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다음 신을 잡을 때 하세리를 데리고 가라.
그 말을 끝으로 거대한 거미와 푸른 빛의 여자는 사라졌다.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지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방금 만난 엔드리온과 아라고노트는 신이었다.
그리고 아마 신들은 이 상황에 대한 정보들을 많이 갖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그 두 신에게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내가 뭘 묻기도 전에 그 두 신은 사라졌다.
“하아, 나도 모르겠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아.”
몸에 힘이 안 들어갔다.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이는 상태였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닐 듯하네.’
내 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건 몸이 스스로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기다려야겠네.”
나는 내 옆에 쓰러져 있는 주하나를 슬쩍 바라봤다.
확실히 그녀는 죽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엄청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주변에 우리를 위협할 만한 요소는 없는 거 같으니까…….’
상황을 파악한 뒤, 나는 온몸의 힘을 빼 버렸다.
‘주하나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지.’
내가 못 움직이니 주하나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침착하게 주하나가 깨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긴장을 완전히 풀지는 말자.’
당장은 주변에 위협이 없지만 언제 어디서 무언가가 나타날지 몰랐다.
여차하면 전류를 불러내 주하나를 지켜 줘야 했다.
‘주하나가 나를 살려 줬는데, 이번에는 내가 지켜 주는 게 맞겠지.’
나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주하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이내 내 몸을 살폈다.
‘근데 나를 진짜로 살렸네.’
이건 너무나도 놀라웠다.
사실 내 상태는 말 그대로 시체, 즉, 죽은 것에 가까웠다.
살아 있는 게 이상한, 죽어야 하는 게 맞았다.
근데 주하나는 그런 나를 치료해 냈다.
“대단하네, 진짜로.”
아까 엔드리온은 이런 말을 했다.
주하나는 사실상 죽은 사람을 살려 낸 거라고 말이다.
나는 그 말에 백번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신의 힘을 빌려서 나를 살려 낸 거라고 했었지, 아마?’
신의 힘.
지난번에 신예진은 신의 힘을 이용해 그림자를 조작했다.
거기다 나도, 몇 시간 전에 신의 힘을 빌려 행성의 자기장을 조정했다.
즉, 신의 힘으로 기존의 능력을 강화하는 게 가능한 듯싶었다.
‘주하나도 그랬나 보네.’
근데 신의 힘을 빌렸다고 해도 주하나는 그래도 상당히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이었다.
이건 엔드리온도 인정한 사실이었다.
신의 힘을 이용한 것이었지만 사실상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나를 살려 냈다.
엔드리온의 반응을 보니 이건 신이라도 꽤 힘든 일인 듯싶었다.
“…보면 볼수록 대단하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주하나를 계속 바라봤다.
내 목숨을 또다시 살려 준 하연 머리의 힐러.
큰 빚을 지게 됐으니 이 빚을 전부 갚는 데 조금 오래 걸리지 않을까 싶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이 신의 힘이라는 거… 참 대단하네.”
확실히 인간의 상위 존재의 힘이 맞는 듯했다.
이 힘은 인간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게 해 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애초에 내가 신들과 싸울 수 있는 것도 이 신의 힘이 있던 덕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내게 있어 이 힘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힘이 마음이 안 들었다.
‘남의 힘에 의존하는 게 영 취향이 아니란 말이지.’
이 신의 힘은 분명 강력한 것이 맞았다.
하지만 문제는 이건 빌려온 힘이라는 것.
순수한 나의 힘이 아니었다.
‘만약 이 신의 힘을 회수당하면 나는 약해지겠지.’
언젠가 잃을지도 모르는 힘은 너무나도 불안정했다.
그렇기에 나는 순수히 내 힘만으로 강해지고 싶었다.
‘아무래도 하윤경과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네.’
빌리는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나 스스로 적들에게 대항할 힘을 하나 만들어 내야만 했다.
물론 이 문제는 지금 당장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하아아. 일단 조금 쉬든가 해야지.”
뭐가 어찌 됐든, 당장의 전투는 끝났다.
토스카를 쓰러뜨렸고, 동시에 게이트의 핵까지 손에 넣었다.
…아니, 손에 넣은 거 맞나?
분명 게이트의 핵을 내가 주하나에게 줬던…….
‘아, 저기 잘 있네.’
근처에 잠든 주하나.
그녀의 품에서 빛나는 게이트의 핵을 찾을 수 있었다.
아무튼, 게이트의 핵까지 손에 넣었으니 이번 일은 결과만 보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이었다.
그래, 결과만 놓고 보면 그랬다.
“…X나 아프기는 하네.”
주하나가 나를 치료했다고는 하지만 정확히는 내 목숨을 간신히 유지시킨 것에 가까웠다.
아직 내 몸 상태가 좋다고 하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었다.
‘돌아가서 제대로 치료받든가 해야지.’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주하나가 깨어나면 그녀에게 조금 더 치료받은 뒤, 이 망할 세상을 탈출하면 될 것 같았다.
“근데… 진짜로 내가 해냈네.”
나는 있는 힘을 끌어내 내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는 상처투성이가 된 내 오른손을 바라봤다.
여러모로 못생긴 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손이었다.
“행성의 자기장을 조작하다니……. 이게 진짜로 되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신의 힘의 유무와 상관없이, 나는 오늘 전보다 몇십 배는 강해진 것이었다.
* * *
“후우우.”
시계가 없어서 시간은 확인 못 했지만, 느낌상 약 두 시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그리고 기다리느라 슬슬 지칠 때쯤.
“어? 으으으.”
주하나가 눈을 뜨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뭐야? 여기는……. 나는 분명…….”
“주하나 씨. 괜찮으세요?”
“어? 박유진 씨? 어어어… 아!”
주하나는 이제야 뭔 상황이었던 건지 생각난 듯했다.
“박유진 씨! 몸은요? 몸 괜찮아요? 제가 급한 대로 치료하고 탈진한 건 기억나는데, 혹시 그 후로…….”
“일단 죽게 될 일은 없을 거 같네요.”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근데 주하나 씨. 지금 제 몸에 힘이 아예 안 들어가는…….”
“아, 그렇군요! 박유진 씨.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주하나는 몸을 일으키더니 내 곁에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바로 내 곁에 쓰러졌다.
“어? 왜…….”
“주하나 씨, 괜찮으세요?”
“네, 그게… 그냥 몸에 힘이 안 들어가네요.”
“그럴 만도 하죠.”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를 치료하느라 힘을 많이 쓰셨을 테니까요. 주하나 씨는 사실상 죽은 사람을 살려 낸 거나 마찬가지예요.”
“후훗, 네, 그렇죠. 박유진 씨를 살려 내는 거, 솔직히 까다롭기는 했어요.”
주하나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지금까지 만났던 환자들 중 가장 힘들었거든요.”
“힘들만 했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헛웃음을 지었다.
“말한 것처럼 저는 사실상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였어요. 저를 못 살렸어도 주하나 씨를 욕할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었을걸요?”
“네, 하지만… 그런 거와 상관없이 저는 박유진 씨를 살려 내고 싶었어요.”
주하나는 힘겹게 손을 들어 내 손을 붙잡았다.
“박유진 씨는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이렇게 소중한 사람을 절대 잃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네요.”
나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주하나의 눈을 바라봤다.
“항상 고마워요, 주하나 씨. 주하나 씨 덕분에 여러 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요.”
“그건 오히려 제가 할 말이에요. 저도 박유진 씨에게 그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거든요.”
주하나는 따듯한 미소와 함께 대꾸한 후, 다시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상체만 조금 일으키더니 그녀는 이내 다시 쓰러졌다.
그리고 이번에 그녀는 내 상체 위로 쓰러졌다.
“죄, 죄송해요, 박유진 씨. 움직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천천히 해도 괜찮으니까, 당장은 더 쉬도록 하세요.”
“네……. 근데…….”
내 상체 위에 쓰러진 주하나.
그녀는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 잠시만 이러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내려오고 싶은데, 지금 몸에 힘이 안 들어가고 있어서요.”
“네, 상관없어요. 그냥 편하게 쉬세요.”
“저 무거울 텐데, 혹시 숨 쉬기 불편하시거나…….”
“전혀 그런 거 없어요. 오히려 엄청 가벼우신데.”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고, 이에 주하나는 천천히 나를 다시 바라봤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네요. 근데 너무 오래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거 같네요.”
주하나는 이 말과 함께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빨리 박유진 씨를 마저 치료해야 하거든요. 특히 얼굴 쪽을요. 박유진 씨의 얼굴에 흉터 남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아, 제 얼굴에 상처가 났었나요?”
“독이 틘 거 같더라고요.”
“뭐, 그 정도면 그냥 무시하고…….”
“제가 그걸 어떻게 무시하겠어요.”
주하나는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봤다.
“저는 박유진 씨의 몸에 흉터가 아예 안 남았으면 좋겠거든요.”
“뭐, 약속은 못 하겠지만… 흉터가 안 남게 최대한 노력해 보죠.”
“네, 그것만으로 충분하네요.”
이 말을 끝으로 나와 주하나는 휴식을 계속 취했다.
그렇게 또 몇 시간 정도 흐른 뒤.
“아으으으. 네, 이제 좀 괜찮아졌네요. 그럼 마저 치료를 해 드릴게요.”
기운을 차린 주하나는 몸을 일으키더니 치료 마법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주하나의 치료를 받았고…….
“오, 이제 움직일 수 있네요.”
다시금 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주하나는 그런 나를 붙잡았다.
“아직 완전히 치료된 거 아니에요. 격한 움직임은 절대 안 되니까 천천히, 그리고 제 부축을 받으면서 이동하세요.”
“하지만 걷는 것쯤은…….”
“제게 기대세요. 어서요.”
“네, 뭐, 알겠어요. 의사 말은 들어야겠죠.”
나는 피식 웃으며 주하나의 부축을 받았다.
그렇게 나와 주하나는 게이트를 향해 천천히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 맞다. 박유진 씨.”
“네?”
“그러고 보니 이거는…….”
“아, 게이트의 핵이요?”
나는 주하나가 보관하고 있던 게이트의 핵을 받았다.
그리고 자바니아로 그 핵을 박살 냈다.
“네, 이걸로 저 게이트는 몇 시간 뒤에 사라질 거예요. 그러니 사라지기 전에 얼른 돌아가도록 하죠.”
“네, 어서 가도록 해요.”
나와 주하나가 게이트까지 갈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토스카가 죽은 덕인지, 아니면 내가 이 세계를 완전히 박살 낸 덕인지 그 어떠한 적들도 안 보였다.
덕분에 나와 주하나는 무사히 입구까지 도착해 그 게이트를 넘어갈 수 있었다.
“…돌아온 건가요?”
“네, 돌아왔네요.”
게이트를 넘어서자 이내 익숙한 도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희의 세계로 돌아왔네요.”
나는 주하나와 복귀의 기쁨을 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뭘 말하기도 전에 근처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뭐지?’
지금 보니 게이트의 주변에 수많은 막사들이… 그러니까 일종의 베이스캠프가 설치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등장에 그 막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선두에 있던 건…….
“세리 누나?”
“유진아. 너 유진이 맞지?”
“당연히 나지. 그보다 누나, 이건 무슨 일…….”
“너랑 주하나 씨… 한 달 안에 저 게이트에서 나온 거야. 한 달 말이야, 한 달.”
“…한 달이나 지났다고?”
“응, 그리고 그 한 달 동안… 좀 많은 일이 있었어.”
하세리의 말에 나는 직검했다.
그 ‘많은 일’이 무언가 영 귀찮을 거 같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