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 * *
“오빠, 나 한숨 잘게.”
“그래, 자고 나와라.”
강원도에서 놀다가 집에 도착한 후.
나는 거실의 소파에 몸을 뻗었고, 유나도 실컷 놀아서 피곤했는지 바로 방에 들어갔다.
“후우우.”
“피곤해 보이네?”
“아주 살짝 피곤한 거야. 아무래도 어젯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말이지.”
“…미안.”
“미안할 건 없어.”
나는 피식 웃으며 이민아에게 대꾸했다.
“술 취한 거야, 어쩔 수 없었을 거 아니야.”
“어, 뭐… 그거야… 그, 그치. 게, 게다가 나만 그런 것도 아니었잖아.”
“너만 그런 게 아니라서 더 피곤했었어, 인마.”
이민아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대체 뭔 짓을 했으면 세리 누나와 주하나 씨까지 그렇게 마신 거야?”
“그냥… 별것 아니고, 간단한 진실 게임들을 몇 개…….”
“대체 진실 게임을 얼마나 진심으로 한 거냐? 헌터 세 명 모두 취할 정도로 마신 거면, 어지간히 많이 마신 거였을 텐데.”
“그, 그런 게 있었어.”
“뭐, 그렇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민아, 너는 왜 집 안 가고 우리 집에 따라온 거냐?”
“어차피 집 가 봤자 딱히 할 것도 없거든. 집에서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을 바에, 그냥 너랑 노는 게 낫지.”
“너도 나를 참 좋아하는구나. 나랑 계속 같이 있으려 하고 말이야.”
“뭐, 뭐라는 거야? 갑자기 뭔…….”
“농담이야. 그냥 해 본 소리지.”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고, 이민아는 살짝 얼굴이 붉어진 채로 나를 째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그녀는 이내 한숨을 쉬며 내 옆으로 와 앉았다.
“그나저나 우리 뭐 했다고 벌써 새해가 시작된 걸까?”
“많은 일들이 있었잖아.”
나는 달력을 슬쩍 보며 말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1월 중순이 되었다.
내가 회귀를 한 지 어느새 1년이 다 되어 가는 중이었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지난 1년 동안 진짜로 많은 일들이 있었네.”
나는 눈을 감으며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봤다.
지난 1년 동안 별 다양한 일들을 다 겪고 왔었다.
심지어 그중에는 신과 싸우게 된 말도 안 되는 일도 있었던지라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맞아. 많은 일들이 있었어. 나 같은 경우에는… 너를 만나고 난 후에 인생이 여러모로 달라지기도 했고.”
이민아는 머리를 내 어깨에 살짝 기대며 말했다.
“진짜 네 덕에 평생 해 보지 못할 일들을 겪게 되었네.”
“그거 칭찬이지?”
“으음, 칭찬이겠지?”
이민아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이에 나 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마를 한 대 쳐 줬다.
“악? 야, 왜 때리는데?”
“귀여워서 때린 거야.”
“아니, 뭔……. 귀여워서 때리는 건 또 뭔데? 그냥 때리고 싶어서 때린 거 아니냐?”
“뭐, 그렇다 치자.”
“야, 이 개새끼야!”
그렇게 나와 이민아는 평소와 같은 분위기로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우리 둘이 대화를 이어 나가던 중, 문득 고민수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뭔가 고민수 씨, 그분 뭔가 느낌이 안 좋아.”
“느낌이 안 좋다니?”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뭔가 불안해. 그냥 지금 불안한 느낌이 조금 들어. 뭔가… 뭔가 고민수 씨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
“으음, 그래?”
이민아의 직감은 대체로 맞는 편이었다.
그래서 이민아의 그 말을 듣자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고민수가 하윤경을 고치는 데 실패한 건가?’
실패만 하면 다행인데, 만약 고민수가 실수로 하윤경을 도망치게 허락했다거나 그런 거면 일이 커진다.
‘오늘 중으로 고민수를 찾아가야 하려나.’
여러모로 고민이 들었다.
고민수는 자기를 내일 찾아오라고 말했으나 이민아가 이렇게 말하니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야, 또 무슨 생각하는 거야?”
“네가 말한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중이야.”
“내가 말한 거? 그러니까 고민수 씨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는 거?”
“응, 그렇지.”
“흐음, 근데 무슨 일이 일어나도, 고민수 씨면 잘 해결하지 않을까? 네가 전에 말했잖아. 고민수 씨는 한국 최고의 마도구 제작자라고.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 그분은 본인의 마도구로 상황을 해결할 거 같은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뭔가…….”
나는 고민수를 오늘 찾아갈지 말지 계속해서 속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얼마 뒤, 나의 그런 고민을 완전히 해결해 줄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음?”
고민수에게 문자가 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자의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단 세 글자로 이루어진 문자였다.
[도와줘]
매우 단순한 내용의 문자.
나는 그걸 보자마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뭐야? 박유진, 너 어디 가?”
“고민수 씨에게 당장 가 봐야겠어.”
“가, 갑자기? 왜?”
“고민수 씨에게 문자가 왔거든.”
나는 방금 온 문자를 이민아에게 보여 줬고, 그걸 본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생겼나 보네.”
“그러니 당장 가 봐야지.”
나는 코트를 입고 단검을 챙겼다.
“이민아 너는 집 지키고 있어 줘. 정확히는 유나를…….”
“아니, 나도 갈 거야.”
“안 돼. 너는…….”
“나 팔 다 나았어.”
이민아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도 이제 싸울 수 있어. 그리고… 그리고 이번에도 내 감이 말하고 있어.”
“뭐라고 말하는데?”
“너를 따라가야 한다고. 네가 곧 하게 될 싸움에서 너를 도와야 한다고…….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어.”
“으음.”
나는 잠시 속으로 생각했으나 내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3분 후에 출발할 거니까 빨리 준비해.”
“알겠어.”
“그리고 유나는…….”
유나는 방에서 진작에 잠든 상태였다.
유나를 무방비하게 두고 갈 수는 없었으니…….
“이 누나도 피곤할 텐데……. 어쩔 수 없겠지.”
나는 하세리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나와 이민아는 고민수의 빌딩을 향해 출발할 준비를 빠르게 이어 나갔다.
* * *
“이게 고민수 씨의 빌딩이야?”
“그치. 생각해 보니 너는 여기 처음 오는 거구나.”
나는 이민아를 데리고 고민수의 빌딩에 최대한 빨리 도착했다.
그리고 빌딩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무언가 일이 잘못됐음을 느꼈다.
“뭔 일이 있던 거지?”
1층에는 거대한 로봇, 그러니까 탈로스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고민수가 꽤 공들여 만든 로봇이라 상당한 내구도를 자랑했었다.
‘일격에 두 동강 나고… 그 후에 마탄으로 산산조각을 낸 거 같은데.’
무언가 이상했다.
어지간한 힘으로는 탈로스를 단번에 두 동강 내기는 힘들었다.
대체 누가…….
“박유진, 계단 저쪽이지?”
“응? 아, 맞아. 얼른 올라가자.”
나는 재빨리 생각을 멈추고 계단 쪽으로 향했다.
지금은 다른 것보다 고민수를 확인하러 가는 게 급선무였다.
“여기에서도… 전투가 있던 거 같네?”
“맞아. 근데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운 거 같은데.”
나는 계단에 쓰러진 박살 난 로봇들을 바라봤다.
로봇들은 제대로 된 공격도 못 한 채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 선명히 보였다.
“후우, 근데 이 빌딩은 엘리베이터 같은 거 없어?”
“없다고 하더라.”
나는 이민아와 함께 빠르게 건물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최상층에 있던 고민수의 연구실로 들어갔는데…….
“고민수 씨!”
“으으……. 왔구나.”
“괜찮으세요?”
“죽지는 않았어.”
고민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쓰러진 듯이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 있던 거죠?”
나는 연구실을 둘러보며 물었다.
온갖 로봇들과 총기들이 박살 난 채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마치 엄청난 전투가 있었던 듯했다.
“누군가가 이곳을 습격했어.”
고민수는 마도구로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며 설명했다.
“단 한 명이 습격했는데, 그 한 명에 의해 이곳이 완전히 털렸지.”
“우선 상처부터 치료하세요. 지금 배에서 피가…….”
“깊은 상처가 아니니까 걱정할 거 없어. 그냥 총칼로 배를 찔린 것뿐이야.”
근데 그게 오히려 이상해, 라고 고민수는 덧붙였다.
“나를 확실히 죽일 수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나를 죽이지 않았어. 배를 칼로 찌른 것도, 나를 죽이기보다는 그냥 잠시 무력화시킬 목적인 거 같더라고.”
“일단 죽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이민아, 고민수 씨를 일단 병원으로…….”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상처를 마도구로 얼추 치료한 고민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럴 시간이 없어. 그 남자가 윤경이를 데려갔거든.”
“아, 하윤경. 그러니까 하윤경을 그 남자가…….”
“맞아. 나를 쓰러뜨리고 바로 데리고 어디로 가더라고.”
고민수는 근처의 컴퓨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근처의 모니터에서 영상이 재생이 되었다.
검은색 군복에 소총을 든 남자가 이 빌딩에 있던 모든 로봇들을 손쉽게 쓰러뜨리는 영상이었다.
“이 남자가 윤경이를 데려갔어. 어디로 데려갔는지 모르지만, 내가 추리하자면…….”
“그 지하 연구소요?”
“응, 아마 거기로 데려갔을 것만 같은 느낌이야.”
“야, 야. 박유진. 잠깐만.”
이민아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방금 하윤경이라고 한 거지? 하윤경이라면, 몇 달 전에 그…….”
“가는 길에 설명해 줄게.”
이민아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 뒤, 나는 다시금 고민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민수 씨. 일단 병원으로 가서 치료받으세요. 하윤경은 저와 이민아가 어떻게든…….”
“아니, 나도 같이 갈 거야.”
고민수는 근처의 마도구들, 그러니까 전투에 쓸 법한 마도구들을 몇 개 꺼내며 말했다.
“윤경이를 구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이왕 시작한 거 끝을 봐야겠거든.”
* * *
“히히히……. 오랜만에 자유를 얻게 됐네.”
하윤경은 발찌가 사라진 자신의 발목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그녀는 옆에 있던 검은 군복의 남자를 바라봤다.
“신이 보낸 사자라고 했지?”
“예, 맞습니다. 위대하신 분은 하윤경 님이 인류를 위한 위대한 업적을 마무리 짓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저를 보낸 겁니다.”
“흐흐흐, 어떤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고맙네. 이렇게… 인류가 진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다니 말이야.”
하윤경은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계속 지었다.
“아, 맞다. 근데 너, 방금 그런 말 하지 않았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박유진을 죽이는 게 먼저입니다. 위대하신 분은 당신께 그것 또한 원하고 있습니다.”
“박유진……. 그래, 죽여야지. 그 개새끼는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일 거야.”
“좋은 자세입니다. 그리고 그런 당신을 위해 위대하신 분의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선물?”
“한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검은 군복의 남자가 손을 휘두르자 하윤경 앞에 세 명의 존재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의 등장에 하윤경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뭐야, 얘네 아직 살아 있었네? 크크큭. 그보다, 이 셋을 내게 주는 건… 이 셋으로 박유진을…….”
“예, 이 세 존재를 이용해 박유진을 죽여 주시면 되겠습니다.”
“얘네들 아직 내 말 듣는 거지?”
“예, 맞습니다. 위대하신 분께서 이 셋에게 손을 대기는 했지만, 그들의 뇌에 설치된 기계는 안 건드렸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하윤경 님이 박아 놓은 기계를 말하는 겁니다.”
“하하하하!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하윤경을 크게 웃었다.
그녀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자신이 하던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박유진을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있다는 점까지 모두 마음에 든 것이었다.
“그럼 정수민, 이지현, 그리고 조원선! 너희 셋, 아직도 박유진을 증오하지? 크크큭, 그 증오를 마음껏 풀 수 있게 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