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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망캐가 되었다-17화 (17/412)

#017화

여관의 생기가 무색하게, 마을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길을 오가던 행인들은 어느덧 자취를 감췄고, 곳곳의 불빛만이 어둠을 밀어내며 일렁일 뿐이었다.

암흑시대 변방 마을들의 흔한 밤 풍경이었다.

그나마 여긴 횃불과 등잔이 곳곳에 있으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보통은 집안만 겨우 밝힌 채 마물들의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으니까.

밤에 돌아다니는 건 외지인이나 떠돌이, 혹은 마물을 사냥하는 자들뿐이었다.

셋 전부에 해당하는 이안은, 주점 입구에 놓여 있던 등잔을 손에 들고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묵묵히 옆에서 걷던 메브가, 문득 입을 열었다.

“무장을 단단히 꾸렸군.”

자꾸 안 어울리는 짓을 하네.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무덤 숲이 멀지 않았잖소.”

이안의 등에는 메이스가 담긴 가죽 걸이가 걸려 있었다.

허리춤의 검집에는 새 장검이. 반대편 허리에는 단검을 담은 검집까지 찬 상태였다.

‘더 마법사 같진 않아졌지만.’

그가 실없는 결론을 읊조리는 사이, 메브가 말했다.

“넌 정말 무덤 숲에 흑마법사가 있으리라 믿는 거군.”

“그렇소.”

이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겪어 보셨다시피, 이 동네에 소문이 퍼진 것들은 거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래. 내가 국경 지대에 떠나 있는 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더군.”

마을 어귀를 응시하는 메브의 녹색 눈동자가 어둠을 머금었다.

“백성들의 삶은 더 어려워졌고. 치안은 혼탁하며, 귀족들은 본분을 잊었다. 내가 보고 자란 모습과도, 전해 들은 소식들과도 다르지.”

“국경에서 오래 계셨나 보오.”

“짧지는 않았다. 그래야만 했고.”

이안은 비로소 메브와 필립이 종종 보이던 어리숙한 모습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겸비한 귀족이라 해도, 암흑시대에 어울리는 덕목은 아니라 생각했었는데.

이들은 정말 인생의 대부분을 국경 지대에서만 보낸 것이다.

그러니 전투력과 전술에는 뛰어날지언정 세상 물정에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어쩌면 그의 말에 대부분 수긍한 건, 그의 판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전쟁이 멀지 않았으니 귀환하라는 왕명을 받았을 때만 해도, 이 지경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지.”

“뭐, 왕국이 태평성대라도 누리고 있는 줄 아셨나 보오.”

“그건 아니다. 달리 지금을 암흑시대라 부르는 것은 아닐 테니.”

비아냥거린 말에도 진지하게 답한 메브가 이내 덧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너를 만나게 된 건 내게 행운인 셈이다. 이안.”

이안은 문득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 역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요한 녹색 눈동자. 붉은 머리칼 때문인지 흐릿한 호롱불 때문인지, 피부가 평소보다도 희게 느껴졌다.

‘오히려 이쪽이 마법사 같은데.’

잡생각을 떨치며 이안이 대꾸했다.

“그 반대요. 내가 운이 좋았지. 흑마법사 놈은 어차피 언젠가 죽여야 할 놈이었는데. 경 덕에 두둑하게 돈까지 받게 됐으니.”

“그래. 너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었겠지.”

메브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저주받은 늪지대에서부터 수많은 사선을 홀로 넘어왔으니 말이야.”

“…….”

미구엘 이 새끼, 뭘 얼마나 떠들어 댄 거야.

“어째서 네 명성이 아겔 란 전역에 퍼지지 않은 것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이안.”

슬슬 거북해진 이안이 내뱉었다.

“그래서 뭐, 내 무용담이라도 더 듣고 싶어 따로 불러내셨소?”

“아니. 말했듯,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메브가 몸을 돌렸다. 마을 어귀의 바위에 기대선 그녀가, 어둠이 내려앉은 밀밭을 바라보았다.

“…내가 흑마법사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귀환 명령을 받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밀밭을 스치는 바람처럼 건조하게 이어졌다.

“귀환에 앞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나는 국경 수비의 중심이었으니, 내 부재가 느껴지지 않도록 세밀하게 신경 써야 했다. 그러던 중에, 서찰 한 통이 도착했지.”

아, 결국 이걸 말하려던 건가.

한숨을 삼킨 이안은, 등불을 바위에 올려놓고는 메브의 곁에 섰다.

여전히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고용주이자 전우였고, 더는 말을 자를 핑계도 없었다.

“…버논이 보낸 편지였다.”

처음 만난 날에도 들었던 이름.

이안은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버논은 누구요?”

“내 하나뿐인 아우다. 버논 리우렐. 리우렐 가의 가주이자, 대를 이어 왕가를 수호하는 방패이지.”

남매가 다 기사라니, 유서 깊은 기사 가문이시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작 버논 리우렐을 게임에서 본 기억은 없어서였다.

그다지 중요한 역할이 아니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티르 엔의 사도인 귀하가 변방을 지키고, 아우께서 왕의 곁을 지키다니 의아한 일이군.”

정말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언급될 리도 없었다.

“사도이기에 떠난 것이다. 남았더라면 왕의 곁에 머무르고, 가문은 나를 가주로 추대했을 테니. 그렇다면 버논은 응당 누려야 할 것들을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했겠지.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아하….”

동생 사랑이 대단하시군.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누이에게 가문을 빼앗긴 장남이 어떻게 살게 될지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건 그녀가 가주 자리를 포기하면 끝날 문제였으니, 해야 할 선택을 한 것이리라.

그렇다곤 해도 안락한 삶과 권력을 포기하긴 쉽지 않았을 텐데.

그야말로 숭고한 희생이었다.

암흑시대엔 더더욱 보기 힘든.

어쩌면 그 숭고함이 티르 엔의 눈에 든 것일지도 몰랐다.

“그 사실을 버논도 알고 있었다는 게, 문제의 근원이었다. 그 아이는 언제나 내게 증명하고자 했지. 혼자서도 가문을 이끌 수 있음을. 폐하의 곁을 지킬 수 있음을. 나아가 가문을 부흥시킬 수 있다는 것도. 증명할 필요 따윈 없건만.”

“…그래서, 편지에는 뭐라고 쓰여 있었소?”

“왕국에 어둠이 드리웠다 했지. 폐하께서 전쟁 준비에 혈안이 되어 있으신 사이, 조용히 마수를 뻗치고 있다고. 적지 않은 귀족이 연루되었다고도 쓰여 있었다. 어쩌면 왕국의 뿌리까지도.”

잠시 말을 멈춘 메브가, 조심스럽게 품을 뒤적였다.

곱게 접힌 편지지. 편지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이 과거를 오갔다.

거참, 더럽게 뜸 들이네.

이안이 손을 내밀었다.

“읽어 봐도 되겠소?”

“글을 읽을 줄… 그래, 너라면 당연히 알겠지.”

메브가 편지를 내밀었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편지지를 폈다.

버논의 성격을 대변하듯 휘갈겨 쓴 글자들.

“…말씀대로 야망이 넘치시는군.”

이윽고 한쪽 입술을 말아 올린 이안이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를 가문을 부흥시킬 기회로 삼다니 말이오.”

편지에는 흑마법사를 토벌하고, 관련된 자들을 처벌하리란 내용이 길게도 쓰여 있었다. 배덕자들을 뿌리 뽑아 왕국을 구원하고, 그들의 땅을 다스리겠다는 야망까지.

“리우렐 가는 다스리는 영지가 따로 없는 것이오?”

“왕가를 수호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살아왔으니까. 왕의 곁을 지키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버논이 그 사실에 불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편지지를 받아든 메브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언젠가 국경 너머의 혼란을 잠재우면, 그곳에 가문의 터를 잡을 생각이었다. 국경을 수호하는 가문으로. 내가 왕의 곁으로 돌아가고, 버논이 그 영지를 다스리게 할 생각이었지.”

“하지만 그 아우님은 혹시라도 누이가 공적을 가로챌까 싶어, 어떤 단서도 공유하지 않았고 말이오.”

“…….”

메브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이안이 덧붙였다.

“말이 과했다면 사과드리겠소.”

“…네 통찰력에 놀랐을 뿐이다. 정확히 봐서 할 말이 없군.”

뭐 대단한 거라고.

이안은 어깨만 까딱였다.

편지에는 흑마법사의 존재와 자신의 목적에 관한 이야기가 다였다.

메브에게 남긴 말이라곤 왕성에 도착하면 다른 모습으로 맞이하리란 것뿐.

열등감과 인정 욕구에 시달리는 젊은 가주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지 유추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결국엔 그 염려가 현실이 됐군. 경께서 직접 흑마법사를 찾게 만들었으니 말이오. 그것도 용병까지 고용해 가면서.”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메브의 숨결이 순간 흐트러졌다.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다시 평소의 건조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낸 편지의 답장이 오지 않았다. 내가 출발하는 날까지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흑마법사를 토벌하느라 바쁜 것일 수도 있잖소.”

물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한 말이었고, 메브도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가문의 누군가라도 내게 연락했어야 했다. 필시, 자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내게 어떠한 답도 남기지 말라 명해둔 것이겠지.”

“경의 편지가 엉뚱한 자의 손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아닐 것이다. 오래 가문에 몸담은 하인이 전령이었고, 편지를 봉인한 인장은 리우렐 가의 사람만이 풀 수 있지. 재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굳이 가로챌 이유가 없다.”

그렇단 말이지.

“답장을 보낸 지 얼마나 되셨소?”

“한 달. …그리고 오늘부로 일주일이 더 지났군.”

“이런….”

이안은 혀를 찰 뻔한 것을 간신히 멈췄다.

버논이 이미 죽었으리란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한 달은 아주 긴 시간이오.”

이안은 메브를 마주 보았다.

“경이 보시기엔 아직 가주가 무사하실 것 같소?”

“아닐지도 모르지. 어쩌면. 아마도.”

담담한 대답과 달리 불안한 듯 시선을 돌린 메브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평생 나를 넘어서기 위해 수련을 거듭한, 강한 아이니까.”

믿는다기보단 희망사항에 가까워 보이는 말투였다.

그녀는 이안의 대답까지 기대하지는 않은 듯 이내 덧붙였다.

“만약 무사하지 않다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아니, 그렇다면 더더욱.”

그녀가 꾹, 주먹을 움켜 쥐었다.

“흑마법사를 시작으로, 진상을 낱낱이 밝혀내야겠지.”

“흠…….”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로소 메브가 어쩌다 피 흘리는 복수자로 거듭나게 되는지 알게 된 것 같아서였다.

그녀가 어째서 단신으로 왕성까지 쳐들어갔는지. 왜 왕을 죽이려 했는지. 들리지 않던 단말마가 무었는지. 망령이 되면서까지 누구의 복수를 끝마치려 했는지도.

게임에서 흑마법사를 죽인 건 이안이었으니, 아마 메브는 끝내 흑마법사를 찾아내지 못했으리라.

지금으로 봐선 버논의 생사조차 알지 못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광기를 부추기고 잘못된 복수의 대상을 속삭이는 건, 아겔 란의 타락자들에겐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터였다.

‘아주 손쉬운 먹잇감이었겠지.’

이안은 문득 메브를 바라보았다.

그 손쉬운 먹잇감이 지금은 자신의 손에 있는 셈이었으니까.

그것도 명백한 분기점으로 보이는 퀘스트와 함께.

그녀의 운명이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반드시 흑마법사를 찾아달라는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거요?”

이윽고 이안이 입을 열었다.

메브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길 바라긴 하지만. 내가 네게 이 긴 이야기를 한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이안.”

그녀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네 말대로 한 달은 긴 시간이지. 배덕자들이 버논의 목적을 알아차리기에도 충분할 만큼. 그러니 놈들은 본모습을 감추려 할 것이다. 내가 돌아오고 있으니까.”

담담하고 단단한 목소리.

눈빛 역시 등불의 빛을 머금고 가라앉아 있었으나, 이안은 이제 그 너머에 숨겨진 위태로운 감정들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의외로 앳되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뒤를 이었다.

복장과 신분, 말투와 행동이 일종의 후광 효과를 만들었을 뿐.

얼굴만 놓고 보면, 그녀는 이십 대 초중반 정도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평균 수명이 짧은 세계였지만, 그래도 많은 나이라곤 할 수 없었다.

이안의 시점에선 더더욱.

‘이건 뭐, 진짜 소녀 가장이었군.’

“버논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면, 나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돼. 만약 살아 있다 해도 달라질 건 없겠지. 그 아이는 필시, 내 뜻을 따르지 않을 테니.”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내뱉었다.

“그러니까 나는, 믿을 수 있는 조력자가 필요하다. 이안.”

“……!”

이안의 미간이 비로소 좁아졌다.

이래서 말을 빙빙 돌렸던 거군.

심지어 이건 일방적인 부탁이었다.

스스로 사연을 털어놓는, 체면 상하는 짓까지 불사한 끝에 나온.

그건 그녀가 혼자서는 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으리라 결론 내렸다는 의미였다.

동시에 이안을 유일한 대안이라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가 어쩌다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말을 꺼낸 이유 정도는 알 것 같았다.

필립과 미구엘 앞에서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았으리라.

“…그 조력자가 흑마법사와 이미 대립 중이며, 정신력과 통찰력, 무력과 지혜까지 한 몸에 지닌 사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

결정을 종용하기라도 하듯,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연계 퀘스트였다. 타락한 자들.

어둠을 숭배하는 귀족들을 찾아내어 처단하는 것이 목표였다.

보상은 금화와 능력치. 그리고 몇 개의 물음표.

매력적이었지만, 이안은 차분하게 생각을 이어나갔다.

루 솔라의 사도 때도 그랬듯.

무작정 상황과 퀘스트에 끌려다닐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더 편리하고 유리한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선 더더욱.

다행히도, 이 경우엔 그걸 택하는 게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다.

“나는 용병이오. 용병은 결코 부탁만으로는 움직이지 않지.”

아쉬운 쪽이 을이 될 수밖에 없는 건, 이 세계도 마찬가지니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냉정한 목소리로 말한 이안이, 메브의 눈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대신, 의뢰가 끝난 후에 나와 다른 조건의 새로운 계약을 맺고 싶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되겠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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