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 * *
“그러니까… 박유진, 네가 말하는 걸 정리하자면, 이 껍질을 가루로 만들고… 네 장비들 위에 코팅하라고?”
“정확히 이해했네.”
“흐으음.”
내 요청에 하윤경은 턱을 매만졌다.
“근데 이 껍질……. 무슨 몬스터에게서 가져온 거야? 처음 보는 재료인데.”
“사라도켈이라는 몬스터에게서 가져왔지.”
“사라도켈?”
“처음 듣는 몬스터일 거야. 아무튼, 이 껍질이 어떤 물건인지는 잘 알겠지?”
“으음, 잠깐만.”
하윤경은 사라도켈의 껍질 일부를 근처의 기계에 가져갔다.
그 기계가 껍질을 스캔하더니, 이내 옆의 모니터에 분석 결과표가 나타났다.
“오오, 이거 꽤 귀한 재료인데. 이 성분이라면 어지간한 충격은 다 흡수를…….”
“어, 꽤 귀한 재료지. 그래서, 내 장비들 위에 코팅할 수 있겠어?”
“성분 분석을 조금 더 해야 할 것 같네. 그리고 코팅하려면 네 장비들도 한번 분석해 봐야 할 텐데…….”
“가져가.”
나는 내 코트와 군화, 그리고 단검을 하윤경 쪽으로 넘겼다.
“분석하고, 최대한 코팅해 줘. 하지만 장비들 안 망가지도록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알겠냐?”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나는 이래 보여도 뛰어난 과학자다. 너는 나를 대체 뭘로 보는…….”
“연약한 어린아이로 보이지, 뭘로 보이겠냐?”
“이 개새끼가.”
하윤경은 나를 노려보며 내 자바니아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것만 할 수 있을 뿐.
그녀는 단검으로 내게 어떠한 해코지도 할 수 없었다.
“크큭. 그래도 전보다는 태도가 많이 유해졌네. 너도 이 생활이 슬슬 익숙해졌나 봐?”
“익숙해지기는 개뿔. 이곳에 감옥처럼 갇혀서 네 노예생활 하는 게 뭐가…….”
“내가 널 죽이지 않고, 고문도 안 한 걸 다행으로 생각해. 네가 한 짓들을 생각하면, 이런 생활은 너에게 아주 사치니까.”
나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됐고. 얼른 내가 시키는 거나 해.”
“내가 언젠가 탈출을…….”
“너는 그 소리를 반년 가까이 했지만, 전혀 진척이 없었잖아. 이제 슬슬 포기하고, 평생 내 노예로 살 준비나 하는 건 어떠냐?”
“나는 노예 따위가 될 생각이…….”
“어서 가서 내가 시킨 거나 해.”
내 손에 끼워진 반지에서 빛이 났다.
그러자 하윤경은 욕을 중얼거리며, 내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근데 다 하는 데 얼마나 걸릴 거 같냐?”
“성분 분석 더 하는데 시간이 걸릴 거야. 거기다 코팅하는 데 시간도 걸릴 거고.”
“그래서 얼마나 걸리는데?”
“빠르면 세 시간, 늦어도 다섯 시간 정도로 예상하고 있어.”
“…역시 실력 하나는 좋기는 좋네.”
나는 피식 웃었다.
회귀 전, 코팅 작업을 하윤경이 아닌 다른 연구자들에게 맡겼다.
그 사람들 당시에 그 모든 작업을 하는 데 열흘 가까이 걸렸다.
그러나 하윤경은 혼자서 그 모든 작업을 다섯 시간 내에 끝낼 수 있다고 선언했다.
‘미친년이기는 하지만, 저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
나도 여러 종류의 암살 의뢰를 처리하기 위해 과학 쪽의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하윤경이 얼마나 대단한 천재인지 더 잘 알았다.
내가 겨우겨우 이해한 지식들이 하윤경에게는 기초 중의 기초였다.
‘안 죽이기를 잘했어.’
물론 하윤경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기는 했다.
하지만 터지지만 않는다면, 내게 있어 엄청 유용한 카드였다.
“아, 맞다. 하윤경.”
“응? 왜?”
“네가 전에 괴수들의 신…이라는 존재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지?”
“들었지. 아주 어렸을 때.”
“그때 그 존재가 너에게 무슨 말들을 했고, 그때부터 네가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말했지?”
“맞아. 근데 그 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내는 거냐?”
“…혹시 너 괴수들의 신에 대해 아는 게 있어?”
“음?”
내 질문에 하윤경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신에 대해 아는 게 있냐고? 글쎄.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그 신이 내게 무엇을 말했는지 기억이 안 나.”
“아무것도?”
“응, 아무것도. 그 신의 목소리가 들린 후, 그냥 인류를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야겠다는 생각만이 내 머릿속에 남았어.”
“그러냐?”
나는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은 했지만, 하윤경은 이쪽에 대해 아는 게 없어 보였다.
“그나저나 그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낸 거야? 너 전에는 이 이야기를 그냥 개소리라고 넘겨 듣지 않았냐?”
“그랬었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개소리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냐?”
“있어. 있는데, 설명하기 귀찮다. 됐고, 얼른 가서 내가 시킨 일이나 해.”
반지를 통해 명령을 내리자, 하윤경은 한숨을 쉬며 아래층의 연구실로 내려갔다.
그렇게 하윤경이 가자…….
“신이요?”
하윤경의 지하 연구 시설의 거실.
그곳에 나와 신예진, 단둘이 남게 되었다.
“스승님은 신의 존재를 믿으시나 봐요?”
“원래는 안 믿는 쪽이었는데, 최근에 믿기 시작했어.”
“오오, 의외네요.”
“뭐가?”
“뭔가 스승님은 신을 안 믿을 줄 알았거든요.”
“그러니까 말했잖아. 원래는 안 믿었다고.”
나는 신예진 곁에 가 앉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신의 존재를 안 믿는 거냐?”
“저는 안 믿는 쪽이죠. 하지만 스승님이 믿는다면, 저도 믿는 쪽으로…….”
“됐어, 인마. 그렇게까지 하지 마.”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근데 아마… 조만간 너도 신의 존재를 믿게 되지 않을까 싶다.”
“왜요?”
“그와 관련된 일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거든.”
근거는 없었지만, 내 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조만간 괴수들의 신, 그 존재와 관련된 어떠한 사건이 일어난다고 말이다.
“뭐, 그건 그렇고. 요즘 잘 지내고 있냐? 최근에 얼굴에 안 본 지 좀 된 거 같은데.”
“저는 평소처럼 지내고 있었죠. 가끔 밖으로 돌아다니고, 윤경이 감시하고, 스승님이 가르쳐 준 것들 연습하고…….”
“진짜 평소처럼 지내고 있었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하윤경이 만들어 준 단검은 잘 쓰고 있냐?”
“네, 잘 쓰고 있죠.”
신예진은 허리에 걸려 있던 단검을 꺼내 들며 말했다.
“잘 베이고, 손에도 잘 맞아요.”
“내가 가르쳐 준 단검술은 잘되고 있고?”
“네, 전보다는 더 나아진 것 같아요. 물론 스승님 같은 단검술 고수에게는 거기서 거기로 보이겠지만요, 헤헤.”
“뭐, 나중에 너가 쓰는 걸 직접 보면 알겠지. 그리고 단검술 고수는 뭔 고수냐. 진짜 고수를 만나 보면 그 생각이 달라질 거다.”
애초에 암살자로서의 나의 아이덴티티는 단검보다는 와이어에 있었다.
나는 와이어를 이용한 엄청난 기동성으로 승부를 보는 타입이었으니 말이다.
“조만간 또 가르쳐 줄게.”
“네, 스승님.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 이틀 전에 게이트를 혼자 토벌하고 오셨다면서요?”
“혼자는 아니고, 이민아와 같이 하고 왔지.”
“그래도 대단하시네요. 두 명이서 게이트 하나를 완벽히 토벌하다니.”
“별것 아니었어. 애초에 그렇게 위험한 게이트도 아니었거든.”
그나저나 이민아와 같이 강원도에서 게이트를 토벌하고 온 것도 벌써 이틀 전이었다.
원래는 멋대로 게이트에 들어가는 건 아무리 헌터라도 금지였다.
하지만 강원도의 그 게이트는 출현 예측이 안 된 게이트였다.
예외적인 상황이었기에, 협회 쪽에서도 그냥 적당히 넘어갔다.
‘게다가 하세리의 인맥도 한몫했지.’
아무튼, 이틀 전의 있었던 게이트 일은 얼추 마무리가 되었다.
물론 드베르그가 죽은 것, 그리고 그때 내가 쓰러지면서 어떤 여자와 이야기한 것.
그와 관련된 문제들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스승님. 이민아 씨와 유나 양은 오늘 뭐 하나요?”
“옷 사러 갔어. 이민아가 유나에게 옷 사 준다고 데려가더라.”
“아, 그래서 오늘 여기 온 거군요?”
“그치. 혼자 집에서 할 것도 없고, 아까 그 등껍질 봤지? 그거 하윤경에게 전달해 줘야 해서, 겸사겸사 들른 거지.”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그러고는 이내 신예진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따 우리 같이 저녁이나 먹으러 갈래? 이민아와 유나는 늦게 들어온다고 했거든. 혼자 먹기는 또 심심해서 그런데…….”
“좋죠. 당연히 좋죠. 그럼 어디 가서 뭐 먹을까요, 스승님?”
“그건 이제부터 정해야지. 무난하게 고깃집이라든가…….”
“아, 스승님. 윤경이도 같이 데려갈까요?”
“하윤경을? 으음, 근데 쟤는 데리고 나가기 좀 위험한데.”
“그래도 사람을 계속 한곳에 두면 미쳐 버릴지도 몰라요. 가끔은 밖에 데려가야 하지 않을까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하윤경을 오래 써먹으려면, 그녀가 망가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아무래도 가끔에 밖에 데리고 가는 편도 나쁘지는 않을…….
“음?”
속으로 생각하던 중, 갑자기 내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확인해 보니, 하세리에게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누나? 무슨 일이야?”
- 무슨 일이냐고? 너 지금 서울 밖이야? 아니면 무슨 지하에 있는 거야?
“뭐, 지하기는 한데…….”
- 빨리 뉴스 확인해 봐. 그리고 빨리 협회 쪽으로 달려와. 지금 조금이라도 많은 전력을…….
“누나, 진정해.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봐. 무슨 일인데?”
하세리는 매사에 침착한 사람이라 어지간하면 이성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하세리는 누가 봐도 침착함을 잃은 상태였다.
그녀가 침착함을 잃는 상황은 회귀 전부터 지금까지 통틀어서 꽤 적은 편이었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 지금 서울 중앙에 X나 큰 게이트가 나타났어. 무슨 빌딩 크기의 게이트가 나타났다니까.
“…뭐?”
빌딩 크기의 게이트?
그런 건… 회귀 전에도 본 적 없었는데?
* * *
“이민아. 유나는 너희 길드에 맡기고 왔지?”
- 응. 아마 어지간해선 유나는 다치는 일 없을 거야. 그나저나, 너 지금 그 커다란 게이트 쪽으로 가고 있다고?
“지금 가고 있어. 너도 오는 중이지?”
- 용혈 길드 사람들과 가는 중이야.
“알겠어. 이따 보자.”
나는 이민아와의 전화를 끊은 뒤, 나를 따라 뛰어오던 신예진에게 말했다.
“너는 내 근처에 숨어 있어. 내가 부르면 그때 나서 줘.”
“예, 스승님.”
이 말과 함께 신예진은 근처의 그림자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앞을 바라봤다.
“…미치겠네.”
서울역 바로 위쪽의 상공.
그 상공에 게이트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게이트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컸다.
내가 지금껏 봐 온 게이트들 중에서 가장 큰 게이트는 해 봤자 5m였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의 게이트는 보통의 빌딩들보다 훨씬 컸다.
“전부 대피하세요!”
“지하 대피소로 얼른 이동하세요! 힐러들! 몇 명은 전선에서 이탈하고 대피소로 가! 대피소에서 부상자들 치료해!”
- 크워워워!
- 카아아악!
게이트도 게이트였지만, 게이트에서 튀어나오는 수많은 몬스터들도 문제였다.
덩치가 크고, 딱 봐도 강해 보이는 몬스터들.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이 계속 게이트에서 나와, 사람들을 공격하는 중이었다.
서울역에 모인 헌터들은 몬스터들을 막고, 시민들을 대피시켰지만, 그럼에도 일이 쉽게 흘러가는 것 같지 않았다.
“유진아!”
“세리 누나.”
“잘 왔어! 때마침 네가 필요했어.”
하세리는 거대한 화염을 소환해, 몬스터들을 다량으로 쓸어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몬스터들이 계속 게이트에서 나오고 있었다.
“같이 저 게이트 입구 쪽으로 가서, 전류를 계속 날려 줘. 지금 나를 포함해서, 광역 공격이 가능한 헌터들을 전부 저 앞으로 모이게 하는 중이야.”
“입구에 광역으로 공격을 날려서, 아예 몬스터들을 못 나오게 하려고?”
“맞아. 일단 강력한 화력을 중심으로…….”
하세리는 산발이 된 머리를 한 채로 내게 빠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세리는 설명을 끝맺지 못했다.
왜나하면… 게이트에서부터 갑자기 엄청나게 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하하하하! 인간들이 발버둥 치는 꼴이 벌레 같구먼! 하하, 자! 나, 다곤은 위대하신 분의 명에 따라 이곳에 나타났다! 그러니 인류여! 두려움에 떨도록 해라!”
들어 본 적도 없는 언어가 게이트로부터 울려 퍼졌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 언어를 완벽히 이해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런 듯했다.
그리고…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목소리의 주인……. 괴수들의 신인가 하는 놈과 관련이 있나 보네.’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거기다가, 저 다곤이라는 놈을 내가 쓰러뜨려야만 한다는… 그런 생각도 같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