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닥쳐, 고민수! 수십 년도 전에 있던 일이야!”
“그렇다고 없었던 일도 아니잖아.”
고민수는 피식 웃으며 어려진 하윤경을 바라봤다.
“네가 딱 이렇게 생겼을 때 나를 막 쫓아다녔었지. 초등학생이 고등학생이 나를 막 쫓아다녀 가지고, 내가 얼마나 곤란했었는데.”
“시끄러워! 그때는 내가 아무 생각이 없던 꼬맹이라서 그랬던 거야!”
“그치, 아무 생각 없던 꼬맹이였지. 근데 있지, 너는 차라리 아무 생각 없던 꼬맹이였던 게 나았어.”
고민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는 똑똑하고 귀엽기만 한 아이였는데, 어쩌다가 이상한 길에 들어서 그 꼴이 났는지, 거참.”
“하윤경과 어렸을 때 친하게 지내셨나 봐요?”
“그치. 친하게 지냈지.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어.”
“하윤경이 매일 쫓아다녀서요?”
“그렇지.”
“야!”
하윤경은 옆에서 소리치며 고민수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반지를 이용해 하윤경을 근처 소파에 강제로 앉게 했다.
“가만히 있어. 귀하게 모신 손님인데, 예의를 차려야지.”
“귀한 손님 같은 소리 하네! 저 인간이 뭐가 귀한데?!”
“됐고, 조용히 하고 있어.”
“읍?! 으읍?! 읍!”
내 명령에 하윤경은 강제로 입을 다물게 되었다.
그녀는 무언가 계속 소리치려고 했지만, 입이 다물어진 탓에 말을 못 했다.
“아무튼, 고민수 씨. 하윤경과 면식이 있으셨다고요?”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마도구 제작에 천재 소리를 들었거든.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유용한 실험 도구들을 많이 만들었어.”
“네, 오래전부터 발명을 시작했다고는 들었죠.”
“그러다가 윤경이의 집안이 내게 연락해 온 거야.”
“…아.”
그 이후의 이야기가 어째서인지 바로 알 것 같았다.
“제 예상이지만, 하윤경의 집안에게 의뢰를 받아 이런저런 도구들을 만드신 것이겠죠?”
“맞아. 그들에게 마도구 의뢰가 들어와서 원하는 걸 만들어 줬지. 그리고 내게 나쁜 거래는 아니었어. 돈을 많이 받을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바렐’이라는 내 별명이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그 집안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하윤경과 친해진 거죠.”
“발명한 실험 도구들을 전달해 주면서 얼굴을 몇 번 봤었지. 그러다가 어느 날 대뜸 나를 찾아와서 내게 고백하더라고.”
“읍! 으으읍!”
고민수의 말에 하윤경은 다시금 강력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내 명령은 유효했기에 하윤경은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나는 고민수에게 다시금 물었다.
솔직히 말해 이야기가 꽤 흥미진진했다.
고민수와 하윤경이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다는 것까지는 놀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고민수는 하세리와 아는 사이였다.
그래서 하윤경에 대해 좋든 싫든 조금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둘이 이렇게 친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
하윤경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으나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건 처음 들은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하윤경의 과거였으니 말이다.
“크게 특별한 것은 없단다. 윤경이가 처음 내게 막 고백했을 때는 내가 걔를 피했어. 그때 얘는 초등학생이었고, 나는 고등학생이었거든. 나이 차가 조금 있어서, 내가 부담스러워서 피했지. 성인이 된 후에 다시 나를 찾아오라고 말하고 말이야.”
“근데 하윤경은 말을 안 들었겠죠?”
“그랬지. 말은 더럽게 안 듣더라고.”
고민수는 헛웃음을 지으며 소파에 앉아 있는 하윤경을 바라봤다.
하윤경은 나와 고민수를 노려봤고, 고민수는 그런 하윤경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는 표정이었다.
“나를 엄청 자주 찾아왔어. 말한 것처럼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지만, 계속 만나다 보니까 나도 정이 들더라고. 그래서 조금씩 친해졌는데……. 으음.”
고민수는 말끝을 흐렸다.
뭔가 싶어서 의문을 표하려고 했는데, 고민수는 천천히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얘가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해지더라고. 전까지 괴짜 면은 있어도 심성은 분명히 착한 아이였어. 근데 하루아침에 사람이 확 달라진 거야.”
“무언가에 집착하기 시작했죠?”
“맞아. 인류의 진화라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더라고. 그것도 광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했어. 과학자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윤리마저 잊어버린 것 같았지.”
“그때부터 점점 멀어진 건가요?”
“윤경이가 중학생이 되던 해부터 완전히 연락이 끊겼지. 하지만 나도 간간이 얘의 소식을 들었어.”
고민수는 하윤경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가족을 다 죽이고, 사람들을 납치해서 이상한 실험들을 한다고……. 그리고 자신의 조카마저 이용해 먹는다는… 그런 소문들을 들었지.”
“세리 누나와는 어쩌다가 만나게 된 거죠?”
“우연히 만나게 된 거지. 협회에 마도구들을 제공하다가 연락이 닿았거든. 윤경이의 조카라는 걸 듣고, 뭔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몇 년 전부터 계속 살피기는 했었지.”
“그렇군요. 근데 참 이상하네요.”
나는 소파에 앉아 있는 하윤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윤경의 성격상 고민수 씨를 잡아서 죽였을 법도 한데, 어째 안 건드렸네요.”
“그러게 말이다. 사실 내가 그 커다란 건물에 안 나오던 건 내 성향의 문제도 있었지만, 윤경이가 두려웠던 것도 있어. 얘가 언제 나를 또 찾아와서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이 있었거든.”
“근데 아무 일도 없었군요?”
“얘가 아직도 나에게 정이 있는 건지, 나는 안 건들더라고.”
“읍! 으으읍!”
고민수의 말에 하윤경은 다시 한번 발작했다.
이에 나는 한숨을 쉬며 하윤경이 입을 열 수 있게끔 조치해 줬다.
“야! 고민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입을 열 수 있게 되자 하윤경은 바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나는 너에게 그 어떠한 마음도 남아 있지 않아! 내가 너를 살려 둔 건 너에게 나중에 쓸모가…….”
“하윤경, 솔직하게 말하도록 해.”
“…으읏.”
내 말에 하윤경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내가 명령을 내리자 그녀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아직 미련이 남아서… 으읏. 뭔가 상처 입히고 싶지는 않았기에…….”
“너에게도 의외인 면이 있었구나.”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후, 옆에 있던 고민수를 바라봤다.
“예, 뭐, 그렇다고 하네요.”
“흐음, 그나저나 참 놀랍네. 윤경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했을 때는 놀라기만 했는데, 어린아이로 변신시켰다고 했을 때는 내게 장난치는 건가 싶었거든.”
고민수는 하윤경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위아래로 살폈다.
“윤경이가 직접 만든 약을 먹인 거라고 했지?”
“네, 그렇죠.”
“…너도 참 별 이상한 걸 다 만들었구나.”
고민수는 하윤경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에 하윤경은 고민수를 그저 노려볼 뿐이었다.
“근데 고민수 씨. 하윤경이 원래는 심성이 착했다고요?”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랬어.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미쳐 버린 모습을 보였을 때 충격이 꽤 컸어.”
“…그렇군요.”
하윤경이 갑자기 미쳐 버린 건, 괴수들의 신이 어렸을 때의 그녀의 머리를 헤집어서라고 들었다.
‘지금의 하윤경은 내가 강제로 통제하는 것이야. 근데 만약… 하윤경이 미쳐 버리기 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만약 하윤경에게 진짜로 고민수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다면, 어쩌면 그걸 이용해서…….’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들을 머리에서 지웠다.
당장은 이런 생각들을 할 타이밍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고민수 씨. 하윤경과는 나중에 마저 이야기하시고, 우선 저를 따라오시겠어요?”
“아, 그래. 해야 할 일부터 우선적으로 처리해야지.”
이 말과 함께 나는 고민수와 같이 계단 쪽으로 향했다.
뒤에서 하윤경이 자기를 왜 놔두고 가냐고 따졌으나.
“그냥 거기에서 쉬고 있어. 어른들끼리 대화 좀 하고 올 테니까.”
“X발! 나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고, 이 개새끼야!”
하윤경의 분노에 가득 찬 외침을 뒤로하고, 나는 고민수와 같이 지하의 연구소로 향했다.
“이게 너의 코트지?”
“네, 맞아요. 상태가 심각하죠?”
“형태를 못 알아볼 수준이네.”
고민수는 반쯤 녹아 버린 내 코트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윤경이 보고 이거 고치라고 했다 했지?”
“네, 그랬죠.”
“뭐, 윤경이라면 얼추 고칠 수는 있었겠네. 근데 말 그대로 얼추 고쳤을 거야.”
고민수는 이 말과 함께 코트 옆에 놓여 있던 종이들을 살폈다.
“윤경이가 코트의 구조를 분석해 놓은 건가? 흐음…….”
“어떤가요?”
“익숙한 구조네. 특이한 마법으로 구성된 아이템이지만, 이 정도면 내가 쉽게 복원할 수 있겠어.”
고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틀 정도만 주면 완벽히 고치는 걸 넘어서, 추가적인 기능까지 코트에 넣어 줄 수 있을 거야.”
“역시 대단하시네요. 그럼 염치 없지만, 혹시 부탁을…….”
“필요한 재료는 이곳에 다 있는 거 같으니 이따가 바로 작업에 들어가지. 대신 박유진.”
“네.”
“내가 너의 코트를 고쳐 주는 대신 반드시 신을 물리치도록 해, 알겠지?”
“반드시 물리치도록 하죠.”
내 말에 고민수는 만족스럽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후, 그는 코트를 내려놓으며 다시금 내게 물었다.
“그리고 이곳에 신을 몰래 붙잡아 뒀다고 들었는데, 혹시 괜찮다면 그 신도 한번 만나도 될까?”
“따라오시죠.”
고민수를 이곳에 부르기 전, 나는 그에게 따로 약속을 받았다.
신을 만나게 해 주는 대신, 신에 대항할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고민수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 누구야? 하윤경, 또 네년… 어? 바, 박유진? 박유진, 네놈이냐?!”
“오랜만이네.”
“그, 그래! 오, 오랜만이구나! 그, 그러니 얼른 나를 풀어 줘라! 제, 제발.”
“그러니까 내가 너를 왜 풀어 줘야 되는…….”
“그럼 안 풀어 줘도 되니까, 하윤경. 그 여자만을 내게 다가오지 않게 해 주게! 제발! 그 여자를 또 마주하고 싶지 않아!”
“대체 나 없는 동안 뭔 일이 있던 거냐?”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와이번의 상태를 보니까 그녀는 하윤경에게 꽤 시달린 듯했다.
몸 곳곳에 붕대가 감겨져 있고, 거기다 몸의 별 다양한 곳에 주사 자국들이 선명히 보였다.
하윤경이 죽이지만 않은 거지, 와이번에게 꽤 심한 짓을 한 건 확실했다.
“그, 그 끔찍한 기억을 떠오르게 하지 마라! 그, 그보다 네 뒤의 그 인간은 누구냐? 설마 나를 고문하려고 새로운 사람을…….”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 아무튼, 고민수 씨. 이 존재가 바로 와이번이라는…….”
“확실히 느껴지는 기운이 이질적이군.”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고민수는 이미 와이번의 감옥에 다가가고 있었다.
“특이한 기운이야. 하지만 동시에 분명히 마법적으로 분석이 가능한 기운이기도 하고……. 음? 이것도 윤경이가 분석해 놓은 건가?”
고민수는 감옥 옆에 켜져 있던 모니터를 살폈다.
그 모니터에 온갖 그래프와 표가 띄워져 있었다.
고민수는 그 자료들을 몇 분 동안 말없이 살폈다.
그리고 이내 그는 입을 다시 열었다.
“신이라고 해서 기대했건만, 별것 없네. 이런 존재에 대항할 무기나 방어구라면 당장에라도 만들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