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 * *
박유진과 하세리가 호텔에서 막 출발하려던 그 시각.
사찰국밥의 휴게실 안.
“언니. 준비는 다 됐지?”
“으, 응. 다 됐지.”
“내가 어제 박유진에 대한 자료들 준 것도 다 읽었고?”
“그것도 다 읽었어.”
최서희와 최서현.
자매는 휴게실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요점은 박유진이 암살자로서 나와 싸울 수 있다는 거지?”
“박유진은 일렉트로 마스터이기 이전에 암살 계열 헌터야.”
최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암살자로서 지닌 기술들이 만만치 않을 거야.”
최서현은 들고 온 서류들을 최서희에게 보여 줬다.
“어제도 말했지만, 박유진은 기척을 완전히 감춘 채 움직여. 게다가 쓰고 다니는 이 마스크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고, 무엇보다 와이어. 박유진이 와이어 쓰는 건 진짜 조심하도록 해.”
“박유진……. 와이어 잘 쓰기는 하더라.”
“잘 쓰는 수준이 아니라 엄청 잘 쓰는 거야. 다른 건 몰라도, 와이어 다루는 거 하나만큼은 한국에서 최고일걸?”
“서현이,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야?”
“와이어로 얻는 기동성이 장난이 아니거든. 게다가 그 와이어가 철로 이루어진 건지, 와이어를 상대에게 날려서, 그 와이어로 전기를 흘려보낸다더라.”
최서현은 박유진에 대해 조사를 많이 해 놨었다.
그리고 박유진에 대해 알수록, 최서현은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박유진은 일렉트로 마스터로서는 너보다 약할 수도 있어. 하지만 암살자로서는… 확실히 C급 이상이야. 솔직히 암살만으로 승부를 본다면… A급도 방심할 수는 없을 거야.”
“근데 박유진이 과연 암살로 나를 잡으려 들까?”
최서희는 긴가민가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건 누가 더 강한 일렉트로 마스터인지 가리는 거니까) 박유진이 암살 기술들을 내게 쓰지는 않을 거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대비는 하고 있어.”
최서현은 나름 진지하게 말했다.
“박유진은 변칙적으로 싸우는 헌터야. 어떤 수단을 쓸지 모르니까, 최악의 경우까지 미리 생각해 놓는 게 좋을 거야.”
“으, 응. 알겠어.”
“좋았어. 그럼 다음으로 해 줄 말은…….”
최서현은 최종 점검을 위한 준비를 계속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려던 그때.
“자! 우리 딸! 준비는 다 됐어?”
휴게실 안으로 거구의 남자가 들어왔다.
자매와 머리카락 색이 똑같은 남자가 말이다.
“오늘 유진이, 그 친구와 싸우는 거잖아. 그 친구 꽤 실력이 있어 보이던데, 어때? 이길 수 있겠어?”
“아, 아빠.”
갑작스러운 최성구의 등장에 최서희는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네. 준비는… 얼추 했어요.”
“하하하하! 그래! 잘했어! 준비를 했으면 당연히 이길 수 있겠지! 그러니…….”
“아빠.”
옆에 있던 최서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렇게 갑자기 들어오시지 말라고 말했잖아. 언니 놀란다고.”
“아, 그래. 미안하다. 내가 노크하는 걸 또 깜박했네. 내 길드라서 또 너무 편하게 다녔구나, 하하.”
최성구는 크게 웃으며 최서현의 등을 두들겼다.
이에 최서현은 헛웃음을 지었지만, 딱히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근데 아빠. 아빠 먼저 스타디움에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거 일단은 저희 길드에서 주최한 거라, 아빠가 미리…….”
“그런 건 천천히 하면 된다. 게다가 그것보다 내 딸들의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는 게…….”
“서현이가 어서 가 보라고 하잖아요, 여보.”
최성구의 말을 끊으며 휴게실에 들어온 여자.
평범하게 생긴 여자였으나, 그녀를 보자 최성구는 흠칫 놀랐다.
“지, 지민아. 여기는 어떻게 알고…….”
“뻔하잖아요. 아무튼, 빨리 서현이 말대로 그 경기장인가 뭔가 하는 곳에 가죠. 맨날 길드 업무들을 서현이에게 맡기는데, 그럼 적어도 서현이가 시키는 건 해야죠, 안 그래요?”
“그, 그렇지? 근데 조금 천천히 가도 상관이 없지 않을까 싶은…….”
“하아아. 빨리 오기나 해, 성구 오빠.”
“…네.”
차가운 아내의 말에 최성구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서희에게 인사만 하고 바로 출발할게.”
이 말과 함께, 최성구는 다시금 최서희에게 다가갔다.
그는 자신의 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서희야. 이길 자신 있지?”
“…네, 아마도 그럴 거예요.”
“그럼 최선을 다해서 이기는 거야. 네가 박유진보다 낫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 줘야지.”
그리고, 라고 말하며, 최성구는 따듯한 미소를 지었다.
“꼭 이길 필요는 없으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는 말렴. 네가 이기든 지든, 너는 자랑스러운 내 딸이니까. 알겠니?”
“…네. 알겠어요. 아빠.”
최서희는 사람들을 만나는 걸 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들만큼은 예외였다.
최서희에게 있어 가족은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니 말이다.
“그래! 좋아! 그거면 된 거야! 열심히 하렴. 그러니 나도…….”
“그러니 오빠도 열심히 좀 일하자. 그런 의미에서 얼른 따라와. 딸들이 열심히 하는데, 아버지도 열심히 살아야지?”
“그, 그래. 얼른 가자.”
“응. 빨리 와. 그리고 서현아. 네 언니 잘 데리고 와. 그리고 오늘 끝나면, 외식이나 하러 가자. 준비하느라 네가 제일 고생했으니, 오늘은 내가 사 줄게.”
“응. 알겠어, 엄마.”
최서현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자매의 부모가 휴게실을 떠난 뒤.
“언니. 아무튼… 이길 자신 있다는 거지?”
“…이겨야지. 아빠가 저렇게 나를 응원하는데, 질 수는 없잖아.”
“후훗. 그치. 그리고 내가 봤을 때 언니가 이길 거야. 그냥 평소처럼, 게이트에서 몬스터 잡는다 생각하고 싸워. 그럼 될 거야.”
“아, 알겠어.”
최서희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굳센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 * *
“많이도 왔네.”
나는 스타디움의 관객석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봤다.
순수히 나와 최서희의 싸움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있었고…….
“네, 박유진은 어제 C급으로 오른 헌터로, E급에서 C급까지 상승을 한…….”
“지금 누가 한국 최강의 전격술사인지 판가름이 나는…….”
“누가 이길 것 같냐고요? 최서희이지 않을까요? 그래도 A급 헌터인데, C급에게 질 것 같지는…….”
기자들, 개인 방송 하는 사람들, 영상을 찍는 사람들 등, 여러 가지 목적으로 온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뭐가 어찌 됐든, 오늘 이 대결 이후, 나는 한층 더 유명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너무 유명해지는 것도 곤란한데 말이야.”
나야 상관없었지만, 유나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이 유명세를 이용해 돈을 많이 벌면 더 안전한 동네로 집을 옮기든가 할 생각이었다.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한다 치고.
“왔구먼.”
나는 스타디움의 반대쪽에서 나타난 최서희를 바라봤다.
사람 많은 곳이라 그런지, 그녀는 다소 긴장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확실하고도 강한 투지가 느껴졌다.
‘가족에게 제대로 응원을 받은 듯하네.’
최서희의 가족은 사이가 매우 좋다 보니, 그들의 격려가 그녀에게 있어 항상 큰 힘이 됐었다.
그건 그렇고, 최서희의 가족들은…….
‘저기 있네.’
스타디움 내에 위치한 VIP석.
거기에 최성구를 포함한 그의 가족들이 전부 있었고, 그들 옆에는 어느새 하세리가 가서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하세리는 내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에 나 또한 가볍게 손을 흔들었는데, 그때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이 하나 있었다.
‘저 떡볶이는 어디서 또 사 온 거야?’
하세리는 분명 저런 음식들을 안 먹을 터였는데, 왜…….
‘…나 때문인가? 내가 어제 닭꼬치를 먹여서, 혹시 하세리의 봉인을 푼…….’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이내 그 생각들을 지웠다.
지금은 그런 것들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다시금 눈앞에 나타난 최서희를 바라봤다.
‘최서희는 엄청난 위력의 전류를 무차별적으로 날리는 편이야. 원래 같았으면 엄폐물 뒤에 숨었겠지만, 여기는 엄폐물이 없어.’
엄폐물은커녕, 고지대도 없었다.
그냥 탁 트인 평지.
경기장 내에 아무것도 없었다.
‘와이어로 기동성은 못 얻겠네.’
물론 이 정도는 예상했었다.
그러니 최서희를 상대할 방법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박유진 씨.”
속으로 생각하던 중, 최서희가 입을 열었다.
지난번처럼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잘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누가 더 강한지 알 수 있도록, 정정당당한 승부를 부탁드리죠.”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애초에 나는 정정당당한 승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마, 최서희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듯했다.
“자! 자! 이렇게 오늘의 두 주인공이 모였다!”
최서희에게 대꾸를 하자마자, 최성구의 매우 큰 목소리가 스타디움에 울려 퍼졌다.
“누가 더 전기를 잘 다루는지 승부를 보는 것! 그래! 긴말하지 않겠다! 정정당당하게 지금부터! 승부다!”
이 말과 함께 관객석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와 최서희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나는 자바니아를 꺼내 들었다.
이에 최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암살자의 기술로 저를 상대할 생각이시군요?”
“뭐… 제가 준비한 여러 방법들 중 하나일 뿐이죠.”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싸우는 게 내 주된 방식이었다.
일단 최서희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자바니아를 쓸지 안 쓸지를…….
“그럴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죠.”
파지지직! 파지직!
이 말과 함께, 최서희는 기습적으로 내게 전류를 날렸다.
매우 빠른 속도로 내게 날아온 터라, 차마 피할 틈이 없었다.
“으윽.”
최서희의 전류를 직격으로 맞고 뒤로 밀려났다.
나 또한 전류를 다루는 인간이었기에, 전류에 대한 내성은 꽤 있는 편이었다.
그래, 보통은 그랬을 터였는데.
“…더럽게 세기는 하네.”
나는 공격받은 내 오른팔을 내려다봤다.
코트의 방어력 덕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완벽히 방어하지는 못했다.
전류로 인한 열기 때문에 팔에 화상을 입었다.
“후우우.”
나는 최서희를 바라봤다.
그녀 주위로 엄청난 양의 전류들이 이곳저곳에 튀고 있었다.
“…이 방법은 안 되겠다.”
나는 자바니아를 다시 넣으며 중얼거렸다.
고지대가 있으면 기습이라도 노렸겠지만, 여기는 아무런 지형지물이 없었다.
최서희를 둘러싼 저 전류를 뚫고 그녀에게 접근하는 건 힘들 듯했다.
‘자바니아로 전류를 흡수하는 것도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것도 쉽지는 않을 거야.’
아무래도 암살자의 방식으로 최서희를 상대하는 건 힘들 듯했다.
그렇다면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기대하는… 일렉트로 마스터로서 그녀를 상대하는 게 맞았다.
‘근데 이것도 쉽지가 않을 것 같단 말이지.’
전류를 다루는 지식과 그 노하우는 전부 머릿속에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의 내게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너무 강한 전류는 지금 내가 못 다뤄.’
나는 최서희가 내뿜는 전류들을 다시 바라봤다.
딱 봐도 강해 보이는, 엄청난 전압의 전류였다.
C급 헌터의 능력으로는 저 전류의 통제권을 가져오기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뭐라도 해 봐야지.’
오른팔이 다소 따가웠지만, 나는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최서희가 나를 다시 공격했다.
강력한 줄기의 전류가 내게 날아왔다.
나는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 날아오던 전류를 멈춰 세웠다.
“…….”
자신의 공격이 정지하자 최서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후우, 으윽.”
나는 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역시 쉽지 않네.”
지금의 내 수준으로는 최서희의 전류를 못 다루었다.
정면 승부보다는 차라리 다른 방법을 찾는 게…….
‘그냥 평소대로 싸워. 그리고… 너의 능력을 믿어.’
포기하려던 찰나, 문득 하세리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말 그대로 뜬금없이 떠오른 것이었다.
왜 떠올랐는지는 모르지만…….
“…평소대로.”
그 말이 떠오르자, 나는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포기하려고 했지만, 딱 한 번.
딱 한 번만 더 시도해 보고자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