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 * *
“그러니까 네 말은 밤을 새우면서 술 마시자고?”
“왜?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니지.”
“그럼 뭐, 밤 못 새우는 거야? 근데 너 정도 체력이면 며칠 밤 새워도 큰 문제 없잖아.”
“그치. 체력적인 문제는 전혀 없지.”
“그럼 꺼리는 그 표정은 뭔데?”
“으으음.”
나는 뜸을 들이며 말끝을 흐렸다.
이민아와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그녀는 숙소에서 밤 새우면서 술을 마시자고 제안하는 중이었다.
‘사실 나는 큰 상관이 없기는 해.’
밤 새우는 건 전혀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이 검은색 반지를 얻은 후, 나는 절대 취하지 않는 몸이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술 마시는 걸 크게 신경 안 썼지만…….
‘문제는 이민아지.’
이민아도 술이 약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 마시다 보면, 안 취하는 나와는 달리 이민아는 무조건 취하게 될 거다.
그리고 이민아가 취하면, 그녀는 분명…….
“박유진. 너 왜 이렇게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거냐?”
“그런 게 있거든.”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이민아에게 술을 먹이고, 그녀를 곯아떨어지게 만들어서 재운 뒤…….
“너 나 먼저 재우고 다른 방 가서 잔다든가 하는 짓은 하지 마라.”
“그런 짓은 안 해, 인마. 그 돈 아까운 짓을 왜 하냐?”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이민아를 바라봤다.
“근데 이야기 나온 김에, 왜 나랑 같은 방을 쓰자고 여행 전에 그렇게 고집을 부린 거냐?”
“왜? 나랑 같은 방 쓰기 싫어?”
“그런 건 아닌데……. 뭐랄까, 남녀가 같은 방을 쓰는 건 뭔가…….”
“너 저번 여름 방학 때 하세리 헌터님과 같은 방 썼다면서?”
이민아는 새침하게 한마디 했고, 이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너 그거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내가 너에게 그걸 따로 말한 적이 없을 텐데?”
“세리 언니에게 따로 들은 거야.”
“…그 누나가 너에게 직접 말했다고? 아니, 그보다 너 언제 그 누나와 따로 만난 거고, 너는 왜 그 누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2학기 도중에 한 번 만났어. 그때 말 놓기로 하고, 너에 대한 이야기들을 좀 했어.”
“대체 언제 나 몰래 만난 거래.”
나는 또다시 헛웃음을 지었다.
이민아는 내게 가까이 붙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아무튼, 남녀가 같은 방 쓰는 건 유교의 도리에 어긋난다든가 하는 소리는 하지 마. 너는 진작에 세리 언니와 같은 방 썼으니까. 게다가 심지어 술 마시고 같이 침대에도 누웠다면서?”
“일단 같은 방을 쓴 거는 그 누나가 취해 버리는 바람에…….”
“아아아! 몰라! 안 들려! 아무튼 나랑 같이 술이나 마셔 줘. 그리고 도중에 어디 도망가지 말고.”
“…그래, 알겠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근데 이민아와 같은 방에서 술 마시면… 결국 일어날 일이 일어나겠지.’
뭐, 그래도 이제 슬슬 내 과거를 제대로 마주할 때가 되기는 했다.
내가 가진 이 트라우마를 언제까지 그냥 놔둘 수만은 없었다.
그렇기에 이번 기회에, 한번 다시 그것을 마주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아무튼 얼른 숙소로 돌아가자. 날씨도 추운데, 계속 밖에 있으면 감기 걸린다.”
“에이, 감기는 뭔 감기냐?”
“너는 그렇겠지. 늑대인간 유전자 때문에 몸에 열이 많으니까.”
“그치. 그리고 너는 그 코트 때문에 안 춥지 않냐?”
“나도 알아, 인마. 감기는 그냥 해 본 말이지.”
나는 이민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민아의 말대로, 나는 딱히 춥지 않았다.
이 네메이아의 코트는 항상 내게 최적의 온도를 제공해 줬으니 말이다.
“그래도 추운 곳보다는 따뜻한 곳이 낫잖아. 편의점에서 술이나 사서 얼른 들어가자.”
“안주는 뭐 살까? 아까 보니까 근처에 정육점 하나 있던데, 거기서 날고기를…….”
“좀 정상적인 것 좀 먹자, 인마. 게다가 나는 날고기 못 먹는다고.”
나는 어이없다는 투로 이민아에게 말했다.
그렇게 나와 이민아는 숙소 쪽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
원래 같았으면 이대로 숙소에 돌아가, 조용히 남은 여행을 즐겼을 터였다.
그랬을 텐데…….
- 키에에에엑!
어디선가 들려온 이질적인 포효.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와 이민아는 자리에서 멈춰 섰다.
“박유진. 방금 그건…….”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 거 같다.”
나는 포효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포호 근처에 보이는 작은 산.
그 산 중턱에서 들려온 몬스터의 포효.
“이 근처에 게이트가 하나 나타난 것 같네.”
늦은 저녁에 나타난 게이트였다.
만약 저 게이트를 놔두면, 거기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와 주변에 상당한 피해를 입힐 것이 뻔했다.
“이상하네. 보통 게이트가 언제 어디서 나오는지 전부 예측하고, 그 앞에 헌터들을 미리 배치시키지 않나?”
“보통 게이트라면 그렇게 하지. 보통은 말이지.”
나는 회귀 전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내가 30대에 들어선 이후, 그때부터 게이트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에 달라진 건 게이트의 출현 빈도만이 아니었다.
‘출현이 예측 안 되는 게이트들도 그때부터 막 생겨나기 시작했지.’
원래라면 게이트가 언제 출현하는지 예측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예측을 못 하게 되니, 그때부터 게이트에 의한 피해가 상당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근데 그런 종류의 게이트들은 분명 10년 정도 뒤에 본격적으로 나타나는데, 왜 벌써…….’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그 의문에 대해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이 근처에 나타난 게이트가 보통 게이트가 아닌가 보네.”
나는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자바니아를 꺼내며 말했다.
“자, 얼른 가 보자.”
“가다니? 어디를?”
“저 게이트에 가야지. 저기서 지금쯤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고 있을 텐데, 어서 가자 정리하자.”
“…우리가?”
“그럼 우리지, 누구겠냐?”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고, 이에 이민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근처에도 길드가 있지 않을까? 그 길드원들이 알아서 하지…….”
“저 게이트가 예측 가능했던 것이었으면 진작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겠지. 하지만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들린 걸 보니까 저 게이트 앞에 아무도 대기 안 하는 거겠지.”
“그렇기는 한데…….”
“그냥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들만 정리하고 오자. 게이트 안에 들어가서 잡는 건, 근처 길드에서 하라고 하고.”
“으음, 뭐…….”
이민아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우리가 명색이 헌터인데, 할 일은 해야겠지?”
“사람들 다치지 않게, 몬스터들을 빨리빨리 처리해야지.”
나는 벨트에 와이어를 차며 말했다.
“출발하자. 몬스터 울음소리를 들으니까 대충 저쪽인 것 같다.”
“알겠어. 으으음. 아, 근데 기껏 꾸미고 왔는데…….”
이민아는 아깝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결심한 표정으로 늑대인간의 폼으로 변했다.
“후우우. 가자.”
“좋아. 빨리 끝내자.”
이 말을 끝으로, 나는 와이어를 근처의 나무를 향해 던졌다.
나는 그대로 앞으로 날아갔고, 이민아는 그런 나를 따라왔다.
* * *
“이 몬스터들……. 뭐야?”
“약한 몬스터들이지.”
나는 자바니아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말했다.
게이트 앞에 도착한 뒤.
나와 이민아는 게이트에서 튀어나오던 몬스터들을 빠르게 처리했다.
빠르게 처리할 수 있던 이유는 이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들이 생각 이상으로 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민아는 몬스터를 다 잡았음에도 무언가 찜찜하다는 표정이었다.
“이 몬스터들……. 약한 것도 약한 건데, 전부 처음 보는 몬스터들이야.”
“…그러네.”
나는 바닥에 쌓인 몬스터들의 시체를 바라봤다.
몬스터들은 전부 해양 생물과 인간을 섞은 듯한 외견을 하고 있었다.
“처음 볼 만한 몬스터들이기는 하네.”
“너는 이 몬스터들 뭔지 알아?”
“…아예 모르는 건 아니지.”
나는 자바니아를 단검집에 넣으며 말했다.
이 몬스터들을 확실히 본 적은 있다.
근데 문제는…….
‘이 시점에서 이 몬스터를 아는 건, 이 세상에서 나밖에 없을 거야.’
그도 그럴 게, 이 몬스터들은 약 10년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몬스터들은 사라도켈이라는 몬스터의 수족들이야.”
“사라도켈?”
“거대한 거북이라고 생각해. 아마 이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일 거야. 그리고 이 기괴한 해양 생물들은 사라도켈이 낳은 아이들이고.”
이 게이트에 대해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이 게이트는 회귀 전의 내가 직접 처리한 게이트였다.
상당히 약한 몬스터들로 이루어진 게이트라, 당시 A급 헌터였던 내가 순식간에 끝내는 게 가능했었다.
‘당시에 인력이 워낙 부족해서 그냥 나 혼자 빠르게 끝내고 오라고 보냈었지. 뭐,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딱 하나였다.
바로 이 게이트에 드베르그가 있었다는 것.
회귀 전, 말했듯 내가 30대 무렵에 이 게이트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즉, 원래는 10년 정도 뒤에 나타났어야 할 게이트였다.
나는 그렇게 예상했었기에, 10년 뒤에 나타날 이 게이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때 본 그 꿈이 개꿈이 아니라면, 드베르그를 반드시 죽이는 게 맞으니까.’
나는 근처에 있는 게이트를 바라봤다.
10년 뒤에 이 게이트가 나타나면, 내가 어떻게든 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직접 드베르그를 찾아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게이트가 내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아직 다른 헌터들은 이 게이트의 출현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것은 하나였다.
“이민아. 너 잠깐 기다려. 나 이 게이트 안에…….”
“박유진. 이 게이트, 지금 당장 들어가야 할 것 같아.”
“음?”
“뭔가… 내 본능이 말해 주고 있어. 이 게이트 안에 당장 들어가서… 이 안의 무언가를 죽여야 한다고……. 내 본능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어.”
“…후훗.”
나는 피식 웃었다.
이민아의 그 본능은 늘 그렇듯 꽤 잘 들어맞았다.
“잘됐네. 나도 때마침 이 게이트 안에 들어갈 생각이었거든.”
“응? 진짜?”
“응. 그런 의미에서 같이 들어갈까? 이 게이트는 그렇게 수준이 높은 게이트는 아니니까, 우리 둘이면 금방 끝낼 수 있을 거야.”
“그럼… 바로 들어가자. 내가 정면에서 시선을 끌 테니까…….”
“내가 측면에서 공격할게. 평소대로 하는 거야.”
“좋았어! 그럼 바로 들어가자!”
이민아를 선두로 우리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들어가면서 마음을 확고히 먹었다.
회귀 전과 같은 미래를 바꿔 보자고 말이다.
* * *
한편 같은 시각.
다른 세계의 어딘가.
“이 망할 여신이.”
괴수들의 신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중얼거렸다.
“드베르그를… 내 위대한 수하가 될 그 주술사는 10년 뒤에 인간 세상에 나타났어야 했는데……. 그걸 앞당겨? 게다가… 게이트를 박유진 근처에 소환하다니…….”
그는 주먹을 쥐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들 사이의 규칙을 아예 신경을 안 쓰는구나. 그렇다면… 앞으로 나 또한 네놈들의 그 규칙을 신경 안 쓰도록 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