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 * *
다른 세계의 어딘가.
괴수들의 신은 신전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이번은 그 세계에 잘 도착했겠지?”
“방금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위대하신 분이여.”
괴수들의 신 옆에 있던 한 남자가 말했다.
“와이번 님은 방금 지구에 도착해 차원의 틈을 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 알겠다. 그리고 나의 명령을 그에게 잘 전달했겠지?”
“물론입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차원의 틈들을 지속적으로 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그 공간을 확장해 나갈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류의 수를 줄여 나갈 것. 이 기본적인 임무에 대한 설명은 했고…….”
“박유진에 관한 건?”
“그것도 당연히 했습니다. 인류를 몰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박유진이라는 인간의 죽음. 그게 훨씬 중요하다는 설명 또한 했습니다.”
“알겠구나.”
괴수들의 신은 왕좌에 앉은 채 신전 밖을 바라봤다.
대한민국의 수원.
그 도시의 상공에 거대한 게이트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박유진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는 다곤을 혼자서 쓰러뜨렸지.”
“예, 그렇습니다. 물론 다른 신들의 힘을 받았기에 가능했던 거지만, 인간 따위가 신을 쓰러뜨린 거는…….”
“보통 일이 아니지. 장기적으로 봤을 때, 박유진을 최대한 빨리 없애는 편이 나을 거다.”
괴수들의 신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 명부 신들을 몇 번 더 보낼 수 있지?”
“신들의 규율에 따르면, 아마 와이번 님을 포함해 네 번을 더 보낼 수 있을 겁니다.”
“네 번. 만약 와이번이 실패한다면 앞으로 세 번 더 보낼 수 있겠구나.”
“와이번 님과 다곤 님을 제외하면, 현재 남은 명부 신은 다섯 분입니다. 그분들 중 세 분을 미리…….”
“아니, 됐다. 그런 건 와이번이 실패한 후에 생각하도록 해라.”
“맞는 말씀입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곤님은 명부 신들 중에서 가장 약한 분인 것도 있었지만, 동시에 그는 박유진을 상대로 방심했습니다.”
“와이번에게 확실히 말해 놨겠지, 메이라?”
“예, 박유진에 대해 경고를 확실히 했습니다.”
메이라라 불린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게다가 박유진이 다곤 님을 쓰러뜨렸다는 것을 와이번님 도 알고 있었습니다. 신을 쓰러뜨린 인간이니, 와이번 님은 방심은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모르는 거지. 와이번은 강하지만, 그의 성격이 발목을 잡을 수도 있으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건 저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그러니 우리는 그저 와이번이 성과를 내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겠구나.”
괴수들의 신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인류를 지구에서 몰아내는 건, 명부 신 한 명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박유진이 있는 한,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 그러니… 박유진을 최대한 빠르게 죽이는 것을 우선하도록 해라. 알겠냐?”
“예, 알겠습니다. 와이번 님이 실패하면 다른 명부 신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해라. 물론 와이번이 실패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괴수들의 신은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는 이내 하윤경의 모습이 들어왔다.
“예전에 했던 심어 놨던 씨앗을… 한번 거두어 볼까.”
* * *
“하윤경, 내 장비들 다 준비됐지?”
“얼추 다 됐다.”
하윤경은 내게 코트와 단검을 건네며 말했다.
“급하게 한 거라 완벽히 코팅이 되지는 않았어. 나중에 다시 돌아오면 마저 해야 할 거야.”
“그럼 나중에 마저 부탁할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나는 코트를 걸치고, 자바니아를 허리에 착용했다.
“신예진, 아까도 말했지만 너는 몬스터들만 상대해. 신은 나 혼자서 상대할 거니까.”
“…네, 스승님.”
“좋아. 그리고 하윤경. 너는 신에 대한 연구를 빠르게 끝내 놓도록 해.”
“신에 대한 연구라면…….”
“인류의 진화를 위한 너의 그 연구 말이야.”
나는 나갈 준비를 빠르게 끝내며 말했다.
“최악의 경우, 내가 너의 그 연구를 이용해야 할지 몰라. 그러니까 미리 빠르게 준비해 놓도록 해, 알겠지?”
“하지만 그건 하루 안에 준비할 수 있는 게…….”
“그냥 최대한 빨리 해 놔.”
다곤은 어찌어찌 이겼지만, 이번에 상대할 신도 이길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니 비장의 수 하나쯤은 빠르게 준비해 놓아야 했다.
“나도 너의 그 연구를 이용하기는 싫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으니까.”
“알겠다. 네가 내린 명령이라면 나는 결국 따를 수밖에 없는…….”
하윤경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근데 그녀가 말하던 도중.
“…으읏?”
하윤경은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이내 주저앉았다.
“하윤경? 괜찮아? 신예진. 아래층에 가면 파란색 포션이 있을 텐데, 그걸…….”
“머리가…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뭐라고? 목소리?”
하윤경의 머릿속에서 들릴 만한 목소리.
그 목소리라면 딱 한 명의 존재밖에…….
“…으으. 아니다. 이제 괜찮아.”
“괜찮은 거 맞냐?”
“어, 괜찮으니까, 신예진. 포션 가지러 가지 마.”
상황을 파악하려던 중, 하윤경은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아직 어지러운지 그녀는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네가 시킨 거는 전부 해 놓을게. 그러니까 얼른 가 봐.”
“하지만 하윤경. 너 방금 목소리가 들렸다고 했는데……. 네 머릿속에 들릴 만한 목소리는 괴수들의 신 말고는 없지 않…….”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네가 나에게 내린 명령을 전부 할 테니까, 얼른 출발해. 괜히 늦어서 사람들 죽는 거 구경하지 말고.”
“…이상한 짓 하지 마.”
나는 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그러니까 하윤경을 통제하는 반지를 확인했다.
그 반지에게서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즉, 하윤경은 진짜로 뭐 수상한 짓을 꾸미는 게 아니었다.
‘근데 뭔가 불안한데.’
마음 같아서는 하윤경을 붙잡고 추궁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당장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수원의 상공에 거대한 게이트가 나타났고, 그 게이트에서 지금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고 있다는 소식을 방금 들은 참이었다.
“…신예진, 가자.”
“네, 스승님.”
그 게이트와 관련된 일을 막는 게 우선이었다.
하윤경과 관련된 일은 이후에 하는 게 맞았다.
물론… 내가 이번에 살아 돌아올 수 있다면 말이다.
* * *
수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도시는 아수라장이었다.
그도 그럴 게, 수많은 몬스터들이 게이트에서 계속 나와 도시를 박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은 다름 아닌…….
“뭔 드래곤들이 이렇게 많은 거야?”
엄청난 수의 드래곤들이 상공을 날아다니며 공격하고 있었다.
수원에 모인 헌터들이 드래곤들을 잡으려고 했지만, 하늘을 날아다니기 때문인지 놈들을 쉽게 못 잡고 있었다.
“…아, 와이번들인가?”
자세히 보니, 드래곤이라고 하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았다.
드래곤은 와이번들을 통솔하는 거대한 개체들이고, 와이번은 크기가 작은 놈들이었다.
“맞아, 와이번들이야.”
“아, 세리 누나.”
“아직 드래곤의 모습은 안 보이고 있어.”
언제 다가온 건지, 하세리는 상당히 지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이번 게이트에서는 드래곤과 와이번들이 나오는 거 같아.”
“곤란하네.”
“그치. 곤란하지. 와이번들처럼 날아다니는 몬스터들은 언제나 상대하기 까다로우니까.”
하세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혹시 저 거대한 게이트에서… 이번에도 신의 기운이 느껴진다든가 그래?”
“응, 느껴져.”
나는 수원의 상공에 나타난 커다란 게이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 이 와이번들을 다 처리하면 모습을 드러낼 거 같아.”
“그렇단 말이지……. 후우우.”
내 말에 하세리는 잠시 숨을 내쉬더니 이내 통신 장비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현 시간부로 시민들의 대피에 집중할 것. 와이번들과의 교전보다 시민들을 빠르게 대피시키고, 전원 대피가 완료되면 내게 보고하도록. 이상.”
지시를 내린 후, 하세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내게 지었다.
“간만에 날뛸 수 있겠네.”
“음? 뭐라고?”
“지상에서 난동 피우는 몬스터들을 상대로는 쉽게 못 날뛰지만… 저렇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놈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거든.”
* * *
“시민들의 대피는 전부 끝난 거죠? 네, 네…. 좋아요. 그럼 이제 헌터들도 전부 도시에서 빠져나오게 하세요.”
약 20분 뒤.
하세리는 다른 헌터들에게 통신을 받았다.
“전부 대피한 거야?”
“그렇다고 하네. 지금 수원의 사람들은 전부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대.”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아무튼…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려고?”
사실 하세리가 뭘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회귀 전에도 날아다니는 몬스터들을 자주 상대한 덕분이다.
그래도 나는 일단 모르는 척을 하며 물었다.
“저 날아다니는 와이번들을 한 번에 다 잡기는 힘들어 보이는데.”
“후훗. 너는 아직 누나를 잘 모르는구나.”
하세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날아다니는 것들을 잡는 게, 내 입장에서 훨씬 쉬워.”
나와 하세리는 현재 수원의 중앙 쪽에 위치한 전망대의 꼭대기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전망대 옥상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 키에에엑!
- 쿠워워!
수원의 상공을 날아다니는 수십 마리의 와이번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몇 마리는 나와 하세리를 발견해 공격해 왔지만.
화르륵.
파지직.
나와 하세리는 불과 전기로 그 와이번들을 바로 추락시켰다.
“그래서 누나. 여기서 와이번들을 한 마리씩 요격하게?”
“한 마리씩 언제 다 하니. 한 번에 잡아야지.”
이 말과 함께 하세리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거대한 규모의 화염이 수원의 상공을 뒤덮었다.
- 키아아악?!
- 케케엑?!
화염의 푹풍은 수원의 상공을 거의 완전히 뒤덮었다.
엄청난 열기의 화염으로 인해 수십 마리의 와이번들이 순식간에 지상에 추락하기 시작했다.
“…누나, 이 정도로 강했구나.”
나는 이마에 흐르던 땀들을 닦았다.
화염의 열기 덕분에 근처의 건물들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만약 내가 입은 네메이아의 코트가 아니었으면 나 또한 꽤 심각한 화상을 입지 않았을까 싶었다.
“내가 괜히 한국 최강의 화염술사라고 불리는 게 아니거든.”
하세리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고, 이에 나 또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지금이나 그때나, 광역기로는 이 누나가 최고라니까.’
S급이 안 된 것뿐이지, 화염의 위력이나 조정의 섬세함만 보면 A급 이상이었다.
내가 괜히 하세리를 고평가하는 것이 아니었다.
“…얼추 다 없앤 거 같네.”
잠시 뒤, 하세리는 불길을 거두었다.
그녀의 말대로 수원의 상공을 날아다니던 와이번들이 거의 다 사라져 있었다.
“몇 마리 남았지만, 그건 다른 헌터들에게 맡겨야지. 그러니 나는 조금 쉬고 있을게.”
“고생했어.”
“어우……. 이렇게 생각 없이 불길을 불러낸 것도 오랜만이네.”
하세리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확실히 지친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들을 다 없앴으니, 저 게이트 안으로 진입해야겠지?”
“아마 저 게이트에는 나밖에 못 들어갈 거야.”
“알아. 그리고 혼자서 신을 상대하겠지?”
“그래야지. 나 말고는 못 하는 일이잖아.”
“지금 바로 갈 거야? 너 지난번에 와이어 고장 났다면서. 그거라도 받고…….”
“그럴 시간이 없을 거 같단 말이지.”
나는 거대한 게이트의 입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뭔가 지금 바로 싸우러 가야 할 거 같거든.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될 거 같다는 느낌이…….”
- 아주 잘 파악했어. 그것도 아주 잘 파악했네.
말하던 도중, 게이트에서 정체불명의 언어가 들려왔다.
그러나 다곤 때와 마찬가지로, 그 언어가 어째서인지 이해가 되었다.
- 박유진, 네가 안 왔으면 네가 올 때까지 이 도시를 박살 내고 인간들을 계속 죽일 생각이었거든. 뭐, 그래도 네가 왔으니 당장은 그런 파괴적인 짓은 안 할게.
“…온다. 누나, 못 싸울 거 같으면 건물 안으로 일단 피해서…….”
- 물론 당장 안 한다는 거지. 결국 인류와 인류의 문명을 전부 박살 낼 거니까.
이 말과 함께 게이트에서 초록색 와이번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긴 거는 다른 와이번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차이점이라면 덩치가 조금 더 크다는…….
“…엇?”
분명 그 와이번은 몇백 미터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 거리를 1초 내로 좁혔다.
거의 순간 이동과도 같았다.
“무슨…….”
“인간의 아이여. 나는 다곤처럼 쉽지는 않을 거야.”
초록색 와이번은 이 말과 함께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나를 붙잡은 채 그대로 지상으로 낙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