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사는 전격계 헌터-232화 (232/240)

232화

“더, 더 줘. 물을 더…….”

“천천히 마셔. 그러다가 체한다.”

나는 하윤경이 가져온 물을 와이번의 입에 천천히 부었다.

이에 와이번은 며칠 동안 물을 아예 못 마신 것처럼 반응했다.

‘…며칠 동안 못 마신 게 맞나?’

어쩌면 며칠이 아니라 몇 주 동안 굶은 것일지도 몰랐다.

“고기는 일단 날고기를 들고 왔는데, 이걸 먹을 수…….”

“먹을 수 있어. 입에 넣어 줘. 빨리.”

와이번은 간절한 눈빛으로 내 손에 들린 고기 조각을 바라봤다.

이에 나는 날고기를 작은 조각으로 찢으며 와이번의 입에 넣어 줬다.

“천천히 먹어. 빈속에 그렇게 급하게 먹으면 안 된다니까.”

“너무… 배고팠어.”

와이번은 내가 준 고기 조각을 빠르게 삼키며 말했다.

“신이라서 굶어 죽지는 않지만… 고문을 당하고 몇 주 동안 아무것도 못 먹는 건… 나라도 힘들어.”

“그렇겠지.”

확실히 와이번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 비해 야위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달라진 건 그녀의 눈빛이었다.

‘의지가 많이 꺾인 눈빛이야.’

예전에는 절대 내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눈빛을 보이던 와이번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빛은 간절했다.

그러니까 나의 도움이 간절하다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꺾이지는 않은 거 같네.’

안전하게 일을 진행하려면 와이번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 버려야 했다.

그녀가 나에게 완전히 의존하게끔 말이다.

“박유진. 제발 나를 여기서 꺼내 줘. 뭐든지 할 테니까, 그 여자가 나를 고문 못 하게 막아 줘. 제발.”

“가능은 해.”

“…뭐라고?”

“여기서 너를 꺼내 주는 게 가능하다고.”

“그, 그렇다면… 뭐든지 할게. 너를 위해 뭐든지 할 테니까, 제발 나를…….”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뭐든지?”

“어… 어?”

내가 되묻자 와이번은 당황하며 잠시 망설였다.

이에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너의 모든 걸 포기하고 내 노예가 될 수 있겠어?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가진 신의 힘까지 전부 포기하고 내게 넘길 수 있겠어?”

“…신의 힘을? 그러니까 내가 지닌 이 신의 기운을 전부 너에게 넘기라고?”

“그걸 넘기면 너를 풀어 줄게.”

“…….”

와이번은 말을 잃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내 제안에 잠시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사나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는 신이야. 내가 인간 따위에게 내 신으로서의 권위와 힘을 포기할 것…….”

“그럼 어쩔 수 없네.”

나는 와이번의 입을 향해 고기 한 조각으로 가져갔다.

이에 와이번은 나를 노려보면서도 내가 준 고기를 먹었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말해 줘.”

“내 마음이 바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내가 고작 이런 것 때문에 신으로서의 모든 걸 포기할 거 같아?”

“뭐, 미래라는 건 모르는 거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와이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건 그렇고, 너도 꽤 고생을 많이 했구나.”

“뭐, 뭐 하는 거야?”

“네 고생의 흔적을 살피는 중이지.”

나는 와이번의 손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전에는 없던 흉터들이 많이 생겨 있었다.

“이, 이건 너 때문에 생긴 거잖아! 네가 나를 여기에 가둔…….”

“어쩔 수 없던 거야.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고.”

나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물론 너무나도 뻔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내 말에 와이번은 눈빛이 살짝 떨리는 모습을 보였다.

‘심적으로 많이 몰려 있나 보네.’

이런 뻔한 거짓말에 흔들릴 정도인 걸 보니 고문의 효과가 확실하기는 한 듯싶었다.

와이번에게 미안했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을 어떻게든 갖고 놀아야만 했다.

그래야지만 그녀에게서 신의 기운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얼굴도 많이 다쳤네.”

“그러니까 이건 너 때문…….”

“방금 말했잖아. 나도 이러고 싶은 게 아니었다고.”

나는 와이번의 얼굴에 손을 가져가며 따뜻하게 말했다.

이에 와이번은 놀라며 내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너를 어떻게든 도와줄 테니 너도 내게 최대한 협조해 줘. 알겠지?”

“…으으으. 너, 너……. 으흑……. 아이씨, 이 인간 따위가…….”

와이번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내게 왜 갑자기 이렇게 따뜻하게 구는 건데?! 내, 내가 너 때문에 이 고생인데, 네가 갑자기 이러면 내가… 내가…….”

“고생이 많았구나.”

“으흑…….”

너무 오랜만에 따뜻함을 느껴져서인지 와이번은 급격히 무너진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 무너지는 걸로는 부족했다.

더욱더 무너져야만 와이번은 모든 걸 포기할 터였다.

“내가 최대한 너를 도와줄게.”

나는 와이번을 살며시 안으며 말했고, 이에 와이번은 더 크게 울었다.

그래, 당장은 이런 식으로… 와이번이 내게 완전히 마음을 열 수 있게끔 속여야 했다.

* * *

“…그러니까 나보고 와이번을 더 강하게 고문하라고?”

“힘든 상황일수록 마음의 벽이 더 쉽게 무너지는 법이죠.”

와이번의 감옥에서 나온 후.

나는 하윤경의 연구실에서 그녀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문만을 통해 와이번에게서 신의 기운을 얻어 낼 수는 없을 거예요. 그녀가 스스로의 의지로 신의 기운을 포기하게 만들어야 하죠.”

“그러니까 이 연극을 하겠다는 거니?”

하윤경은 헛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완전히 무너진 여신에게 따뜻한 척을 하며 다가가 그녀를 방심시킨다?”

“매우 힘든 상황에서 누군가가 따뜻한 손길을 내밀면 대부분 어떻게든 그 손을 붙잡으려고 하는 법이죠.”

나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든, 그러니까 말 그대로 모든 걸 내줄 수도 있죠.”

“어째 이런 방법을 전에도 써 봤다는 느낌이네?”

“…제 과거가 썩 깨끗한 편은 아니거든요.”

나는 대충 얼버무렸고, 이에 하윤경은 한숨을 쉬었다.

“네 의도는 알겠어. 근데 내가 제대로 고문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예전에야 내가 미쳐 있어서 거리낌 없이 했지만, 지금은… 고문하면서 내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까 걱정되네.”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여기서 하윤경 씨가 잘해 줘야 신의 기운을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기는 한데…….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네 목에 걸린 그 돌멩이 말이야.”

“아, 이거요?”

“거기에도 신의 기운이 담겨 있거든? 그냥 저 돌멩이를 분해하면…….”

우우웅! 우웅! 우우우웅!

하윤경의 말에 엔드리온의 조각은 항의하듯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은 그 방법이 싫다고 하네요.”

“…생각해 보니 저 돌멩이에게도 자아가 있었지?”

하윤경은 흥미롭다는 듯 엔드리온의 조각을 잠시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알겠어. 와이번은 내가 다시 한번 고문해 볼게.”

“부탁드릴게요.”

“그래, 뭐……. 일단 너도 가서 조금 더 쉬고 와. 나는 민수 오빠를 다시 보고 올게.”

“네, 그럼 저는……. 아, 하윤경 씨?”

“왜?”

“혹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생각 있나요?”

“원래 모습? 그건 무슨……. 아.”

하윤경은 내 말의 의미를 바로 눈치챘다.

“내가 어른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

“네. 나중에 고민수 씨에게 마저 치료받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생각이 있으면…….”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볼게.”

하윤경은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내가 이 어린애의 모습으로 지내면서… 고민이 조금 많아졌거든.”

“어떤 고민인지 알 수 있을까요?”

“…나중에 말해 줘도 될까?”

“상관없죠.”

“응, 그럼…….”

하윤경은 말끝을 흐리며 자리를 떴다.

이에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 이민아가 있던 거주 공간으로 갔다.

“뭐야? 깨어 있었네?”

“응, 10분 전쯤에 깼어.”

이민아는 피곤한 듯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근데 너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나 잠들 때까지만 해도 내 옆에 있었잖아.”

“잠시 해야 할 일이 있었거든.”

“너무하네. 잠든 그… 여, 여, 여자 친구를 무방비하게 놔두고 가고 말이야.”

이민아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고, 이에 나는 피식 웃었다.

“이제 네가 내 여자 친구인 거냐?”

“으음? 그, 그럼 아니냐?”

“아니, 맞지.”

나는 이민아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고, 그녀는 내 옆으로 와 달라붙었다.

그러고는 내 눈치를 보며 내게 아주 살짝 기댔다.

“흠.”

“뭐? 왜? 부, 불만 있어?”

“그런 거 아니야, 인마.”

나는 이민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에 그녀는 움찔거리며 더욱더 내 눈치를 봤다.

근데 그러다가 이민아는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야, 너.”

“왜 그래?”

“혹시 나 잠든 사이에 여자 만나고 온 거 아니지?”

“여자라면 뭐……. 하윤경?”

“아니, 그 사람 말고……. 뭔가 내 감이 말해 주는데……. 너 혹시 다른 여자 꼬시고 온 거 아니지?”

“아니, 그런 적 없…….”

이민아가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었는데,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와이번도 일단은 여자이기는 하지?’

근데 와이번을 꼬시려는 게 아니라 그녀의 의지를 굴복시키려는 게 내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민아의 직감은 그것조차 안 좋게 보는 듯했다.

“뭐야, 그 반응? 찔리는 게 있나 봐?”

“그런 거 아니야, 인마. 진짜로.”

“흐음.”

이민아는 신경 쓰인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럼 그 증거로… 그… 나, 나를… 아, 안아 줘.”

“…푸흡.”

“우, 웃지 마, 새끼야! 돼, 됐고, 나, 나 얼른 안기나 해!”

“네, 네. 알겠어요.”

나는 작게 웃으며 이민아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이민아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딴 여자에게 눈 돌리기만 해 봐. 죽여 버릴 거야.”

“알겠어, 인마. 알겠어.”

나는 이민아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대꾸했다.

그렇게 나는 이민아와 잠시 시간을 보내며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는데…….

우우웅.

갑자기 내 목에 걸려 있던 엔드리온의 조각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 돌멩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밖에 나가라고?”

우우웅.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나는 일단 이 돌멩이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기로 했다.

뭔가 그래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민아. 나 잠시만 나갔다 올게.”

“응? 나갔다 온다고?”

“금방 돌아올게.”

나는 이민아를 뒤로한 채 지하 연구소 밖으로 나갔다.

“나왔어.”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근처는 인기척이 아예 안 느껴지는, 조용하고 어두운 숲이었다.

“내게 따로 전할 말이라도 있던 거야?”

“응, 맞아.”

“…음?”

“너에게 따로 전할 말이 있거든.”

엔드리온의 조각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그 조각에게서 푸른색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한곳에 모이더니 여자의 형상을 띄웠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건… 사실상 처음이지?”

“…네가 엔드리온이지?”

“만나서 반가워, 박유진.”

엔드리온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