기에 아깝기는 하지.’
나는 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우선 지하 24층으로 올라갔다.
‘자, 떠올리자. 회귀 전에, 하윤경을 죽이고. 그때 이곳을 경찰들과 함께 내가 직접 조사했어.’
지하 24층은 온갖 마도구들, 그러니까 하윤경이 만든, 악질적인 마도구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지하 24층에 그것이 있었다.
하윤경이 유능한 사람을 강제로 부하로 만들 때 쓰던 그것이 말이다.
“…찾았다.”
수많은 마도구들과 장비들이 배치된, 창고와도 같은 방.
그 방에서 나는 내가 찾던 것을 바로 찾아냈다.
“이거와… 이거 하나씩 챙겨야지.”
열네 개의 반지가 쌓인 상자.
그리고 같은 수의 발찌가 담긴 다른 또 다른 상자.
거기서 반지 하나와 발찌 하나씩을 챙겼다.
“자, 여기에 내 피를…….”
나는 자바니아로 손가락 끝을 베었다.
그리고 반지와 발찌에 내 피를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 두 물건에서 미약한 빛이 잠시 나왔다 꺼졌다.
“됐다. 그럼…….”
나는 그 두 물건을 주머니에 넣은 채, 지하 27층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곳에 있던 커다란 방, 그러니까 약품 제조실에 들어갔다.
“하윤경은 분명 여기로 오겠지.”
그 아줌마의 성격상, 나와 하세리를 직접 잡으려 들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하윤경은 반드시 여기로 와 약을 먹을 터였다.
인류를 뛰어넘기 위해 만든 최초의 약을 말이다.
“다른 걸 먹게 해 줘야지.”
나는 약 제조실에 있던 기계를 작동시켰다.
암살자 일을 하면서, 약품에 대해 나름대로 지식을 쌓았다.
그래서 이런 기계들 정도는 쉽게 다루었다.
‘어디 보자. 이 기계 안에 하윤경이 그 약의 제조법을 저장해 놨을 거야. 파일 452. 약품명 TX4869. 프로젝트 카라스. 이 제조법을 기계에 대입하고…….’
나는 빠르게 기계를 작동시켜,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을 완성시키기 직전에…….
‘그 약, 짙은 초록색이었지.’
그걸 떠올린 나는 만들던 약에 색소를 추가했다.
덕분에 약은 초록색이 되었지만, 내가 생각한 것만큼 짙지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 약과 완벽히 똑같은 색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콰쾅!
밑에서 들려온 거대한 폭발음.
그것과 함께 지하 시설 자체가 흔들렸다.
“…곧 오겠네.”
아쉽게도 시간이 부족했다.
약을 초록색으로 만들었지만, 짙은 초록색으로는 만들 수 없었다.
‘들킬 수도 있겠어.’
하윤경의 꼼꼼함을 생각하면, 의외로 위험한 도박이었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냥 안 들키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해 보자.”
약을 챙기고 기계를 끈 후.
나는 기계 뒤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잠시 뒤, 방 안에 하윤경이 뛰어 들어왔다.
아까의 폭발에 휘말렸던 건지, 지저분한 꼴이었다.
‘자, 지금부터가 진짜지.’
방 안에 들어온 하윤경은 바로 컴퓨터를 켜고, 기계를 작동시켰다.
내가 방금까지 쓰던 기계를 말이다.
그녀는 기계를 건드려 무슨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약이 무엇인지 나는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하윤경이 약을 만드는 걸 조용히 지켜봤다.
그리고 잠시 뒤.
“고모!”
방 안으로 하세리가 들어왔다.
그로 인해, 하윤경은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에 내가 움직였다.
나는 기계 안에서 약을 꺼내고, 내가 만들었던 약을 넣었다.
“…지금 그 첫 단계를… 너에게 보여 주도록 할게.”
약을 바꿔치기하자마자, 하윤경은 바로 기계에서 약을 꺼냈다.
그녀는 바꿔치기 당한 약을 보더니 잠시 망설였다.
들킨 건가 싶었지만, 다행히 그런 것 같진 않았다.
하윤경은 내가 만든 약을 입에 넣고… 삼켰다.
‘됐다.’
성공이다.
내가 사실상 승리한 것이었다.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봐!”
아무것도 모르는 하윤경은 당당하게 외쳤다.
“이걸로 너는 인류의 진화를 최초로… 우욱?!”
하윤경은 말하던 도중,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후,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치 온몸에 힘이 빠진 것처럼 말이다.
“…고모?”
“아윽, 뭔…….”
하윤경과 하세리, 두 사람 모두 당황했다.
그리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약을 잘못 드셨나 봐요, 하윤경 씨?”
나의 등장에 하윤경은 더더욱 당황했다.
그리고 내 손에 있는 짙은 초록색의 약을 보자, 그녀는 상황을 파악했다.
“약을 먹을 때는 신중히 먹도록 하세요. 잘못 먹으면 큰일 나니까요.”
“그 약을… 언제 바꿔치기를…….”
“제가 잔재주가 많거든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후, 나는 하세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세리 헌터님. 괜찮으세요? 다치신 거 같은데.”
“저는 괜찮아요. 가스 폭발 따위에 제가 당할 리 없으니까요. 그보다.”
하세리는 바닥에 주저앉은 하윤경을 바라봤다.
“박유진 씨는 언제 여기에 오신 거죠? 그리고 고모는 지금 왜 저렇게 된 건가요?”
“약을 먹은 탓이죠. 혹시 하윤경이 방금 한 말을 들으셨나요?”
“아니요. 박유진 씨가 약을 잘못 먹었다? 그런 말을 하는 것까지는 들었는데, 고모의 대답은 못 들었어요.”
“그렇군요.”
하세리는 내가 약을 바꿔치기했다는 것을 모른다.
그렇다면…….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저도 방금 온 거예요. 하윤경을 기습하기 위해 방 안으로 방금 전에 조용히 들어왔어요.”
“아, 그런가요? 확실히 박유진 씨는 암살자 쪽이라 가능했겠네요.”
“네, 그리고 두 번째 질문, 그러니까 지금 하윤경은… 몬스터가 되기 위한 약을 먹은 상태예요.”
“네? 몬스터요?”
“네, 저희 둘을 잡기 위해서요.”
내 거짓말에 하세리는 놀란 듯했다.
“조원선의 경우처럼, 그러니까 몬스터의 유전자를…….”
“네. 몬스터의 유전자를 발현시켜서 힘을 얻는 거죠. 그 힘을 이용해 저희를 제압할 생각이었고, 하윤경은 이제 변형을 시작할 거예요.”
“변형. 그렇다면 지금 당장 고모를…….”
“하윤경은 제가 처리할게요.”
나는 하세리의 말을 끊었다.
“하세리 헌터님은 지금 당장 사람들을 불러와 주세요. 여기에 개조된 몬스터들과 사람들이 많으니, 협회의 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네, 사람들을 빠르게 불러와야죠. 하지만 만약 고모, 아니, 그러니까 하윤경이 몬스터가 되면 박유진 씨가 혼자서…….”
“혼자서 충분해요. 그러니까 저를 믿고 사람들을 지금 불러와 주세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에 하세리는 잠시 망설였으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하윤경은 박유진 씨께 맡길 테니, 경찰들과 협회 사람들에게 연락할게요.”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최대한 빨리해 주세요. 아까 지하 30층의 그 네 명 있잖아요. 제가 그 넷을 안 쓰러뜨리고 왔거든요.”
“그렇군요. 알겠어요.”
하세리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에서 연락이 안 되는데, 지상으로 올라가서 연락하고 올게요.”
“알겠어요.”
“혹시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올라오세요, 알겠죠?”
“예.”
“그리고 하윤경은… 가능하면 죽이지 마세요. 이번 일의 중요한 참고인일 테니까요.”
“노력해 보죠.”
이 말을 끝으로, 하세리는 방을 나가 계단으로 향했다.
하세리가 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다시금 하윤경 쪽을 바라봤다.
“크아악! 아악!”
하윤경은 아까 전부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고통스러워 보이네요, 하윤경 씨.”
“으아아악! 너, 너! 내게 뭔 약을…….”
“잘 아시는 약일 거예요. 하윤경 씨가 직접 만든 약이니까요.”
“아윽, 으윽? 내, 내가 만든 약?”
“TX4869. 뭔지 아시죠?”
“…그 약은…….”
“이제 곧 변형이 시작되겠네요.”
나는 피식 웃으며 하윤경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다.
“이 정도로 엄살 피우지 마세요. 하윤경 씨에게 당한 사람들은 더한 고통을 겪었으니까요.”
“크아아악! 아악!”
하윤경이 몬스터로 변형될 거라고 하세리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아아악!”
하윤경의 몸이 본격적으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서 이상한 물질들이 빠져나왔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아으그그, 으윽. 아아…….”
“…흠, 대충 다 됐나?”
“너… 박유진… 이러고도 무사할 거라…….”
“꼬맹이가 그런 말 해 봤자, 전혀 안 무섭네요.”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중년에 가깝던 하윤경.
그녀는 어린아이로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