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 * *
박유진이 하세리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에 가던 시각.
다른 세계의 어딘가에서 두 존재는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엔드리온, 그분과 아라고노트? 그, 뭐시기냐…….”
“거미와 암살의 신입니다, 저의 여신이여.”
“아, 맞아. 그분. 아무튼 그 두 분이 박유진의 한계선을 잠시나마 풀어 줬다고?”
“정확히는 풀어 준 게 아니라, 박유진에게 힘을 보탰습니다. 한계선을 넘은 건, 박유진 본인의 힘이었습니다.”
“오오, 일이 재밌게 흘러가네.”
여신이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진짜 신중히 결정해서 회귀시킨 남자라, 당연히 강할 줄은 알았지. 근데 인간의 한계선을 넘는 건 예상외인데?”
“저도 놀랐습니다. 두 신이 밀어줬다고 해도, 인간이 그 한계선을 넘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거 잘만 하면 기대 이상의 결과가 있을 수 있겠어.”
여신은 더욱더 크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괴수들의 신이 짜 놓은 이 거대한 판을… 그 남자 한 명이 잘만 하면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몰라.”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 하나가 해 봤자 얼마나 할지는…….”
“그렇게 말하는 너도 인간 출신이잖아. 그리고 말 편하게 해. 단둘이 있는데.”
“…알겠다. 그리고 방금의 말에 대답하자면,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는 다르잖아.”
남자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게다가 괴수들의 신. 그 신은 절대 만만한 신은 아닐 거야.”
“알고 있어. 하지만 승산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여신은 이 말과 함께 저 먼 곳을 바라봤다.
어딘가 저 먼 곳의 박유진은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큰 건 필요 없어. 그냥 아주 작은 변수만 하나 내면 끝이야. 우리들의 규율에 어긋나지 않는… 아주 작은 변수를.”
* * *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나는 정체 모를 공간에 있었다.
‘…동굴인가?’
아주 큰 동굴 안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동굴 안에 수많은 몬스터들이 있었다.
인간형부터 시작해 비인간형, 그리고 크기와 종류에 상관없이 온갖 몬스터들이 다 있었다.
‘…지구에 위치한 동굴인가?’
게이트 내부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이계 느낌은 없었다.
즉, 이 몬스터들은 지구의 어딘가에 위치한 동굴에 모여 있다는 것이었다.
‘대체 이런 곳에 왜 몬스터들이…….’
의문이 들었다.
만약 이게 꿈이 아니라면 몬스터들이 게이트를 벗어나 이곳에 모인 것이라는 뜻이었다.
비슷한 종족의 몬스터들이 그런 거면 모르겠는데, 이 동굴에는 전혀 연관성 없는 몬스터들이 모여 있었다.
적어도 내 지식으로는 그런 몬스터들이 존재하지 않은…….
‘어? 잠깐……. 저 몬스터는…….’
동굴을 둘러보던 중, 몬스터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익룡과 비슷하게 생긴 몬스터였다.
몸이 전반적으로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저렇게 생긴 몬스터는 하나밖에 없었다.
‘투프수아라? 하지만 저 몬스터는 분명…….’
내가 직접 사냥한 몬스터는 아니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저 몬스터가 나타난 시점이 내가 30대였을 때라는 것이었다.
즉, 회귀한 지금의 시점에 지구에 있을 수가 없는 몬스터였다.
‘내가 지금 미래를 보고 있는 건가? 아니면 설마… 회귀 전의 지구 어딘가를…….’
이상한 점을 눈치챈 뒤, 나는 동굴을 더더욱 자세히 살폈다.
그러다가 이내, 눈에 들어온 것이 하나 있었다.
이 동굴의 깊숙한 곳에 특이한 몬스터가 한 마리 있었다.
‘크라켄? 아니, 크라켄은 아니야. 뭔가 조금 더… 사람에 가까워.’
문어와 사람을 반반 섞은 듯한 외형.
그 몬스터는 손과 촉수를 뻗은 채,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몬스터의 시선을 따라갔다.
‘저건 뭐지?’
지구 곳곳의 장소들이 비춰지고 있었다.
유럽, 중동, 아마존 등, 세계 각지의 지역들이 환각처럼 공중에 비춰졌다.
그리고 그 몬스터가 손과 촉수를 휘두르자…….
‘음?’
공중에 비춰지던 장소에 게이트들이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이 바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 크… 키아야크… 아으르…….
정체 모를 언어로 무언가 말하는 몬스터.
그러자 화면에 비춰진, 방금 막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덩치가 더욱 커지는 등, 누가 봐도 그 몬스터들은 더 강해졌다.
‘이게… 무슨…….’
내가 뭘 보고 있는 건지, 나는 몰랐다.
하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저 문어처럼 생긴 놈이 게이트를 불러낸다. 그리고 몬스터의 힘을 멀리서 강화시킬 수 있다.’
일단 내가 본 바로는 그랬다.
다만 그 원리를 몰랐고, 애초에 이 몬스터가 뭔지 몰랐다.
처음 보는 형태의…….
‘아니, 잠깐만. 이 문어 대가리.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내가 보는 이 몬스터는 인간보다 훨씬 큰 사이즈였다.
하지만 뭔가 비슷한 녀석을 본 적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지금 보는 녀석보다 훨씬 작은 크기였다.
해 봤자 작은 강아지 크기의 몬스터였던 것 같다.
크기 차이가 꽤 있었지만, 두 몬스터는 분명 비슷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회귀 전에 처음 본 형태의 몬스터였어. 너무 어리고 약하게 보여서, 잠시 관찰하려고 놔두고 있었는데……. 그때 분명 도망을…….’
그래, 내 기억상으로는 그랬다.
그러니까 그때 그 몬스터가 이렇게 커진 것인가?
- 드베르그…….
- 드베르그!
- 드베르그. 드베르그.
속으로 생각하던 중, 갑자기 주위의 몬스터들이 일제히 한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의 발음이 부정확했지만, 얼추 유추할 수 있었다.
‘…드베르그?’
들어 본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났지만, 확실히 들었던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을 어디서…….
- 인간 측 최고의 척후인 네놈을 죽였으니, 드베르그 님께서 아주 좋아하시겠군. 네놈의 시체를 그분 앞으로 가져가마.
‘…아.’
기억이 났다.
회귀하기 전.
정확히는 회귀하기 직전.
나를 죽였던 몬스터.
인간의 말을 하던 그 몬스터는 분명 드베르그를 언급했다.
그리고 동시에 기억이 났다.
회귀하기 전, 내가 아주 작았던 드베르그를 처음 봤던 그때.
그 작은 몬스터는 자기 이름인 것처럼 ‘드베르그’라는 단어를 언급했었다.
‘드베르그. 이 몬스터가 설마… 회귀 전에 몬스터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원인인 것인가?’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내 본능이 그게 맞다고 말하고 있었다.
애초에 아무 이유 없이 지금 내가 이 꿈을 꾸는 게 아닌 듯했다.
분명 이유가 있었기에 이 광경을 보는 것일 터였다.
‘후후. 잘 봤어?’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다 들던 그때, 머릿속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귀할 때 들었던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내가 줄 수 있는 힌트는 여기까지야. 이걸 본 후에 네가 내릴 선택이 뭔지 모르겠지만……. 기대하도록 할게.’
이 말을 끝으로 내 시야가 점차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내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음?”
얼만지도 모를 시간이 흐른 후.
나는 다시금 눈을 떴다.
“여기는…….”
나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아까 최서희와의 경기가 끝난 후.
나는 하세리와 함께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 치료받은 후, 나는 하세리와 같이 숙소로 돌아와…….
“일어났구나. 몸은 좀 어때?”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어.”
나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하세리에게 대꾸했다.
숙소에 돌아온 후, 나는 약을 먹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몸이 많이 피곤했는지, 나는 그때 눕자마자 잠든 듯했다.
“나 몇 시간이나 잔 거야?”
“다섯 시간 정도?”
“그럼 슬슬 저녁이겠네.”
나는 이 말과 함께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하세리는 그런 나를 바로 다시 눕혔다.
“조금 더 쉬도록 해.”
“누나, 나 상처는 다 치료됐어. 아프거나 그러지는…….”
“상처는 다 나았지만, 아직 몸은 피로할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누워 있고, 이따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
“으음, 뭐. 알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나저나 최서희 쪽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어.”
하세리는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
“다음에 더 성장한 모습으로 이기겠다, 박유진은 지금의 나보다 훨씬 뛰어난 헌터다……. 대충 이런 말들을 하더라고. 그리고 최서현, 그 여자의 표정을 네가 봤어야 했는데.”
“특별한 일은 없었나 보네.”
“지금은 없지만, 앞으로는 있지 않을까?”
하세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 사람들은 전부 너를 한국 최강의 일렉트로 마스터로 알고 있어. 게다가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니까.”
“내가 뭐… 전 세계를 경악하고 놀라게 한 사람 된 건가?”
“진지하게 보자면, 진짜 그렇게 봐도 무방할걸?”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하세리는 이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지금 진짜로 다른 나라에서도 꽤 놀란 상태야. 네가 전류로 온갖 활용을 보인 것도 있지만, 아까 네가 최서희의 전류를 통제했잖아?”
“하긴, 그것도 사람들이 처음 보는 것이었겠네.”
일렉트로 마스터는 다른 일렉트로 마스터의 전류를 못 다룬다.
보통은 그게 상식이었다.
하지만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그 상식을 깨부수고 있었다.
‘…사실 알고 보니 내게도 재능이 있던 걸까?’
평생 내게 재능이 없는 줄 알았다.
그저 노력만으로 어떻게든 능력을 키운 건 줄 알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내게도 무언가의 재능이 있던 게 아닐까 싶었다.
뭐, 그건 그렇고.
“누나. 근데 지금 저녁이면… 우리 진작에 이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해야 되는 거…….”
“하루 더 연장했어. 네 몸이 이 모양인데, 어떻게 바로 서울로 올라가겠어?”
“상관없는…….”
“하루 정도 여기서 더 요양하고 가. 게다가 어차피 사찰국밥 측 사람들도 너를 보고 싶어 해서, 하루 더 있다가 가는 편이 더 좋을 거야.”
“…알겠어.”
단호하게 말하는 하세리에게 나를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와 이민아에게 하루 늦는다고 말해야겠네.”
“피곤하면 내가 대신 연락할까?”
“괜찮아. 몸이 피곤해도 전화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나저나… 뭔가 까먹은 느낌이었다.
분명 무언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듯한…….
“아, 그러고 보니 유진이, 너. 혹시 뭐 이상한 꿈이라도 꾸었어?”
“꿈?”
“응. 너 아까 잠자면서 무슨 이상한 잠꼬대를 하더라고.”
하세리는 의문인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드베르그? 이거였나? 아무튼, 이상한 이름을 막 부르는 것 같던데?”
“드베르그……. 그치. 드베르그. 그거였어.”
하세리의 말해 준 덕에 나는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내가 꿈에서 무엇을 봤는지 말이다.
‘단순한 꿈일 수도 있어. 하지만 꿈이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다면…….’
회귀 전, 내가 서른 살이 되던 해에 게이트의 출현 빈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동시에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이 훨씬 강해지기 시작했다.
당시에 나를 포함해, 그 누구도 원인을 밝혀낼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이 드베르그라는 몬스터가 그 원인이었다면…….
‘다음 할 일은 정해진 거네.’
그동안 착실히 강해졌고, 다양한 인맥들을 쌓아 놓았다.
어떻게 보면 밑 준비는 다 된 셈이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헌터로서의 일을 시작해 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