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 * *
“스승님. 계획대로만 하면 되는 거죠?”
“응, 계획대로만 하면 될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대한 게이트를 올려다봤다.
“와이번은 너의 공격이 통할 거라고 아예 생각조차 안 하고 있을 거야. 그 점을 최대한 이용해야지.”
“네, 그럼… 저는 먼저 숨어 있을게요.”
“응, 부탁할게.”
신예진은 근처 그림자 안으로 몸을 던지며 사라졌다.
그렇게 나는 혼자 남은 채 수원 상공에 나타난 거대한 게이트를 바라봤다.
‘이 방법이 통해야 될 텐데.’
와이번은 빨랐다.
아마 지구상에 그녀의 속도를 따라올 존재는 거의 없을 터였다.
사실상 나와 신예진, 우리 둘이 뭔 짓을 해도 와이번을 속도에서는 못 이겼다.
그러니 비겁하게 싸워야 했다.
‘때마침 신예진도 암살자네.’
비겁하게, 암살자답게 와이번을 상대해야만 했다.
‘기회는 딱 한 번.’
무조건 성공하기를 기도해야 했다.
그리고 속으로 이런 생각들을 하던 중.
“여어어! 박유진! 또 왔네?”
거대한 게이트에서 초록색 와이번이 나타나 내 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게 당했으면서 스스로 다시 오네. 다른 건 몰라도, 너의 그러한 점은 칭찬할게.”
“저의 그러한 점이 정확히 뭐죠?”
“그러게. 으음……. 용기? 아니면, 인류를 위한 사명감? 뭐, 그런 것들 있잖아. 너의 그러한 점들은 칭찬한다고.”
“뭐, 칭찬이니까 일단은 기쁘게 받아들이죠.”
나는 피식 웃으며 자바니아를 꺼내 들었다.
이에 와이번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며 나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너는 아직도 싸울 생각이냐? 몇 시간 전에 내게 그렇게 털리고서?”
“싸워야죠. 저 말고 대신 싸워 줄 사람도 없고, 제가 안 싸우면 인류는 그대로 끝이니까요.”
“인류가 끝나는 게 뭐 어때서?”
와이번은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인류가 너를 위해 뭘 해 준 적이 있냐? 단순히 그냥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싸워 주는 거 아니냐?”
“그 정도 이유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으음, 글쎄다. 그리고 뭐, 이참에 다시 한번 제안할게.”
와이번은 무언가 꽤 욕심내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항복해. 그리고 내 밑으로 들어와. 그럼 내가 위대하신 분께 잘 말해서 네 목숨을 살리고, 내 곁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해 줄게.”
“그럼 저는 이참에 다시 한번 거절하죠. 저는 절대 그쪽의 밑에 가지 않을 거예요.”
“하, 거참. 이해가 안 된다니까.”
와이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에게 있어 인류가 그렇게 소중하냐? 게다가 영원히 살 수 있다니까? 인간처럼 늙거나, 병들거나 그런 거 없이, 영원히 젊음을 유지한 채로…….”
“늙거나 병드는 게 뭐 어때서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인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이라고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 동료들, 친구들, 그리고 제 가족. 그건 절대 포기 못 해요.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저는 끝까지 싸울 거니까요.”
“…그럼 강제로 굴복시켜야겠네.”
와이번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너를 내 노리개로 만들고, 그 상태의 너를 네 소중한 사람들 앞에 데려가는 것도 꽤 재밌을 거 같은데.”
“허, 진짜 악질이시네요. 근데 말이죠. 대체 왜 저를 굴복시킨다느니, 노리개로 만든다느니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애초에 저를 왜 그렇게까지 생포하려고 하는…….”
“시, 시끄러워! 네가 알 것 없어.”
“…설마 제가 지난번에 그쪽을 아름답다고 한 것. 그것 때문에 제게 반했다거나, 제게 뭐 이상한 욕망을 품었다거나 하는…….”
“다, 다, 닥쳐!”
와이번은 상당히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허, 허, 헛소리로 내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 생각이지?! 그, 그런 거라면 성공했어! 무, 물론 방금 네가 한 말은 헛소리라는 것이…….”
“에휴, 뭐. 대화는 이쯤 하고… 슬슬 다시 싸우죠.”
나는 내 주위로 전류를 불러냈다.
“그쪽이 인류를 무너뜨리려면, 일단 저부터 무너뜨려야 할 테니까요.”
“크큭. 너 따위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바로 무너뜨릴 수 있어.”
“할 수 있으면 해 보세요.”
이 말과 함께 나는 와이번에게 전류를 날렸다.
물론 와이번은 쉽게 피했지만, 전류는 그저 눈속임.
진짜는 내 거미줄들이었다.
“쳇. 또 이상한 것들을 설치하네.”
“뭘 새삼스럽게 그러나요.”
나는 근처 건물들을 향해 거미줄들을 날렸다.
수많은 거미줄들이 근처에 촘촘히 설치되었다.
“진짜 의미 없는 짓을 하네. 어차피 저 거미줄들은 내 바람으로 전부 날려 버리면 그만이야!”
“알아요. 이 거미줄들이 있으면 그쪽이 저를 못 이길 테니까요.”
“뭐? 야, 이딴 거미줄 있어도 너쯤은…….”
“에이, 못 이기잖아요. 그쪽도 그걸 아니까 이 거미줄들을 없애려는…….”
“허, 어이가 없네. 이딴 거미줄들 안 없애도 너쯤은 쉽게 잡는다니까!”
“그럼 잡아 보세요.”
나는 거미줄 위에 올라타 그 사이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와이번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와이번은 거미줄 사이로 몸을 날려 나를 따라왔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바로 거미줄에 걸렸다.
“에라이, 뭔 거미줄이 이렇게 끈적거리는…….”
혹시나 해서 한번 도발해 봤는데, 역시 와이번은 내 예상대로 도발에 걸렸다.
아무래도 성격 자체가 도발을 쉽게 당하는 타입이었던 거 같다.
“박유진! 너 잡히면 그냥은 안 끝날 줄 알아!”
“그 말은 일단 저를 잡고 하시죠.”
“내가 너를 붙잡지 못할 것 같… 끼아악?!”
나는 거미줄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와이번에게 전류를 세게 한 방 날려 줬다.
거미줄과 사투하던 와이번은 내 공격을 정면으로 맞고 나가떨어졌다.
“속도만 빠르나 보네요. 힘이라거나 방어력은 평범하고.”
“으으으……. 너! 귀엽다 귀엽다 봐주니까, 슬슬 기어오르네?!”
바로 몸을 일으킨 와이번은 다시금 내게 달려왔다.
그 속도는 역시 상당히 빨랐다.
“…아이씨! 이 거미줄들이!”
하지만 엄청난 속도의 와이번도 빽빽한 거미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거미줄들을 피해 내게 달려오려고 했지만 나는 거미줄들을 꽤 촘촘히 설치했었다.
그걸 전부 피해서 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크큭, 또 걸리셨네요.”
“너 이쪽으로 당장… 크에에엑?!”
“제가 그쪽으로 왜 갑니까?”
나는 멀리 자리잡은 채 와이번에게 전류를 날렸다.
내가 능글스럽게 웃으며 약 올리자, 와이번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거미줄을 전부 날려 버리면…….”
“아, 역시 거미줄을 날려 버리지 않고는 못 이기는 거군요.”
“…너, 이 인간 따위가! 야! 거미줄 있어도 너쯤은 잡는다고!”
와이번은 힘으로 거미줄을 뜯어낸 후, 다시금 내게 달려왔다.
하지만 나는 여유롭게 자리를 옮겼고.
“으아아아! 이 거미줄들이!”
와이번은 또다시 거미줄에 걸렸다.
그렇게 나는 거미줄에 걸린 와이번에게 또다시 전류를 날렸다.
“으윽? 진짜 벌레 새끼처럼 싸움을……. 으으, 잠깐만. 근데 너 어디 다쳤냐? 어째 전기가 어제보다 좀 많이 약한 거 같다?”
“나중에 큰 한 방을 위해 힘을 아끼는 거죠. 크큭.”
“허, 참 나. 감히 나를 상대로 힘을 아껴?!”
와이번은 거미줄을 끊어 내며 내게 다가왔고 나는 재빨리 와이번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나저나 저걸 알아채네.’
신예진에게 신의 기운을 나눠 준 탓에, 내가 와이번에게 입힐 수 있는 피해의 위력이 반감했다.
와이번은 그 사실을 생각보다 빨리 알아차렸다.
‘근데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중요한 건 큰 한 방.
그 한 방을 위해 나는 슬슬 와이번을 유인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와이번의 인내심에 한계가…….
“더 이상 못 참아! 거미줄이고 뭐고! 일단 너부터 잡아야겠어!”
…온 듯하다.
와이번의 포효와 동시에 근처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지난번에도 내 거미줄들을 날렸던, 칼날과도 같은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이번에도 내 거미줄들을 전부 끊어 버렸다.
“각오해, 박유진! 내 손에 잡히면, 너는 오늘 밤 저 게이트 안에서 나와…….”
“네네. 일단 저부터 잡고 말씀하세요.”
나는 이 말과 함께 빠르게 근처의 좁은 골목 안으로 뛰어갔다.
골목길 안쪽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바로 곳곳에 거미줄들을 날렸다.
그리고 와이번은 나를 쫓아 골목길에 들어서자마자,
“아아아악! 박유진! 거미줄 좀 그만 날려!”
또다시 거미줄에 걸렸다.
그녀는 이번에도 거미줄들을 끊어 내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이번에는 남은 거미줄들을 모조리 털어 냈기 때문이다.
거미줄들의 양이 상당했기에 와이번은 그 많은 거미줄들을 바로 끊어 낼 수 없었다.
“자, 그럼…….”
나는 자바니아를 꺼내 들면서 엔드리온의 조각에 전류를 흘려보냈다.
“끝낼까요?”
나는 전류를 자바니아에 집중시킨 뒤, 칼날을 와이번의 목을 향해 내리찍었다.
만약 이 공격이 통했다면 와이번을 죽이거나, 죽이지 못하더라도 심각한 치명상을 입혔을 터였다.
하지만 내 예상대로…….
“끝내기는 누가 끝난다는 거야?”
“…으윽.”
1초도 안 되던 찰나의 순간.
와이번은 바람으로 거미줄을 전부 끊어 낸 뒤, 내 공격을 피했다.
아니, 피한 것뿐만이 아니라 아예 내 손목을 붙잡았다.
“드디어 붙잡았네, 박유진.”
“아윽?”
내 손에서 단검을 쳐 낸 뒤, 와이번은 나를 바닥에 눕혔다.
그 상태로 그녀는 내 위에 올라탔다.
“너 각오하도록 해. 나를 이렇게까지 고생시킨 거……. 이따가 저 게이트 안에서 몸으로 갚아야 할 거야.”
“흐음……. 그거 말이 야하게 들리는 게, 제 착각은 아니죠?”
“시, 시끄러워. 아무튼 각오해. 너의 몸과 영혼을 전부 굴복시키고, 너를 위대하신 분 앞으로 끌고 갈 거니까.”
“쉽지 않을 거예요. 제 정신력이 생각보다 좋거든요. 그나저나…….”
나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와이번을 올려다봤다.
“이 상황에서도… 그쪽은 꽤 예쁘게 보이네요.”
“…다, 다, 닥쳐! 너! 그 혓바닥으로 또 수작 부리려는 거지?!”
와이번은 얼굴이 붉어진 채로 외쳤다.
“내, 내가 네 수작에 넘어갈 거 같아?”
“제 칭찬을 꽤 좋아하는 반응인데, 이런 칭찬 더 해 드릴까요?”
“됐어! 아, 아니… 그, 시, 싫다는 건 아닌데……. 지, 지금은 하지 마! 이따가 저 게이트 안에서 나와 단둘이…….”
“네네. 알겠어요. 이따 저 게이트 안에서, 단둘이 알콩달콩? 이걸 원하시는 거죠?”
“….으, 으, 으응, 뭐…….”
“근데 말이죠.”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를 저 게이트 안으로 데리고 가기 쉽지 않을 거예요.”
“쉬울 거 같은데? 내게 이렇게 제압당한 순간 너는 끝난 거야.”
“뭐… 꼭 그렇지만은 않죠.”
와이번의 시선이 완전히 내게 쏠린 것을 확인한 후.
나는 근처의 그림자를 손가락으로 네 번 두들겼다.
그러자 근처의 그림자에서 신예진이 튀어나와 와이번의 목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