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유진아!”
하세리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힘을 많이 쓴 그녀가 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쾅!
“커억.”
엄청난 높이에서 나는 수직으로 떨어졌다.
원래 같았으면 죽었어야 할 높이에서 떨어진 것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살아 있는…….
“오, 그래도 신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라 그런지… 몸이 튼튼하기는 하구나?”
“으, 으윽.”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죽지만 않았을 뿐이지, 방금의 추락으로 인해 온몸의 곳곳이 망가졌다.
하지만 당장은 그 고통을 참아야 했다.
“그쪽이… 으윽……. 이번에 온 명부 신…….”
“맞아. 명부 신, 와이번이라고 해.”
자신을 소개한 와이번.
와이번은 지상으로 내려오더니 이내 변신하기 시작했다.
초록색 와이번에서… 초록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키 큰 여자의 모습이 되었다.
“최초의 와이번이자, 모든 와이번들의 조상. 그리고 너를 죽일 신이지.”
“글쎄요. 저는 죽을…….”
“죽을 거야.”
“…어?”
분명 와이번은 나와 10m 이상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 내 옆에 나타났다.
내가 반응도 못 할 정도로 빠르게 이동한 것이었다.
“위대하신 분의 명령을 나는 반드시 완수할 거니까.”
와이번이 내 곁에 다가온 걸 인지하자마자 나는 바로 자바니아를 꺼내 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틈도 없이 와이번은 내 허리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아으윽.”
와이번의 주먹을 맞고 나는 그대로 근처 건물을 향해 날아갔다.
“으으, 저건 또 뭔…….”
벽에 워낙 세게 맞은 탓에 온몸이 아팠다.
그래도 코트의 방어력 덕에 어찌어찌 정신 줄은 붙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왜 이렇게 빠른…….”
“나는 명부 신들 중에서 가장 빠른 신이거든.”
“어?”
분명 나와 꽤 떨어져 있었을 터인 와이번이 또다시 내 옆에 나타나 있었다.
‘순간 이동은 확실히 아니야.’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동안 와이번은 내게 달려왔다.
방금 그 광경을 내 두 눈으로 확인했다.
“크윽?”
와이번은 다시 내게 주먹을 날렸다.
이에 나는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그녀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았다.
‘힘 자체는… 다곤보다 약해.’
하지만 다곤보다 약한 거지, 와이번의 근력 자체는 상당했다.
그리고 애초에 와이번의 근력은 지금 전혀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사라졌어?’
와이번의 주먹을 막던 중, 그녀는 또다시 사라졌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내 등 뒤에서 말이다.
“커억.”
와이번은 내 등을 걷어찼고, 나는 그 공격을 맞고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빠르네요.”
“말했잖아. 나는 명부 신들 중에서 가장 빠른 존재야. 그리고 신들에서도 내 속도를 따라잡을 자는 얼마 없어.”
“그런 것 같네요.”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던 터라 지금 몸 상태가 많이 위태로웠다.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쉽게 쓰러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버텼다.
‘기회를 노리자.’
아직 와이번에 대해 파악한 게 많지 않았다.
일단 탐색전을 간단히 한번 해 보는 편이 좋을 듯했다.
“그나저나 인간 모습으로 변하는 건 드래곤들의 특권이라고 알고 있는데, 와이번이시면서…….”
“나는 최초의 와이번이자, 혼자의 힘으로 신의 자리까지 오른 존재야. 이미 드래곤의 수준은 진작에 넘어섰지.”
“그렇군요. 근데 어째 인간으로 변한 모습이…….”
“너는 말이 쓸데없이 많네. 뭐, 보나 마나 시간을 끌려고 하는 거겠지.”
와이번은 피식 웃으며 나를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봤다.
“다곤에게 통했을지 모르지만, 그런 단순한 수작은 내게 안 통해. 다곤, 그 멍청이는 인간 따위에게 방심하고 전력을 다 안 했겠지.”
“오, 와이번 님은 다른가 보네요?”
“다르지. 나는 진심을 다해 너를 이길 생각이니까. 그러니까 절대 방심할 생각 없어. 위대하신 분의 명령을 반드시 완수해야 되거든.”
“위대하신 분이라면… 역시 그 ‘괴수들의 신’인가 하는 분인가요?”
“그렇지. 위대하신 분, 모든 괴수들의 창시자, 그 위대하신 분의 성함은… 으음? 잠깐.”
와이번은 말하다 말고 나를 노려봤다.
“으읏. 머리 좀 썼네, 박유진. 내 페이스를 흐트려 놓고, 내 스스로 귀중한 정보를 털어놓게 만들려고 하다니. 다곤이 방심할 만했네.”
“…네? 아니, 저는 머리를 쓴 게 아니라, 그냥 그쪽이 혼자서…….”
“시, 시, 시끄러워! 너의 그 뻔한 수법은 통하지 않아! 나는 명부 신, 와이번. 너의 그 세 치 혓바닥에 내가 놀아날 거 같아?!”
“…….”
이미 놀아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굳이 그걸 언급하지 않았다.
‘일단 어떤 성격인지 조금은 알 것 같네.’
아직 와이번에 대한 걸 완벽히 파악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 성격을 이용할 수는 있을 듯했다.
“너… 너 왜 아무 말이 없어? 너 지금 감히 명부 신인 나를 상대로 무슨 생각을…….”
“에이, 아니에요. 제가 위대하신 와이번 님을 상대로 감히 무슨 허튼 생각을 하겠어요.”
“으흠, 당연히 그래야지. 명부 신 중에서도 위대한 내가… 으으음……. 야. 너 방금 어째 비꼬는 거 같았다? 아니, 너 나 비꼰 거 맞지? 맞지?”
“아니라니까요. 제가 어떻게 감히 와이번 님을 비꼬겠어요?”
“바, 방금도! 너… 이……. 박유진! 인간 따위가 나를 놀려?!”
“허허, 아니라니까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내 검은색 반지를 매만졌다.
와이번의 주의를 끄는 것과 동시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와이번 님. 지금 그 인간 모습 말이에요.”
“내 인간 모습?”
“그거 혹시 다른 인간을 모방한 건가요?”
“아니, 이 모습은 순전히 내 스스로가 만든 인간의 모습인데……. 그건 갑자기 왜?”
“다름이 아니라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요.”
“예, 예쁘다고?”
내 말에 와이번의 눈동자가 떨리는 등, 그녀는 살짝 동요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슬슬 움직일 준비를 했다.
“네, 솔직히 제가 만나 본 여성들 중에서 가장 예쁜 편에 속하거든요.”
“크흠……. 흐음……. 으음……. 다, 당연한 말을 하네. 나는 신의 자리까지 올라간 존재야. 당연히 아름다워야지.”
“그렇군요. 제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나는 말하던 도중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손가락 끝에서 거미줄들이 튀어나와 와이번을 향해 날아갔다.
“거미줄?”
와이번은 내가 날린 거미줄들을 손쉽게 피했다.
하지만 와이번이 피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애초에 나는 와이번을 노리고 거미줄을 날린 것이 아니었다.
“…이건 뭐냐? 거미줄 맞지?”
“네, 거미줄이죠.”
와이번 주위로 설치된 수많은 거미줄들.
와이번이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정도였다.
“…특이하네.”
와이번은 자신의 손을 거미줄에 가져갔다.
그러자 손이 거미줄에 결렸고, 와이번은 거미줄을 떼어 내는 데 몇 초의 시간을 소비했다.
“이게 신에게서 받은 힘이야?”
“그렇지. 거미와 암살의 신에게서 받은 거죠.”
나는 대꾸를 하며 거미줄 위로 도약했다.
아직 완벽히 숙달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거미줄 위를 전보다 편하게 뛰어다닐 수 있었다.
“거미와 암살의 신이라면… 아라고노트 님인가? 하긴, 그분은 전부터 필멸자들에게 꽤 관대했던… 읏?”
나는 와이번을 공격했다.
이에 와이번은 내 공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거미줄에 몸이 걸렸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가슴을 향해 단검을 내리찍었다.
“…피부가 튼튼하시네요.”
“물론이지. 나는 신이니까.”
공격 자체는 통했다.
그러나 상처가 그리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작은 조각칼로 매우 두꺼운 가죽을 찌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공격이 통하면… 승산이 있어.’
와이번의 가슴에 칼날이 아주 약간 들어갔고, 그 상처에서 푸른색 피가 흘러내렸다.
물론 와이번의 피부가 너무 두꺼워서 문제였지만…….
‘그러면 그 피부를 뚫어 버리면 그만이야.’
나는 자바니아를 거두고, 엔드리온의 조각에 전류를 흘려보냈다.
그리고 전류를 자바니아에 전부 집중시켰다.
‘한 번에 끝낸다. 아니, 끝내지는 못하더라도 치명상 하나는 남기자.’
나는 와이번의 심장을 향해 다시 자바니아를 내리찍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와이번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웃고 있었고… 그녀의 눈빛은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것도 와이번의 동공을 한 채로 말이다.
“으윽?”
그리고 그 순간, 엄청나게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를 뒤로 날려 버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었다.
“…뭐지?”
멀리 나가떨어진 나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거미줄에 걸린 와이번에게 다시 다가가려고 했지만 바람 때문에 앞으로 못 나아갔다.
“내가 고작 빠르다는 이유만으로 신이 된 게 아니거든.”
“윽?”
더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그 바람은 와이번 주위의 거미줄을 전부 끊어 버렸다.
문자 그대로, 칼날과도 같은 바람이었다.
“…쳇.”
나는 거미줄을 다시 와이번을 향해 날리려 했다.
하지만 와이번은 같은 수법에 두 번은 안 당했다.
내가 움직이려고 하자 그녀는 순식간에 내게 다가왔다.
“윽.”
“그래도 칭찬할 건 칭찬할게. 방금 너의 공격은 꽤 위협적이었어.”
와이번은 나를 넘어뜨린 후 내 위에 올라탔다.
그런 후, 그녀는 허리에 있던 단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만약 내가 방심했으면 너에게 제대로 당했을 거야. 근데 말한 것처럼, 나는 다곤처럼 방심할 생각이 없거든.”
“그것참… 으윽……. 아쉽네요.”
나는 와이번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두 무릎이 내 양쪽 팔을 세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로 인해 나는 바닥에 눕혀진 채 아무것도 못 했다.
“후후, 귀엽네. 다른 신들도… 이 맛에 인간에게 사랑은 느끼는 건가?”
와이번은 단검을 내 목에 가져가며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박유진. 하나만 물어볼게.”
“뭐죠?”
“너, 그… 크흠……. 그… 나 아까 예쁘다고 한 건 말이지? 그거… 지, 진심으로 한 말이야? 아, 그, 무, 물론 신경 쓰이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 그냥 구, 궁금해서! 궁금해서 묻는 거야!”
“…아, 네, 뭐…….”
“그, 그 표정 뭐야?! 나, 나를 비웃는 거냐?! 인간 따위가 감히 신인 나의 질문에…….”
“네, 네. 뭐…….”
일단 반격의 기회를 붙잡아야 했다.
그렇기에 당장은 와이번에게 맞춰 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외모가…….’
나는 와이번을 바라봤다.
초록색 머리카락, 푸른색 눈, 그리고 새하얀 피부까지.
여신과도 같은 아우라가 느껴졌고, 그 모습에…….
“…아름답네.”
나는 나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말 그대로 본의 아니게, 아주 작게 중얼거린 거였는데…….
“…그, 그래! 다, 당연하지! 당연히 내가 아름답다고 느, 느, 느껴야지!”
와이번은 내 눈을 피한 채 태연한 척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꼬리가 조금씩 움직이는 게 아주 명백히 보였다.
“으음……. 내, 내가 아름다운 거면…….”
와이번은 단검을 거두며 망설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위, 위대하신 분께 문의할까? 영혼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내 남편으로 만드는 거면… 어쩌면 될 것 같기도 하는…….”
와이번은 무슨 알 수 없는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기회가 살짝 보였다.
‘와이번이 방심한 이 틈을 이용하면…….’
나는 서서히 움직일 준비를 했다.
근데 그 순간.
“남편 같은 소리 하네! 이 도마뱀 새끼가!”
근처의 그림자에서 신예진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