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 달라진 미리 】
최서희와의 대결을 끝으로, 여름 방학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그 후, 시간이 흘러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그래, 겨울 방학.
고연대학교에서의 2학기는 놀라울 만큼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서 시간은 매우 빠르게 흘렀다.
‘겨울 방학은 조금 더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던 듯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꽤 바쁜 삶을 보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헌터 협회의 소속원으로서 바쁘게 일하는 중이었다.
“오늘 게이트를 토벌하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어유, 아니에요. 오히려 박유진 씨 덕분에 훨씬 수월하게 끝냈어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박유진 씨가 먼저 게이트에 들어가서 길을 전부 외우고, 몬스터들까지 전부 파악해 주셔서…….”
“그러라고 있는 게 척후 아니겠어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후, 나는 고개를 돌려 방금 나온 게이트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경기도 성남시에 나타났다는 게이트.
게이트가 발생한 곳 근처의 길드에서 게이트 토벌에 나섰고, 나는 그 길드가 토벌하는 걸 돕기 위해 파견 나온 것이었다.
“박유진 씨는 바로 돌아가실 건가요? 혹시 길드장님을 뵙고 갈 거면, 제가 안내를 해 드릴 수 있어요.”
“괜찮아요. 게이트 토벌의 뒤처리를 하느라 바쁠 텐데, 따로 안 찾아가는 게 예의겠죠.”
나는 여자의 말에 차분히 대꾸했다.
“게이트 토벌은 마무리됐으니,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죠. 남은 뒤처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이후에 협회에 꼭 보고해 주세요.”
“네, 알겠어요. 오늘 고생했어요!”
“네, 수고하세요.”
나는 이 말을 끝으로, 한창 게이트 토벌을 마무리하는 길드에게서 멀어졌다.
‘도시 한가운데 나타난 게이트라 숨을 곳이 많네.’
나는 근처에 있던 골목길로 들어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왔지만, 이 정도는 내게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인간인지라, 그냥 빨리 일을 끝내고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신예진. 거기 있지?”
그러기 위해, 나는 일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자 하였다.
“예, 스승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근처의 그림자에서 신예진이 튀어나왔다.
“역시 제가 있는 걸 바로 알아차리네요.”
“대충 근처 그림자들 보면 감이 오거든. 아무튼, 내가 부탁한 건 잘 처리했어?”
“예, 여깄어요.”
신예진은 내게 종이 뭉치를 하나 건넸다.
“경기도 성남시의 ‘자독’ 길드. 그 길드가 빼돌린 예산안을 확보하고 왔습니다.”
“잘했어. 역시 실망시키지를 않네.”
“이 정도는 뭐, 어렵지도 않으니까요.”
내 칭찬이 기분 좋았는지, 신예진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스승님이 잘 가르쳐 주신 덕분에, 기척을 이제 완전히 지우고 이동할 수 있거든요.”
“완전히는 무슨. 너 아직 갈 길 멀었어, 인마. 그래도 뭐… 전보다는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한 뒤, 신예진이 가져온 자료들을 살폈다.
헌터 협회에서 받은 예산을 지난 5년간 어디로 빼돌렸는지 쓰여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올해 예산을 빼돌린 건 없던 거야?”
“그게 말이죠. 아무리 찾아도 올해 예산안을 못 찾아서…….”
“그럼 아마 길드장의 컴퓨터에 있겠네.”
나는 자료들을 다시 신예진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거 들고 먼저 북한산으로 돌아가.”
“네, 알겠어요.”
“그리고 오늘 고생했어. 도와줘서 고맙다.”
“아, 아니에요.”
신예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히려 이렇게라도 스승님을 도울 수 있어서 저는 기뻐요. 스승님 덕에 하루하루 암살자로서 성장할 수 있는데, 이렇게라도 도와드려야죠.”
“후훗. 알겠다. 아무튼, 얼른 돌아가서 먼저 쉬고 있어. 날씨 많이 춥다.”
“예!”
이 말과 함께 신예진은 다시 그림자 안으로 몸을 날리며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길드장실로 가자.’
나는 와이어를 근처 건물 옥상을 향해 던지며 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자독’ 길드 건물의 옥상에 도착했고, 나는 몰래 길드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네.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나는 길드장의 책상에 놓인 컴퓨터 쪽으로 갔다.
본체에 USB를 꽂은 뒤, 검퓨터를 작동시켰다.
매우 당연하게도 컴퓨터에는 비밀번호가 존재했지만, 내게는 전혀 문제 사항이 아니었다.
파지직.
나는 컴퓨터에 약간의 전류를 흘려보냈다.
그러자 나는 매우 손쉽게 컴퓨터를 해킹할 수 있었다.
‘좋았어. 올해 예산안 찾았고, 거기서 이 길드 사람들이 빼돌린 예산들은……. 오케이. 증거들 전부 저장 완료.’
원하는 걸 찾은 뒤, 나는 USB를 다시 챙기며 컴퓨터를 껐다.
“세리 누나가 아주 좋아하겠네.”
나는 조용히 길드장실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 * *
“역시. 유진아. 믿고 있었다고.”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날 저녁.
성남에서 복귀한 나는 바로 하세리를 찾아갔다.
신예진이 가져온 자료들과, 내가 직접 얻은 정보들이 담긴 USB와 함께 말이다.
“흐음. 그나저나 이 길드, 우리가 준 예산을 많이도 빼돌렸네.”
하세리는 내가 준 자료들을 읽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중징계를 때려도 문제없겠는데?”
“뭐, 그건 누나가 알아서 해.”
나는 근처 소파에 편하게 몸을 눕히며 말했다.
“후우우. 근데 누나도 참 대단하다.”
“뭐가?”
“나를 이렇게 쓸 생각은 대체 언제부터 한 건지.”
지난 여름 방학 때, 하세리는 나를 헌터 협회 18부서의 부서장으로 만들었다.
그때는 그냥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른 거라 생각했는데…….
“척후 헌터들 전용 부서라. 이런 부서를 만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있으면 좋잖아. 애초에 실력 있는 척후들만 있는 부서. 이런 부서가 하나쯤 있으면, 나중에 분명 쓸 일이 많을걸?”
“그걸 알면 좀 다른 부서원들 좀 구해 봐. 지금 거의 반년째 그 부서에 나 혼자만 있잖아.”
“너 졸업하는 대로 사람들을 구해 준다니까.”
하세리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에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근데 누나. 솔직히 이건 말이 척후 부대지, 사실상…….”
“응, 나도 알아.”
하세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18부서는 척후 부대야.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스파이 짓이나 하는 부서지.”
“감찰 부서지.”
“대체 어떤 감찰 부서가 이렇게 몰래 정보를 캐 오는 건데?”
“그냥 그렇다 치자.”
“그래, 뭐. 그렇다 치자.”
감찰.
그래, 내가 지난 반년 동안 고연대학교를 다니며 한 일이었다.
‘겉으로는 척후로서 파견. 하지만 사실은 그 길드에 몰래 잠입해, 빼돌린 예산의 행방을 알아 온다.’
헌터 협회 소속인 길드들은 매우 많았다.
그리고 협회는 그 길드들에게 매년 예산을 주었다.
하지만 그 예산을 사람들이 정직하게만 쓰지 않았을 터였다.
‘하세리는 몇 년 전부터 그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를 쓰기로 했지.’
뭐,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세리는 일을 매우 잘하고 있었다.
의심 가는 길드에 나를 파견하고, 내가 그 길드의 예산안을 몰래 가져온다.
간단한 방식이었고, 이 간단한 방식 덕에 지금까지 예산안으로 걸린 길드들만 약 스무 곳 가까이 되었다.
‘근데 참 피곤하단 말이지.’
스무 곳.
이건 즉, 내가 지난 반년 동안 갔다 온 곳만 스무 곳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내가 학업과 병행할 수 있도록 하세리가 최대한 배려해 줘서 학교 다니는 데 문제는 없었다.
그냥 피곤한 것이었다.
‘중간부터 신예진을 데리고 다니기 시작해서 일이 훨씬 편해지기는 했지만 말이야.’
참고로 하세리는 신예진에 대해 아직 몰랐다.
지금까지 모든 일 처리를 나 혼자 한 걸로 알고 있었다.
물론 언젠가 신예진에 대해 밝히고, 나중에 내가 속한 부서에 신예진을 데려올까 생각 중이었다.
“유진아, 너 피곤해 보이네? 요즘 내가 너를 너무 많이 굴렸나?”
“피곤하기는 한데, 굴려진 적은 없지. 게다가 굴려지더라도 일해야지. 왜냐하면…….”
“돈 많이 주니까?”
“엄청 많이 주니까 해야지.”
피곤하다고 불만을 표출하기에, 너무나도 많은 일당이었다.
이 돈을 받으면 일주일 내내 구르라고 해도 구를 자신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너 조만간 새집 구한다고?”
“반년 동안 돈이 좀 많이 쌓였으니까.”
게이트도 토벌하고, 하세리가 내린 업무들도 하고.
이런저런 일들을 하다 보니, 돈이 순식간에 쌓였다.
“전셋집 나가고, 조금 더 좋은 월셋집 하나 구해 보려고.”
“집을 아예 하나 사는 건 어때?”
“그러기에는 돈이 아직 부족하거든. 근데 이 추세로만 모은다면, 내년 말쯤에 가능할 거 같네.”
“누나가 돈 좀 빌려줄까? 이왕이면 집을 그냥 바로 하나 사지 그래?”
“됐어. 이런 일에 남의 손을 빌리고 싶지는 않거든.”
나는 대답과 함께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남은 일들은 잘 처리해. 나는 먼저 가 볼게.”
“으으음. 유진아. 혹시 오늘 저녁 먹으러 갈래?”
“누나, 또 이상한 분식집 같은 곳에서 저녁을…….”
“걱정 마. 이번에는 제대로 된 식당에 갈 생각이니까. 그리고 저녁 먹고, 괜찮다면 우리 집에 와서 술이나 마시고 갈래?”
하세리는 은근히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최근 들어 나와의 술자리를 꽤 즐기고 있는 듯했다.
원래 같았으면, 하세리의 이런 제안에 대해 생각을 했었을 터였는데…….
“미안, 누나. 오늘 저녁은 힘들 거 같아.”
“아, 그, 그렇구나.”
“그리고 나 내일부터 1박 2일로 좀 놀다 올 거니까, 나 괜히 찾으려고 하지 마. 알겠지?”
“응? 1박 2일로 놀다 온다고?”
“응. 내가 지난 달에 휴가 신청 미리 해 놨잖아.”
“어? 어어어, 그, 그러네?”
하세리는 서류들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근데 1박 2일이라고? 너 혼자 어디 갔다 오는 거야?”
“혼자는 아니고, 이민아와 갔다 오려고.”
“…민아 양과?”
“응. 여름 방학 때 약속했던 게 있거든.”
지난 여름 방학 당시.
내가 하세리와 같이 부산을 갔던 그때.
나는 이민아와 여름 방학 끝나기 전에 어디 놀러 갔다 오자고 했다.
하지만 여름 방학 때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단둘이 놀러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겨울 방학 때 같이 가기로 했고, 그 약속을 이번에 이행할 생각이었다.
“으음, 민아 양과 단둘이?”
“응. 그래서 유나는 아마…….”
“유진아. 내 권한이면 너의 휴가 취소쯤은 가능할 거라…….”
“누나. 제발 부탁인데 그런 짓은 하지 말아 줘.”
“…칫.”
하세리는 작게 혀를 찼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 같이 여행을 안 가면, 이민아는 삐지는 걸 넘어 진짜로 화낼지도 몰랐다.
다른 건 몰라도, 그런 일은 개인적으로 안 일어났으면 했다.
‘게다가 나도 간만에 요양이나 한번 해야지.’
개인적으로 이번 여행을 나도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쉬러 가는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여행 도중에 전투가 일어날 일이 없을 거라고… 이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몰랐다.
이민아와의 이 여행에서… 내가 드베르그를 그렇게 빨리 마주하게 될 거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