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으, 으윽.”
“음? 괜찮아요?”
“어, 으으……. 응, 괜찮아.”
하윤경과 같이 계단을 내려가던 중, 그녀는 잠시 머리를 매만지며 휘청거렸다.
“그냥… 머릿속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거 같아서.”
“머릿속에 움직이는 거라면…….”
“응,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을 거야.”
하윤경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괴수들의 신이 내 머리에 심어 놓은 그 이상한 기운, 그거야.”
“그 기운을 아직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 거라고 했죠?”
“응, 일단 운이 좋아서 잠시 그걸 잠재워 놓은 것 같지만, 완전히 없애려면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힘들어.”
하윤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완전히 없애려면 아까 말한 것처럼 민수 오빠의 도움이 필요할 거야.”
“고민수 씨가 일어나려면 아직 멀었죠?”
“생각보다 치료가 빨리 진행된 덕에 아마 두 시간이나 세 시간 뒤에 깨어날 거 같아. 근데 민수 오빠도 안정을 취해야 해서 내 치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면 내일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때까지 버틸 수 있겠어요?”
나는 하윤경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너무 지체하다가 괜히 또 하윤경 씨가 미쳐 버리면…….”
“아마 내일이나 모레까지 버틸 수 있을 거야.”
하윤경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 그럴 거 같은 감이 들어. 게다가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왜죠?”
“네가 있으니까.”
“그게 무슨 의미죠?”
“내가 미쳐 버린 상태였을 때, 네가 나를 잘만 통제했잖아. 안 그래?”
“그거야… 마도구가 있었기 때문이죠.”
나는 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은 무용지물이 된 반지였다.
“제가 예전에 채웠던 그 발찌는…….”
“더스트가 없앴지. 마법에 대한 지식이 있던 건지, 생각보다 이 발찌를 쉽게 풀더라고.”
하윤경은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대충 눈치챈 듯한 표정이었다.
“이거 세트 하나 더 구해다 줄까? 너도 여차하면 나를 통제할 수단이 하나 필요할 거 아니야.”
“이 연구소에 하나 더 있나요?”
“아니, 없어. 근데 만드는데 그렇게 어려운 물건은 아니라 반나절이면 새 반지와 발찌를 만들 수 있어.”
“그럼 나중에 부탁드릴게요.”
“그래, 일단은 하려던 일이나 마저 하자.”
하윤경은 다시금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내려가면서 들어.”
“신의 기운에 관한 이야기죠?”
“응, 맞아. 네가 저번에 내게 부탁한 거 기억하지? 인공적인 신의 기운을 만들어 달라는 거.”
“당연히 기억하죠.”
인공적으로 만든 신의 기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지만 광기에 물들었던 하윤경은 그걸 진짜로 시도했다.
아니, 시도에서 끝난 게 아니라 진짜 실현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그래서 그 일은 어떻게 됐나요? 하윤경 씨가 정상이 아니었을 때 그 일을 시키기는 했었는데, 진행이 어디까지 됐는지 확인 못 했거든요.”
“마지막 단계까지 갔었어. 사실상 거의 다 완성된 거지.”
하윤경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지금 필요한 건 순수한 신의 기운 그 자체야. 그것만 있으면, 네가 원하는 게 완성이 되는 거지.”
“순수한 신의 기운이요?”
“그치. 모순적이지. 인공적인 신의 기운을 만들기 위해 순수한 신의 기운 그 자체가 필요한 거니까.”
“순수한 신의 기운을 그 자체를… 구할 수 있는 건가요?”
“지금 구하려고 가는 중이잖아.”
하윤경은 계단은 아래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와이번을 보러 가는 중 아니었어?”
“맞는데……. 으음, 뭐. 신의 기운을 손에 넣는다고 쳐요. 근데 그러면 차라리 인공적인 신의 기운보다 그냥 손에 넣은 그 기운을 제가…….”
“나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야.”
하윤경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에게서 직접 얻어 낸 신의 기운을 인간의 몸에 주입한다. 그 시뮬레이션을 돌려 봤는데, 어… 인간의 몸으로는 그걸 못 버티더라고. 827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려 봤고, 그중 신의 기운을 온전히 버텨 내는 결과는 없었어.”
“하지만 저는 그동안 신의 기운을 잘만 이용했는데, 왜…….”
“너와 다른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신의 기운을 빌린 것에 가까워. 내가 지금 말하는 건, 신의 기운을 자신의 신체 일부로 받아들이는 거야.”
“인간의 몸으로는 그걸 못 버틴다는 거죠?”
“못 버틸 거야. 물론 신체 내구도가 일정 이상으로 뛰어나면 잠깐은 버티겠지만, 얼마 못 가서 죽게 되겠지.”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럼 인공적인 신의 기운이라면…….”
“인간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끔 내가 조절해야지. 물론 출력은 약해지겠지. 그래도 일단 안전하게 쓰는 게 중요한 거잖니?”
“그렇기는 하죠. 으으음,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네요.”
나는 다시금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새 이 지하 연구소의 최하층, 그러니까 지하 감옥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감옥의 구석에 와이번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쇠사슬에 온몸이 묶인 채 참든 상태였다.
“그럼 제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이죠?”
“간단해. 저 여신에게서 신의 기운을 받아 오는 거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줄 수 있을까요?”
“내 연구가 옳다는 가정하에… 신들 사이에서도 종류가 있어.”
하윤경은 차분히 내게 설명했다.
“선천적으로 신이었던 존재와… 후천적으로 신이 된 존재지. 그리고 후천적으로 신이 된 존재는 신의 기운을 다른 신에게 물려받은 경우야.”
“으음, 잠시만요. 신의 기운을 물려받는다고요? 하지만 방금 신 외의 존재는 신의 기운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아. 일반적으로 그래. 인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생명은 신의 기운을 절대 못 받아들여. 하지만 후천적으로 신이 된 존재들은… 일반적인 생명이 아니지. 그들은 이미 기존의 자신을 초월하게 된 존재들이야.”
“그러니까 그런 놈들은 신의 기운만 없었을 뿐, 이미 신과 동급인 존재들이었다는 거죠?”
“그렇지. 그리고 이후에 다른 신에게 신의 기운을 물려받는 식으로……. 뭐, 대충 그런 식의 방법으로 후천적으로 신이 됐겠지.”
하윤경의 설명에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대충 뭔지는 알겠네요. 근데 이런 건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죠?”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나는 평생 신에 대해 연구를 했어. 그리고 지구상에 신이 남긴 흔적들이 의외로 꽤 많아. 그것들을 전부 모아서 연구하다 보니까 상당한 정보가 모이더라고.”
“그렇군요. 뭐, 아무튼. 후천적으로 신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건 알겠어요. 근데 그건 제게 지금 왜 알려 주신 거죠?”
“저 여신도 후천적으로 신이 된 케이스거든.”
하윤경은 감옥에 갇힌 와이번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천적으로 신이었던 존재들은 신의 기운을 양도 못 해. 하지만 후천적으로 신이 된 자들은 아니야. 그들은 본인의 의지로 얼마든지 신의 기운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어.”
“그러니까 지금 저보고 와이번에게서 신의 기운을 뺏어 오라는 건가요?”
“뺏는 건 불가능해. 신의 기운은 오직 원주인이 스스로의 의지로 포기해야만 얻어 올 수 있어.”
“…상황을 이해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에 하윤경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준비해 놓은 방법 말이야. 그거라면…….”
“원래 이럴 의도로 시작한 계획은 아니었는데, 뭐, 좋은 게 좋은 거죠.”
나는 와이번이 갇힌 감옥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천천히 해. 내 도움 필요하면 부르고.”
“알겠어요.”
나는 대충 대꾸한 후, 와이번 쪽으로 다가갔다.
“야, 와이번. 일어나 봐.”
“으, 으으…….”
“얼른 일어나라니까.”
“…어? 어?!”
내 목소리에 눈을 뜬 와이번.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바, 박유진?! 너, 너냐?! 진짜로 너냐?!”
“그럼 내가 나지, 누구겠냐?”
“진짜로 네가 맞는 거지? 환각이라든가 그런 게 아니라?”
“어……. 아니지. 그치. 나는 환각 같은 게 아니지?”
“…아, 진짜로 너구나. 그 여자의 환각이나 속임수 따위가 아니야.”
와이번은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박유진. 제발… 내 자존심을 전부 포기하고 부탁할게……. 제발… 제발 나를 구해 줘……. 더 이상 그 여자에게 고문당하기 싫어…….”
“어떤 식으로 고문당했는데?”
“어떤 식이었냐고? 살갗이 파이고, 신체 부위가 떨어졌다가 다시 붙는…….”
와이번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상세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와이번은 조금씩 떨었다.
마치 그 기억을 떠올리는 거 자체가 공포라는 듯이 말이다.
“…하.”
와이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고개를 뒤로 살짝 돌렸다.
뒤에 있던 하윤경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주 제대로 고문을 했나 보네.’
내가 아무래도 하윤경의 악랄함을 과소평가했던 듯했다.
물론 그때의 하윤경은 신에 의해 머릿속이 헤집어졌던 상태임을 감안해야겠지만 말이다.
“진정해, 인마.”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나는 지금 계속 고문만 당해 왔어! 제발! 그러니까 제발 나 좀 구해 줘! 이제 뭐든 할 테니까 제발…….”
“알겠으니까 진정해.”
나는 감옥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조용히 구경 중이던 하윤경의 나의 행동에 꽤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당장은 이 방법이 가장 효율적일 듯했다.
“가만히 있어 봐.”
나는 와이번의 몸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풀었다.
물론 전부 푼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와이번이 몸을 편하게 가눌 수 있을 정도로 풀었다.
“어? 너 뭐 하는 거야?”
“환자를 돌봐 주는 거지.”
“…응?”
“아픈 곳 말해 봐. 그리고 먹고 싶은 거 있어?”
“…물. 그리고 고기.”
“알겠어.”
나는 뒤를 돌아 하윤경을 바라봤다.
내 의도를 눈치챈 건지 하윤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으로 향했다.
하윤경이 이동하자 와이번은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저, 저 여자! 왜, 왜 여깄는 거야?! 나, 나를 또 고문하려는……. 서, 설마 너도 나를…….”
“그런 거 아니야. 나는 너를 도우려고 하는 거야.”
“…나를 도우려고 한다고?”
“응, 도우려고.”
나는 몸을 낮춰 와이번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많이 있었다.
그녀의 상처에 손을 가져가자 와이번은 두려운 듯이 몸을 떨었다.
하지만 동시에 와이번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감동받은 듯한 눈빛이었다.
내가 내민 구원의 손길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하는 눈빛이기도 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누군가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면… 보통은 이성적으로 생각 못 하게 되지.’
와이번이 가지고 있는 신의 기운.
이 신의 기운은 원래의 소유자가 자의적으로 포기해야 했다.
그러도록 만들기 위해… 나는 와이번의 마음을 조금 갖고 놀아 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