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유진아, 움직일 수 있겠어?”
“움직이는 데 문제는 없어.”
나는 하세리의 차에서 나오며 말했다.
하지만 자신만만하게 말한 것과 달리 나는 차에서 나오자마자 휘청거렸다.
“문제없기는. 너 지금 몸에 문제가 많다고.”
하세리는 바로 내 곁에 와 나를 부축해 줬다.
“들어 보니까 너 균형 감각도 조금 무너졌다면서.”
“굳이 따지면 지금 몸에 안 다친 곳이 거의 없을 거야.”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몸의 별 다양한 곳이 다친 탓인지, 차 한번 탔다고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걸 알면 병원에서 좀 쉬지 그래? 너 자꾸 무리해서 외출하고 있잖아.”
“이 정도는 문제없어. 게다가 상황이 상황이니까, 이 정도 무리는 해야 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신이라는 존재들이 공격하는 상황이고, 그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사실상 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리해서라도 계속 움직여야 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뭐든 적당히 하는 편이 좋을 거야.”
하세리는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무리하다가 쓰러지면 전부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
“걱정 마. 나는 쓰러지지 않을 거니까.”
나는 하세리의 부축을 받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쉽게 쓰러질 인간이 아니라는 걸 누나도 알잖아.”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네가 아파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아.”
“괜찮다니까.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됐고.”
나는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건물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는 휑한 공터에 세워진 단 하나의 건물을 말이다.
“여기는 엄청 오랜만에 오네.”
“그러게. 나도 여기 안 온 지 몇 개월 된 거 같아.”
하세리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신들이 쳐들어오는 상황에서도 이 건물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
“뭐, 어떠한 상황에서도 건물 안에 있는 게 고민수 씨답기는 하지.”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계속 마도구를 만들어 낸 사람이 바로 그분이니까.”
“틀린 말이 아니라서 할 말이 없네.”
하세리는 한숨을 쉬다가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가끔 세상 밖으로 나오셨으면 좋겠는데, 몇 년째 저 건물 안에만 계셔서……. 하아, 이번 사태 끝나면 밖에 강제로 끌고 나오든가 해야지.”
“에이, 강제로 끌고 나오는 건 조금……. 음? 뭐야, 저거?”
하세리의 부축을 받으며 건물 쪽으로 가던 중.
건물에서 무언가가 나오는 게 보였다.
“…휠체어?”
크고 편안해 보이는 휠체어가 건물에서 나와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바로 알 것 같았다.
“고민수 씨가 보낸 거죠?”
내 앞으로 스스로 바퀴를 굴리며 다가온 휠체어.
내 질문에 휠체어는 긍정의 의미를 표하듯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으으음, 근데 고민수 씨. 마음은 고맙지만 저는 걸어갈 수 있으니까 굳이……. 윽?”
내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휠체어에서 기계 팔이 튀어나와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 기계 팔은 나를 강제로 휠체어에 앉혔다.
“어어어, 고민수 씨. 이거는 뭔…….”
“자, 출발하죠, 민수 아저씨.”
하세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봤다.
“환자를 걷게 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낫네.”
“누나, 그냥 걷는 편이 재활에 있어서…….”
“재활 같은 소리 하네. 아저씨, 어서 출발해요.”
하세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휠체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매우 편안히 건물 안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오랜만에 보는 커다란 로봇이 나와 하세리를 맞이했다.
“탈로스의 부품들이 더 좋아졌네요? 업그레이드를 최근에 했나요?”
“지난달에 한 번 했지.”
거대한 로봇에서 고민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와 하세리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휠체어는 계속 이동해 계단 쪽으로 갔다.
휠체어를 타고 계단을 올라갈 수 없으니 슬슬 일어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으음?”
휠체어가 갑자기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하더니 나를 앉힌 채 계단을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역시 고민수 씨는 대단하네요. 이런 마도구를 만드는 건 쉽지 않을 텐데.”
“그러니까 말이야. 이건 좀 대단한 물건인데?”
나를 따라오던 하세리는 휠체어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마법으로 이렇게 자연스럽게 공중에 떠오르는 의자라니. 이거 특허 내면 꽤 괜찮을 거 같은데?”
“아직 시험 단계라 특허를 안 내고 있으신가 보지.”
“그런가 보네. 근데 아저씨.”
하세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런 거 만들어서 유진이에게 보낼 시간에 그냥 이 건물에 제발 엘리베이터를 만들면… 아악?”
기계 팔이 휠체어에서 튀어나와 하세리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이에 하세리는 휠체어를 노려봤으나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휠체어에게 화낼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웃지 마.”
하세리는 작게 웃던 내게 말했고, 이에 나는 어깨만 으쓱였다.
그렇게 나와 하세리는 건물의 최상층으로 향했고, 이내 15층에 도착하자…….
“너희 둘, 오랜만이구나.”
넓은 거실을 청소하는 고민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은 여전하네요.”
나는 휠체어에서 일어서며 고민수에게 다가갔다.
고민수는 나와 하세리를 슬쩍 바라보며 눈으로 인사했다.
“여전하겠지. 나는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취향은 없으니까.”
고민수는 잡다한 물건들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휠체어는 편했냐? 네 말대로 아직 시험 단계인 물건이거든.”
“편했어요. 물론 흔들리는 게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요.”
“무게를 조금 더 견딜 수 있게끔 조절해야겠네.”
고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휠체어는 근처의 창고 안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네가 몸이 많이 안 좋다는 소식을 들었거든. 환자를 여기까지 걸어서 올라오게 하는 건 아닌 거 같아서 저 휠체어를 보낸 거란다.”
“아저씨, 그러지 말고 그냥 건물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시면…….”
“건물 자체를 건드는 건 싫다고 말했잖니.”
고민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그런 뒤, 그는 근처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자, 받거라.”
“어, 이건…….”
나는 고민수가 던진 물건을 받았다.
철로 만들어진 통이었는데…….
“무한 와이어 아닌가요? 제가 몇 시간 전에 보내 드렸던 건데, 벌써 고치신…….”
“저건 딱히 복잡한 구조의 마도구가 아니거든. 고치는 거야 한 시간이면 충분했어.”
고민수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보다 너, 요즘 신들과 싸운다면서?”
“뭐, 그렇기는 하죠.”
“신이라. 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한 존재들은 확실히 아니겠지.”
고민수는 이렇게 말하며 나를 천천히 살폈다.
“네가 크게 될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신과 싸우게 될 줄은 몰랐네. 근데 너 말이야.”
“네?”
“어째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해진 거 같다?”
고민수는 턱을 매만지며 나를 위아래로 살폈다.
“지금 내 눈에는 네가 세리보다 훨씬 강한 것으로 보여.”
“…그런가요?”
“너 등급 검사 최근에 한 적 있어? 뭔가 너… 잘만 하면 S급 헌터도 됐을 거 같거든.”
“S급까지는 아마 아닐 거예요.”
일단 나의 경험상, 나는 현재 A급의 수준까지 올라온 건 맞는 듯했다.
토스카의 세계에서 나를 오랫동안 막아서던 선을 넘어서자, 순식간에 강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S급까지 오른 거냐고 하면, 그건 또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S급이 될 수 있을지 알 것만 같아.’
그 선을 넘어서자 길이 확실히 보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근데 그건 그렇고, 고민수는 어떻게 내가 강해졌는지 눈치챈…….
“흐음, S급이라.”
속으로 생각하던 중, 옆에 있던 하세리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최근에 등급 검사를 안 하기는 했지. 이따 협회에 가서 한번 해 볼까, 유진아?”
“내 몸 다 회복한 후에 하자. 이 상태로 해 봤자 제대로 안 나올 거 같아.”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네.”
하세리는 내 말에 동의했다.
이내 고민수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박유진, 그러고 보니 너 항상 입고 다니던 그 코트는 어디 간 거냐?”
“아, 그거 망가졌어요.”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단 고칠 방법은 찾았는데, 아무래도 고치려면 며칠 걸릴 거 같은…….”
“내게 맡겨 볼래? 지난번에 보니까 너의 코트도 일종의 마도구 같더라고. 내가 잘만 하면 손봐 줄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런가요? 그렇다면 제가 다음에 코트를 들고 오면…….”
나는 말하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왜냐하면 문득 든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윤경은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과학자지만, 기계 쪽보다는 생물 쪽에 더 강해. 하지만 고민수는 한국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마도 공학자야. 만약 고민수에게 신에 대항할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하면…….’
고민수를 하윤경의 연구소를 데려가고픈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걸 지금 제안할 수는 없었다.
‘하세리 앞에서 하윤경의 언급을 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내 옆의 하세리를 슬쩍 바라봤다.
확실히 그녀 앞에서 하윤경의 이야기를 하면…….
“세리야. 혹시 잠깐 아래층에 갔다 와 줄 수 있을까?”
속으로 생각하던 중, 갑자기 고민수가 하세리에게 말했다.
“밑에 층에 내가 보관해 놓은 약들이 있을 거야. 그 중 붉은색 상자에 담긴 검은색 알약들을 들고 와 줘.”
“약들은 갑자기 왜요?”
“박유진, 이 친구의 회복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약이거든.”
“아, 그런 거면… 금방 갔다 올게.”
하세리는 별로 신경 안 쓴다는 투로 계단으로 향했다.
그렇게 하세리가 사라지자, 고민수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게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냐?”
“네?”
“아까 네 눈치를 보니까 나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세리를 일부러 아래층으로 보낸 거야.”
고민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내게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진짜로 있던 거니?”
“…사실 하나 있기는 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혹시 이따가 따로 북한산으로 와 주실 수 있을까요?”
* * *
“흐음, 산의 한가운데에 이런 장소가 있을 줄이야.”
몇 시간 뒤.
북한산에 위치한 하윤경의 연구소에 고민수가 찾아왔다.
“길 안 잃고 잘 찾아오셨네요.”
“네가 알려 준 대로만 왔을 뿐이야. 그나저나 오랜만에 외출하니 기분이 이상하네.”
“얼마만의 외출이신가요?”
“거의 2년 만이지. 뭐, 그건 됐고……. 이 연구소 말이야.”
고민수는 지하 연구소를 둘러보며 말했다.
“상당히 잘 만들었네. 이걸 만든 게 하윤경, 그 친구라고 했지?”
“네, 맞아요.”
“그리고 아까 들은 것에 의하면, 죽었다고 알려진 하윤경이 사실 죽은 게 아니라…….”
고민수가 말하던 그때.
지하 실험실에서 누군가가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바, 박유진?! 저, 저 인간은 뭐야? 저, 저 인간은 분명…….”
“…허, 이거 참……. 뭐라 말이 안 나오네.”
거실에 나타난 하윤경.
그런 하윤경의 모습에 고민수는 헛웃음을 지었다.
“하윤경이 사실 죽은 게 아니라… 네가 어려지게 만든 채 이곳에 숨겼다고 했지?”
“네, 그렇죠.”
“허, 이건 뭐……. 처음에는 나를 놀리는 건 줄 알았는데, 이게 진짜였다니.”
고민수는 이 상황이 여러모로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하윤경은 고민수를 가리키며 내게 소리쳤다.
“박유진! 대답해! 고, 고민수, 저, 저 인간이 왜 여기 있는 건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데려온…….”
“야, 야. 윤경아. 진정해라. 어린애처럼 굴지… 아, 어린애가 된 거라 어린애처럼 구는 건가?”
“닥쳐, 고민수!”
고민수의 말에 하윤경은 얼굴이 붉어진 채로 소리쳤다.
이에 나는 의문을 느껴 고민수에게 물었다.
“고민수 씨. 혹시 하윤경 씨와 아는 사이세요?”
“잘 알지. 믿을지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 윤경이가 내게 막 고백하고 다녔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