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나는… 더 이상 고통을 받고 싶지 않아.”
한참을 서럽게 운 이후.
어느 정도 진정한 와이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줄게. 다 줄게. 뭐든 다 할 테니… 이 고문을 멈춰 줘.”
“내가 전에 말했지만…….”
“받아 가. 신의 기운이든 뭐든, 그냥 가져가.”
이 말과 함께 와이번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내 고통을 끝내 줘, 제발.”
이 말과 함께, 와이번의 가슴에서 무언가가 나왔다.
무슨 커다란 짐승의 이빨처럼 생긴…….
‘아니, 짐승이 아니야.’
나는 저 모양의 이빨을 알고 있었다.
저건 드래곤의 이빨과 모양이 상당히 유사했다.
“나의… 신의 기운이야. 내게 신으로서의 권위를 주는 물건이야. 이게 없으면 나는 그저 평범한 드래곤, 아니. 그냥 흔한 몬스터로 돌아가겠지만, 이 이상 고통을 받고 싶지 않아. 제발 나를 살려 줘, 박유진.”
“걱정 마. 이걸로 너는 더 이상 고통받을 일은 없을 거야.”
나는 와이번에게서 커다란 이빨을 받아 가며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의 고문은 없을 거고, 너는 곧 이 감옥에서 나올 수 있을 거야.”
“그, 그렇다면 당장…….”
“조금만 기다려 줘. 금방 다시 올 테니까.”
와이번은 내게 손을 뻗었으나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 박유진. 잠깐만. 내 힘만 뺏고 이대로 나를 버릴 거면…….”
“걱정 마, 와이번. 나는 널 버리거나 하지 않을 거야. 네가 신의 기운을 내줬으니, 나도 약속을 지킬 거야.”
나는 피식 웃으며 와이번에게 말했다.
“그리고 미리 말하는데, 너는 이걸 내게 넘긴 걸 후회하지는 않을 거야. 후회 따위가 되지 않게끔 내가 최대한 잘해 주도록 할게.”
* * *
“어때요, 하윤경 씨. 이거면 될까요?”
“으음, 이 정도면……. 응, 완벽하네.”
커다란 이빨을 기계에 넣어 분석하던 하윤경.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신의 기운을 이 이빨에서 추출했고, 이걸로 나머지 작업을 진행하면 될 거야.”
“인공적인 신의 기운을 만들 수 있는 건가요?”
“방금 이 컴퓨터로 시뮬레이션을 여러 번 돌렸어.”
하윤경은 내게 모니터를 보여 주며 말했다.
“100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렸고, 결과는 전부 성공. 특별한 변수가 발생하지 않은 이상, 인공적인 신의 기운은 확실하게 만들 수 있을 거야.”
“알겠어요. 완성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조건이 전부 갖춰졌으니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길어 봤자 5일이야.”
“5일. 알겠어요. 그럼 부탁드리도록 할게요. 아, 참. 그리고 하윤경 씨.”
“왜?”
“고민수 씨에게 머릿속을 치료받는 건…….”
“오늘 안에 할 생각이야.”
하윤경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연구실 안에 있던 고민수가 천천히 걸어왔다.
“이왕 하는 거 빨리 끝내는 편이 좋겠지.”
“민수 오빠. 왜 나왔어. 아직 오빠는 쉬어야 한다고 내가…….”
“움직일 수 있으면 된 거야.”
고민수는 우리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러나 그는 걷는 것조차 상당히 힘들어 보였다.
정확히 말해, 숨쉬는 게 조금 버거워 보였다.
“폐 쪽을 다쳤다고 했죠?”
“맞아. 내가 치료를 제대로 했지만, 아직 완치는 안 됐어. 그러니까 민수 오빠. 가서 쉬고 있어. 어서.”
“너 언제 또 제정신을 잃을 줄 모른다면서. 그럼 얼른 치료를 해야지.”
“그 상태로 할 수는 있고?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뭘 하겠다는 거야?”
“어차피 중요한 건 전부 기계가 해 줄 거야. 나는 그냥 입력만 제대로…….”
“뭐, 이건 두 분에서 알아서 상의하세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나는 한발 빠지기로 했다.
“아무튼, 하윤경 씨. 신의 기운에 대해서는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혹시나 무슨 문제 생기면 저 부르고요. 특히 만약 머릿속이 다시 이상해지면…….”
“응, 그런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바로 너 부를게. 근데 너 지금 어디 가려는 거야?”
“별것 아니고, 다시 지하 감옥 쪽에 가 보려고요.”
“지하 감옥?”
내 말에 하윤경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하 감옥에는 또 왜 가? 너 이미 신의 기운을 얻었잖아. 그럼 이제 굳이 와이번에게 갈 필요는…….”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저는 제가 한 말을 어지간해서 지키는 편이거든요.”
나는 연구실에 있던 치료용 마도구들 몇 개 챙기며 말했다.
“그나저나 하윤경 씨. 대체 와이번을 어떻게 고문을 한…….”
“미리 말하는데, 나도 누군가 고문하는 거 안 좋아해. 내가 미쳤을 때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제정신이 박힌 지금은 그런 걸 혐오해.”
“…죄송한데, 그런 것치고 와이번의 상태가…….”
“상황이 상황인 만큼, 내가 조금 강하게 나갔어.”
하윤경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빠른 시일 내에 신의 기운이 필요할 것 같았거든.”
“뭐, 하기야……. 힘써 주신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그동안 널 고생시킨 거 생각하면 이쯤은 해 줘야지. 그것보다, 그 치료 마도구 들고 와이번에게 가려는 거야?”
“그렇죠. 이번 기회에 한번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 보려고요.”
“…괜찮겠어?”
하윤경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신의 기운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와이번은 그래도 한때는 신이었어. 그리고 신이 될 수 있던 건, 그만큼의 힘을 가졌기 때문이었겠지. 지금은 신이 아니지만, 절대 약하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이게 있으니까 가능하지 않을까요?”
나는 하윤경에 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여 주며 말했다.
이에 하윤경은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그러고 보니 와이번에게 아직 그 발찌를 채워 놨었지?”
“네, 아직 있었어.”
“가능…하겠지? 오히려 신의 기운을 잃었으니 더 수월할지도 몰라.”
하지만 조심해, 라고 하윤경은 말을 잃었다.
“네가 지금 상대하는 건 한때 신이었던 존재니까.”
“명심하도록 하죠.”
나는 대꾸를 하며 근처에 보이던 약품들을 몇 개 더 챙겼다.
* * *
“움직일 수 있겠냐?”
“아니…….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후우, 어쩔 수 없나.”
나는 챙겨 온 마도구들 중 하나를 코트 주머니에서 꺼냈다.
평범한 막대기처럼 생겼지만, 일단 이것도 마도구였다.
내가 막대기에 있던 버튼을 누르자 막대기의 끝에서 물줄기가 흘러나왔다.
“뭐, 뭐 하는 거야? 왜 갑자기 물을…….”
“샤워실에 들어가서 혼자 알아서 씻고 나오라 할 생각이었는데, 너 지금 못 움직인다면서.”
나는 피투성이가 된 와이번의 몸을 물로 씻기기 시작했다.
“내가 씻겨 줄게.”
“뭐? 네가 감히 나를…….”
“이제 신도 아닌 게 뭘 잃을 게 남았다고.”
“내게도 아직 자존심이라는 게…….”
“자존심이고 뭐고, 얼른 옷이나 벗어. 아니면 제대로 치료 못 받고, 피투성이인 채로 있을래?”
“어차피 나는 혼자서도 치유가…….”
“너도 몇 번 고문당했으니까 알잖아. 하윤경이 한 고문 방법은 특수해서, 너의 초재생 능력이 제대로 안 먹힐걸?”
“…….”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이후, 나는 와이번의 몸을 간단히 씻기고 그녀의 몸을 치료해 줬다.
“후우우. 일단 간단한 것들은 전부 치료했어. 자, 이제 좀 움직일 수 있겠지?”
“걷는 건 문제가 없는데, 아직 몸 상태가 이상해.”
“그렇겠지. 고문으로 네 몸이 아주 제대로 작살이 났거든.”
나는 이 말과 함께 들고 온 여벌의 옷을 와이번에게 건넸다.
“이거 입어. 계속 옷 벗고 있으면 좀 그렇잖아?”
“…쳇.”
와이번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가 준 옷을 입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 몸에 제대로 힘이 안 들어가는지 그녀는 들고 있던 옷을 자꾸 떨어뜨렸다.
“이쪽으로 와. 내가 입혀 줄게.”
“…부탁할게.”
와이번은 수치스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옷을 입히던 중, 와이번은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박유진. 너는 나를 왜 도와주는 거냐? 나에게 더 이상 가치 따위는 없을 텐데 왜…….”
“나는 한 말을 지키거든.”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내게 원하는 걸 줬으니, 나도 네가 원하는 걸 들어줘야지. 너는 더 이상 고통받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그… 그랬지.”
“고통을 안 받으려면 상처도 전부 치료해 줘야 하거든. 뭐, 됐고. 야, 걸을 수는 있다고 했지?”
“걸을 수는 있는데…….”
“아, 계단 올라가는 건 아직 힘들 수도 있겠네. 그렇다면…….”
나는 와이번을 간단히 들어 올려, 계단 쪽으로 이동했다.
이에 와이번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뭐, 뭐 하는 거야?”
“너를 마저 제대로 치료하려면 위층의 기계들을 써야 하거든.”
“…그런 거냐?”
와이번은 또다시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이내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치료한 뒤에…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 뒤로 너의 자유야. 떠나도 좋고……. 물론 여기에 남아도 좋아.”
“남아도 된다고? 이 세상에?”
“응, 대신 여기에 남게 되면… 너는 내 명령을 따라야 할 거야. 그러니까 저 발찌를 계속 차고 다녀야 하겠지.”
“…….”
와이번은 잠시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눈을 감으며 머리를 내 가슴에 기댔다.
“신으로서의 모든 힘을 잃은 나는… 내 원래 세계로 못 돌아가. 그리고 설령 돌아간다고 해도… 나를 신으로 받들었던 내 동족이 나를 다시 받아 줄지 모르겠네.”
“그러니까 여기에 남을 수밖에 없다는 거지?”
“응. 게다가… 너에게 신의 기운을 넘긴 순간… 이미 너의 노예든 뭐든 되기로 마음을 먹었어.”
“그렇구나.”
나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일이 꽤 잘 풀리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너 전에 나를 반려로 삼는다든가 그런 말을…….”
“…시끄러워. 물론… 그 생각이 지금도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뭐, 그건 내게 말할 게 아니라… 다른 늑대인간 친구가 있거든? 그 친구한테 잘 말해 봐.”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