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하세리와 같이 부산 가겠다는 일정을 잡은 후.
나는 바로 집에 돌아갔다.
유나는 학교에 가 있을 시간이라 집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너 우리 집에 왜 있는 거냐?”
“심심해서 왔어.”
이민아는 우리 집 거실에 매우 편하게 누워 있었다.
“방학이라 할 게 없었거든.”
“그, 뭐냐? 너희 아버지가 너를 막 훈련시키거나 그러지 않냐? 너네 아버지라면 분명…….”
“그냥 이제부터 나 보고 알아서 하라던데?”
이민아는 선풍기 바람을 쐬며 말했다.
“본인이 훈련시키는 것보다 네가 날 훈련시키는 편이 나으니, 방학 동안 너랑 지내라고도 말씀하시더라.”
“…그러냐?”
어떻게 보면 이진성의 눈이 정확한 것이었다.
본인이 이민아를 훈련시키는 것보다, 내게 맡기는 편이 더 효과가 좋다.
이민아를 내게 보내서 훈련시키는 건, 어떻게 보면 합리적이었다.
‘근데 너무 무책임하게 내게 보내는 것 아니냐고?’
내가 이민아를 꾸준히 키우기는 하겠다만, 이렇게 대놓고 내게 맡기니까… 뭔가 이럴 거면 수업료 같은 거라도 주든가.
‘뭐, 내가 수업료를 요청하면 그 아저씨 성격상 그냥 줄 것 같기는 한데…….’
뭔가 감히 이진성에게 돈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아저씨와 굳이 깊게 연관되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아니, 근데 그건 그렇고…….
“그보다 이민아, 너.”
“응?”
“우리 집 도어락 비번, 그거 최근에 바꿨거든? 설마 또 유나가…….”
“응, 유나가 그저께 알려 줬어.”
“걔는 너무 쉽게 비번을 말하고 다니는 것 같네.”
“에이, 나한테만 말한 거래.”
이민아는 은근히 기분 좋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게다가 나는 알고 있어도 괜찮지 않냐? 내가 너나 유나에게 이상한 짓 할 것도 아니고.”
“뭐, 그렇기는 하다만…….”
“거기다가 유나는 나한테 비번을 알려 주면서, ‘언니 정도면 우리 가족이지’라고 말해 줬다고.”
“으음, 그거는…….”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치?”
이민아는 내가 긍정해 주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이에 나는 피식 웃으며 이민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줬다.
“으읏? 야! 내 머리를 또…….”
“너도 좋으면서 뭘.”
“아니, 이건…….”
“그리고 맞아.”
“응?”
“너 정도면 가족이라고, 인마.”
지금의 이민아야, 나를 알게 된 지 반년 정도밖에 안 되었다.
하지만 나는 전생에 이민아를 10년 넘게 알고 지냈다.
그리고 실제로 가족처럼 지냈었다.
“어, 어어어. 그, 그치. 그걸 알면 나한테 잘해라. 유나처럼 나도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그러라고, 새끼야.”
“바라는 것도 많네. 그건 그렇고, 기분 많이 좋나 봐? 입꼬리가 안 내려가는데?”
“뭐, 뭐래.”
이민아는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이민아의 입꼬리가 여전히 올라가 있는 게 잘만 보였다.
“크큭. 뭐, 나중에 돈 모으면 좀 더 넓은 집을 구하든가 해야겠네.”
“집? 갑자기 웬 집?”
“방이 두 개 있는 걸 구해야 될 것 같아서 말이지. 유나 방과 내가 지낼 거실. 그리고 네가 지낼 방. 이렇게 말이야.”
“…내가 지낼 방?”
“너 뭔가 앞으로 우리 집에서 더 자주 지낼 거 같거든. 그래서 이참에 네 방도 한 번…….”
더 넓은 집을 구할 계획은 있었다.
하지만 이건 몇 년 뒤, 돈을 훨씬 더 많이 모은 뒤에 할 생각이었다.
지금 한 이야기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것이었는데.
“…집 오늘 구하러 갈래?”
“뭐?”
“돈은 내가 낼게. 방 두 개인 집이면 내가 어떻게든… 아악?!”
“급발진은 하지 마, 인마.”
나는 한숨을 쉬며 이민아의 정수리를 한 대 쳤다.
“게다가 집 구하는 것까지 너에게 손 벌리기는 싫다. 집은 내 돈으로 사야지.”
“돈 내가 빌려줄 테니까, 빠르게 사면 안 될까? 그리고 나도 그 집에서 앞으로 살면…….”
“그런 건 천천히, 그리고 신중히 해야지.”
“으으음, 그냥 빨리…….”
“보니까 너, 그냥 빨리 독립하고 싶은 거지?”
“…응, 그렇지.”
이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네 집으로 내 짐을 다 옮겨서 거기서 아예…….”
“과연 네 가족이 널 쉽게 놔줄까? 게다가 너의 그 돈들, 다 용돈으로 받은 거잖아. 독립하고 나서 돈을 어떻게 벌지는 생각해 놨어?”
“그건…….”
“천천히 계획하고 준비하자. 급하게 하면 될 일도 안 되니까.”
“으, 응.”
“옳지, 착하다, 착해.”
“으으으…….”
나는 이민아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 줬다.
이에 이민아는 뭔가 할 말이 참 많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다문 채 내 손길을 그저 받아들였다.
“야, 박유진. 대신 너 약속해.”
“뭐를?”
“나중에 집 구하면, 거기에 나를 제일 먼저 불러라.”
“알겠어, 인마. 알겠어.”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고, 이에 이민아도 옅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히히힛. 으음… 아, 맞다. 그리고 너 오늘 아침에 어디 갔다 온 거야? 아까 여기 오니까 너 없어서 어디 갔나 했는데.”
“헌터 협회 좀 갔다 왔다. 하세리 헌터님이 불러서.”
“…아, 그렇구나. 하세리 헌터님이… 또 불러서.”
“어, 뭐. 그렇지. 아, 그리고 이야기 나온 김에 하나 부탁할게.”
“응?”
이민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 내일이나 모레에 부산에 갈 것 같거든. 당일치기로 갔다 올 수도 있지만, 1박 2일로 갔다 올 수 있어. 그래서 유나를 하루만 봐 줄 수 있을까?”
“상관은 없어. 근데 유나도 이제 중학생이나 됐는데, 하룻밤 정도는 혼자 있어도 괜찮지 않냐?”
“유나를 혼자 놔두기에는 뭔가 불안하거든. 게다가 유나도 너랑 같이 하루 지내는 거 좋아할걸?”
예전이었으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하윤경의 실험체들, 그러니까 이지현, 조원선, 정수민.
그 셋이 아직 안 잡혔다.
그 셋이 잡히기 전까지, 유나의 안전을 조금 더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그래? 뭐, 그럼 하루 정도는… 근데 잠깐만. 부산에는 갑자기 왜 가?”
“하세리 헌터님에게 부탁받은 게 있거든.”
“으음. 혹시… 혼자 가는 거냐? 혼자 가는 거면, 그냥 나와 유나를 같이 데리고…….”
“유나는 학교 가야 하잖아. 게다가 나는 하세리 헌터님과 같이 갈 거 같다. 그분은 나와 단둘이 가는 걸 원하는 거 같으니까, 너는 그냥…….”
나는 별생각 없이 이민아에게 설명했다.
근데 내가 하세리와 같이 간다고 말하자마자…….
“데려가.”
“음?”
“나도 데려가라고. 나도 너랑 같이 부산 갈래.”
“아니, 유나를 봐주기로…….”
“몰라! 나도 데려가라고!”
이민아는 확고한 눈빛으로 내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모습에 나는 당황했다.
“너는 또 왜 그러는…….”
“하세리 헌터님과 단둘이 가는 걸 내가…….”
…아.
뭔 문제인지 알 것 같았다.
* * *
“하세리 헌터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니까, 떼 그만 써라.”
“됐어, 새끼야.”
이민아는 누가 봐도 삐진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일단 나를 따라오겠다는 이민아의 고집은 어찌어찌 꺾었다.
하지만 덕분에 이민아는 살짝 기분이 상한 듯했다.
‘왜 저러는지 알 것 같기는 하다.’
이민아는 얼마 전부터 내게 정신적으로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이민아를 놔두고, 하세리와 단둘이 1박으로 어디 갔다 오는 것이었다.
이민아 입장에서는 용납하기 힘든 상황이지 않을까 싶었다.
‘어쩔 수 없지. 게다가 내가 항상 이민아 옆에 있을 수는 없어. 나 없이도 지낼 수 있게 해야지.’
그리고 그것 외에도, 유나를 지켜 줄 사람이 필요했다.
말했듯 이지현, 조원선, 정수민이 아직 안 잡혔다.
그 셋이 잡히기 전까지, 유나를 봐줄 사람이 한 명쯤은 필요했다.
‘유나가 개학만 안 했으면, 유나와 이민아를 둘 다 데려가는 거였는데.’
중학생들의 방학이 짧아서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 오빠, 이거 봤어?”
약 한 시간 전에 하교하고 집으로 돌아온 유나.
유나는 내 옆에 앉은 채 스마트폰을 보다 무언가를 내게 보여 줬다.
“으음, 어디 보자… 헌터 협회는 공식적으로 박유진과 최서희의 대결을 성사… A급 헌터 하세리는 이를…….”
하세리가 공식적으로 나와 최서희의 대결을 열겠다고 발표했다.
대충 이런 내용의 기사였다.
“대결은 부산에서, 모레 오전에 진행… 생중계… 으음… 그렇다면 아마 내일쯤 출발하려나 보네.”
“오오, 그럼 오빠가 이 최서희라는 헌터와 싸우는 거야? 이 사람 지금 한국 최강의 일렉트로 마스터인가 뭔가라 했던 거 같은데.”
“응, 그 사람 맞다.”
“오오오. 이야, 오빠가 그런 사람의 라이벌이라고 불리는 날이… 음? 근데 오빠. 이 사람이 소속된 길드 이름이 이상한데? 사찰국밥? 이거 길드 이름 맞아?”
“어, 맞아. 전혀 안 그렇게 보이지만, 길드 이름 맞다.”
그나저나 사찰국밥, 그 길드는 이름을 바꿀 필요가 진짜 있었다.
부산 최대 규모의 길드인데, 이름 하나 때문에 위엄이 안 살았다.
‘물론 절대 안 바꾸겠지만.’
그 길드의 길드장을 회귀 전에 만났는데… 사람 자체는 매우 착했다.
하지만 길드 이름만큼은 절대 안 바꾼다는 굳센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뭐, 그 길드의 이름이야 그렇다 치고.
“나 아마 내일 출발해서 1박 2일로 부산에 있다 올 거 같거든. 그동안 이민아 너 봐 주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오빠, 나도 다 컸는데 굳이 민아 언니를…….”
“그냥 내 말 들어, 인마. 그리고 솔직히 이민아와 같이 있는 게 싫지는 않잖아?”
“싫지는 않지. 오히려 좋지. 민아 언니와 있으면 시간 진짜 빨리 가던데.”
“그렇다네, 이민아.”
나는 여전히 뚱한 표정을 짓는 이민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의미에서 유나를 하루 동안 잘 부탁한다.”
“…몰라. 너는 하세리 헌터님과 단둘이서 부산에서 잘…….”
“만약 잘 봐준다면.”
나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하세리의 말을 끊었다.
“1박 2일로 같이 여행 갔다 오자.”
“…진짜?”
“방학 끝나기 전에 한 번 놀다 와야지, 안 그래?”
“약속…하는 거지?”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은 안 해.”
“그런 거라면…….”
이민아는 다시금 기운을 차린 채 내게 다가와 앉았다.
그것도 매우 반짝이는,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이다.
‘엄청 좋아하네.’
그냥 이민아를 같이 데려갈까 순간 고민했다.
유나를 지켜 주는 거야, 신예진에게 맡기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으음… 아니다. 유나를 신예진에게 맡기기에는 아직 일러.’
신예진은 유나를 지키기에 아직 충분히 강하지 않았다.
그러니 신예진을 조금 더 수련시킨 뒤.
‘나중에 이민아와 단둘이 여행 갈 때 유나를 신예진에게 맡겨야지.’
그래, 그게 좋을 듯했다.
그러니 당장은 내일 하세리와 부산에 갈 거나 생각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하세리와 같이 부산이라…….’
이런 식으로 단둘이 여행 느낌 나게 가는 건… 상당히 오랜만인 것 같았다.
* * *
같은 시각.
부산의 ‘사찰국밥’의 숙소.
“좋았어. 언니, 헌터 협회 쪽에서 반응했어. 아마 내일 하세리와 박유진이 부산 쪽으로 오고, 모레에 언니가 박유진과…….”
“서현아, 나 어떻게 할까?”
“응?”
“박유진, 이 사람 되게 멋있고… 되게 인싸 같은 사람인데……. 내가 그런 사람과 말을 잘 할 수 있을까? 첫인상 잘 남겨야, 나중에 내가 따로 그 사람에게 기술을 전수받거나 하는…….”
최서희는 숙소 구석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작고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아, 근데 보면 볼수록 되게 멋있는 사람 같아. 내가 이런 사람과 잘…….”
“하아아. 돌겠네, 진짜.”
최서현은 자기 언니의 이런 모습에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