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 * *
이런저런 절차들을 거친 후, 나는 하세리와 함께 페루로 바로 이동했다.
디맨션 도어를 이용해 순식간에 지구 반대편에 도착할 수 있었고, 페루에 도착하자마자 보게 된 광경은 꽤 처참했다.
“…빙하기라도 도래했나?”
“빙하기도 이렇게 심하지는 않을 거 같은데.”
하세리는 여러모로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도시를 둘러봤다.
“서류와 영상으로 미리 보기는 했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까 상황이 심각하다는 게 느껴지네.”
“일단 숙소로 이동하자.”
나는 저 멀리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아마 저 사람들이 정부 관계자들인 것처럼 보이네. 저 사람들에게 안내받자.”
“응, 얼른 가자.”
* * *
“그래서 누나.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해 볼까?”
“그래야지.”
페루의 수도, 리마.
그곳에서 나와 하세리는 도시의 최고급 호텔로 안내받았다.
시설은 최고급이었지만, 도시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제대로 된 서비스는 못 받았다.
“게이트는 리마 근방의 바다 위에 나타났어. 정확한 위치는 이쯤이야.”
하세리는 내게 지도를 보여 주며 말했다.
“여기에 나타났고… 지금 적들의 세력이 많아졌대. 게이트에서 나타난 신이 자리를 먹은 뒤, 그곳에 수많은 게이트들을 불러냈다고 해. 그리고 그 수많은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이 몰려나왔다고 해.”
“그 하이퍼 게이트를 제외해서 나타난 게이트는 몇 개야?”
“총 열네 개.”
“그 수는 조금 줄였어?”
“열두 시간 전까지 여덟 개까지 줄였다고 해. 하지만 문제는 세 시간 전에 게이트들이 더 나타나서, 지금은 열여섯 개가 되었대.”
“일이 쉽지 않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피해는 꽤 심각했겠지?”
“…구체적인 수치는 이야기하지 않을게. 다 말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냥 일찍 올 걸 그랬나?”
나는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이 신을 너무 만만히 봐서 일부러 늦게 나선 건데, 막상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걸 보니까…….”
“아니야, 네 선택이 틀리지는 않았어.”
하세리는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지금 전 세계 사람들은 신이 얼마나 큰 위협인지 깨달았고, 페루의 사람들도 너의 도움을 이제 간절히 바라고 있어.”
“그게 내 의도기는 했지.”
“뭐, 그 덕에 지금 페루의 정치계와 헌터계가 난리가 났지만 말이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너의 도움을 받기를 반대하던 정치인들과 헌터들 있잖아. 그 사람들 지금 페루 국민들에게 지금 온갖 욕을 먹고 있어. 하지만 너에게 도움을 안 받는 게 맞는다고 하는 무리들이 아직도 있어서,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어.”
“…하.”
하세리의 그 말을 들은 나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다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자기들끼리 싸우는 건 뭔……. 하아, 참 태평도 하네.”
“아직 위기감이 없는 거겠지. 그러니까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아직 못 느끼는 거 같아.”
“…뭐, 나라 문제는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고, 우리는 우리 할 일이나 집중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갔다.
창밖을 보자 얼어 버린 도시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수복하게 쌓인 눈, 그리고 얼어 버린 건물들과 거리.
마치 진짜로 빙하기가 온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신에 대한 정보는 얼마나 있어?”
“많지는 않아. 그래도 일단 있는 정보들이라도 알려 줄게.”
하세리는 아까 페루 정부의 관계자들에게 받은 서류들을 꺼냈다.
“이게 그 신의 사진이야.”
“…여신인가?”
“목소리가 여자의 것이라고 하는 거 보니까 맞을 거야.”
“흠.”
나는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짙은 푸른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여신이었다.
신화적인 분위기가 나는 로브를 걸친 채, 그 여신은 도시를 얼리고 있었다.
“다른 정보는 더 없어?”
“자신을 ‘퀼라’라고 소개했다고 하더라고.”
“퀼라?”
“응, 퀼라는 아마…….”
“마마퀼라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잉카 제국의 종교에 나오던 여신, 맞지?”
“맞아. 잉카 제국은 인티라는 태양신을 중심으로 하는 다신교 체제를 국교로 채택했었어.”
“그리고 마마퀼라는 그 종교에서 나오는 달의 여신. 태양신 인티의 아내였지.”
“잘 아네? 나도 이 서류들 보고 알게 된 건데.”
“내가 얕지만 넓은 지식을 갖고 있거든.”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한 뒤, 다시금 서류들에 나온 사진들을 살폈다.
“으음, 근데 이번 신은 뭔가 조금 느낌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다르다니?”
“지금까지 내가 상대했던 신들은 다곤, 와이번 그리고 토스카야.”
나는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마마퀼라는 잉카 제국의 종교에 명백하게 나오는 신이야. 하지만 다곤, 와이번과 토스카는… 적어도 이 지구상에 그들을 명확하게 언급하는 신화나 전설이 없어.”
“아, 생각해 보니 그 셋은…….”
“뭐, 그래도 다곤과 토스카는 나오기는 해. 다곤은 그 크툴루 신화에 언급된 존재고, 토스카는… 이름은 살짝 다르지만, 그 모습은 이집트 신화에 묘사된 것과 비슷했어. 그리고 와이번은 뭐……. 나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라고 말하며 나는 말을 계속했다.
“전에 상대한 세 명은 명확한 신화 같은 게 없었어. 하지만 이번에 나타난 퀼라는 달라. 인간들의 종교에 명백히 언급이 되었어.”
“그렇기는 한데… 그게 큰 차이인가?”
“큰 차이일 수도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잉카 제국이 남긴 종교를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까. 근데 사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으음…….”
“왜?”
“모르겠어. 그냥 감이라고 해야 하나. 이번에 나타난 이 퀼라라는 여신……. 이 여신은 그러니까 한때 인간에게 숭배받은 신이잖아?”
“그치. 잉카 제국의 사람들에게 오래전에 숭배받았을 테니까.”
“그게 문제야.”
나는 영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들에게 숭배를 받았던 신. 인류의 기록에 남은 신. 나는 이게 어떤 변수가 될 것만 같아. 근거는 없지만, 그럴 거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그래? 나는 잘 모르겠는데.”
“잘 모를 거야.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방금 말한 것처럼, 이건 그냥 단순한 감이야.”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근데 갑자기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는데, 이 퀼라라는 여신……. 우리가 예상하는 그 마마퀼라가 맞겠지? 마마퀼라는 달의 여신이라고 들었는데, 그녀가 얼음을 썼다는 기록은 내가 본 적이 없는 거 같거든.”
“원한다면 내가 조사를 해 줄까?”
“해 주면 고맙지. 하지만 그건 나중에 하고, 우선 짐을 풀고 장비들이나 꺼내자. 특히 누나는 오늘 나와 함께 싸워야 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준비를 미리…….”
나는 하세리에게 말하며 가방에서 내 물건들을 꺼냈다.
근데 그러던 중, 갑자기 숙소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음? 뭐지?”
“이건… 신이 나타난 거야.”
“퀼라?”
“지금 그 신 말고는 없지.”
“…숨 돌릴 틈을 안 주는구먼.”
나는 한숨을 쉬며 빠르게 내 물건들을 챙겼다.
“누나, 준비하고 나와. 호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알겠어. 나도 장비들만 입고 바로 나올게.”
이 말과 함께 하세리는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는 한숨을 쉬며 단검과 와이어의 상태를 점검했다.
* * *
“…엄청난 군대네.”
“약 1,500마리의 몬스터들로 추정되는 중이야.”
“그나마 페루의 헌터들이 수를 줄여서 그 정도라는 거지?”
“그치.”
“하아아. 이번에도 쉽지는 않겠네.”
페루의 수도, 리마.
나는 도시의 바닷가 근처로 나왔다.
그리고 저 멀리 엄청난 수의 몬스터들이 무리를 이룬 채 다가오는 걸 바라봤다.
“저 맨 앞에 있는 게 퀼라겠지?”
“사진과 일치하는 걸 보니 맞을 거야.”
하세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 1,500마리의 몬스터들은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들은 것에 의하면 그렇게 강한 몬스터들은 아닐 거야.”
“부탁할게. 그리고 내가 준 그 신의 기운은 익숙해졌어?”
“대충 감은 잡은 거 같아.”
하세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근데 확실히 특이한 힘이네. 뭔가 나를 강화시키는 것만 같으면서도, 뭔가 나를 옭아매는 듯한…….”
“뭐, 대충 그런 힘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이곳으로 오기 전, 나는 하세리에게 내가 가지고 있던 신의 기운을 공유했다.
이것으로 하세리는 저 신에게 공격을 할 수 있을 터였다.
“저 몬스터들은 누나에게 맡길게. 나는 일단 퀼라의 시선을 끌고 있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리들의 숙적이여.”
하세리에게 이야기하던 중, 저 멀리서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알 수 없는 언어로 말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 의미가 바로 이해가 되었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박유진, 그대가 세 명의 신을 이겼고… 나아가서 위대하신 분께 반기를 든다고 들었습니다.”
“인류에 위협이 되는 적이니까요. 저는 제 할 일을 할 뿐이죠.”
“위협……. 이 모든 행위를 위협이라 생각하다니, 안타깝습니다. 위대하신 분은… 그저 여러분을 도우려고 할 뿐입니다.”
“그런 건 저희 인간들이 알아서 판단할 거예요. 알아들었으면… 이곳에서 사라져 주시죠?”
나는 자바니아를 꺼내 들며 말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푸른 머리의 여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저는 저를 구해 주신 위대하신 분의 명령만을 따를 뿐입니다. 그리고… 저를 저버린 이 추악한 인류 또한… 없애고 싶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근데… 뜬끔없지만 하나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네요.”
나는 앞으로 나아가 퀼라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녀에게서 어째… 무언가 이상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 행성에 혼자 온 거 맞나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뭔가 느껴지거든요. 어째서인지 모르겠는데, 지금 그쪽의 주위에서 또 다른 신이 있는 거 같은…….”
“알아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과 함께 퀼라는 갑자기 뒤로 돌아섰다.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합시다.”
“음? 어딜 가는…….”
“아직 그쪽과 싸울 때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당분간은 제 군단과 싸우면서 무료함을 달래기를 바랄게요.”
“아니, 잠깐. 기다…….”
퀼라는 내 말을 들은 체도 안 하며 그대로 몬스터 군단 사이로 사라졌다.
“…뭐지?”
무언가 이상했다.
저 신은 확실히 무언가 이상했다.
하지만 당장은 그에 대한 생각은 접어 두었다.
“유진아, 지금 몬스터들이…….”
“알아, 싸우자.”
나는 전류를 불러내 눈앞의 몬스터들을 향해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