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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망캐가 되었다-36화 (36/412)

#036화

황망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는, 네눈박이 악어의 머리를 회수해 갔던 경비대장이었다.

“도련님! 대체 무슨 짓을 벌이신 겁니까?”

“도란 경, 가서 형님을 모셔 오시게. 가능하다면, 아버지도.”

멈춰선 데클란이 말했다.

평소처럼 태연한 말투.

도란의 얼굴에 당황이 짙어졌다.

“이, 이런 일을 벌이신 이유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 이건, 어떻게 봐도 영주님께 반기를 든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오른델의 지휘관 중에선 그나마 데클란과 가까운 사이였다.

가장 말단이기도 하고, 판자촌을 오가며 마주칠 일이 많았던 덕분이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염려를 느낀 데클란이 미소 지었다.

“그 반대일세. 오른델의 백성들은 물론 왕국까지 배반한 건 오히려 아버님과 형님이시니까. 심지어 신들까지 배반하고 타락하셨지.”

“타, 타락…?!”

도란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기, 기다리십시오! 이 이상의 접근은 불허하겠습니다!”

소리친 그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팔짱을 낀 데클란이 성벽 위의 병사들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오히려 초조해하는 건 경비병들이었다.

성 앞에 모인 모든 이들이 말없이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대부분은 아는 얼굴이었다.

만약 이게 반란이라면, 그들에게 무기를 겨눠야 한다는 뜻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벽 위로 누군가가 절뚝이며 올라왔다.

기다란 흑단목 지팡이를 짚은, 부드러운 인상의 중년인.

버차드 후작이었다.

‘저 새끼, 게임에선 아들을 잃은 아버지 연기를 아주 잘 했었지.’

속지 말고 죽였어야 했는데.

이안의 눈빛이 가라앉는 가운데.

“오셨습니까, 아버지.”

데클란이 가볍게 몸을 숙였다.

좌중을 돌아본 후작이 말했다.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냐, 아들아?”

“아버지와 형님께서 저지른 부정과 타락을 밝히기 위해서지요.”

“찬란한 루 솔라께서 지켜보고 계시거늘. 어째서 그토록 불경한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이냐.”

“이미 다 알고 왔습니다. 아버지께서 백성들을 이주시키신 것이 왕국에 반기를 들기 위해서라는 것도….”

데클란이 말을 끌었다.

그사이, 판자촌 주민들의 눈에 원망과 분노가 번졌다.

“그 과정에서, 영지의 병사들을 마물의 제물로 바치셨다는 것도요. 아버님과 형님이 희생시킨 이들의 명단이, 제 손에 있습니다.”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낸 데클란이, 거기 적힌 이름을 하나씩 외쳤다.

오른델 주민들의 얼굴에 슬픔과 분노가 서리고, 성벽 위의 병사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일었다.

그들도 아는 이름들이었으니까.

“무슨 근거로 그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는 거지?”

뒤이어 외친 건, 버차드 후작이 아니었다.

장남인 메이슨 버차드가 성벽 위로 올라온 것이다.

갑옷을 걸쳐 입은 그의 뒤로 쇠뇌를 든 병사들이 도열했다.

“아버님께서는 네 천한 핏줄을 아시면서도 자식으로 거두셨거늘. 은혜를 누명으로 갚다니. 그깟 명단으로 아버님을 반역자이자 타락자로 몰고 간단 말이냐?”

살기 가득한 목소리.

서늘한 푸른 눈이 좌중을 훑었다.

공기가 얼어붙는 가운데, 데클란이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저도 반갑습니다, 형님. 물론 물증도 있지요. 형님의 심복인 브래들리 경이, 모든 것을 실토했으니까요.”

“뭐라고…?”

“심지어 브래들리 경은 자신의 타락한 본모습까지 제 앞에서 드러냈습니다. 보여 드릴까요?”

데클란이 손가락을 튕겼다.

인파가 갈라지고, 육손이가 짐 마차를 몰고 앞으로 나왔다.

마차가 성벽 앞에 멈췄다.

뒤따라간 용병 몇이 짐칸에 실린 커다란 관을 들었다.

관뚜껑이 열리고, 안에 든 것이 땅에 쏟아졌다.

“윽…!”

내용물을 본 백성과 병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토막 난 시체와 살점들이 흩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역겨운 썩은 내까지.

비위가 약한 자들은 고개를 돌려 토하는 가운데, 데클란이 외쳤다.

“똑똑히 보시오. 이 괴물이 바로 브래들리 경이니!”

그제야 시선을 피하던 이들조차 다시 시체를 살폈다.

인간보다는 마물에 가까운, 끔찍하게 뒤틀린 형체.

“브래들리 경이 모든 것을 실토했소. 아버지와 형님이 타락하였으며, 자신 역시 그리되었다고! 자신이 저지른 모든 부정 역시, 아버지와 형님의 명령으로 이뤄졌다고!”

데클란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메이슨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 것은 그 직후였다.

“치밀하게 준비했구나! 그래, 누명을 씌우려면 그 정돈 해야겠지! 하지만 그게 브래들리 경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 내 눈엔 마물의 시체로밖엔 보이지 않는데.”

그가 데클란을 노려보았다.

“너야말로 무고한 브래들리 경을 죽이고, 그에게도 누명을 씌운 것이 아니냐? 나와 아버님께 지금 그리하고 있는 것처럼!”

“증인이 있습니다.”

“내가 바로 그 증인이오!”

“나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소!”

패튼과 육손이를 비롯한 용병들이 손을 들었다.

메이슨이 코웃음 쳤다.

“다 네놈의 용병들이군. 저것들의 증언이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용병들의 인상이 구겨지는 가운데.

“그럼, 제 오라비는요?”

백성들 사이에서 걸어 나온 소녀가 문득 외쳤다.

“아겔 란에서 잘살고 있다던 오라버니의 신분패가, 왜 숲에 버려져 있었던 건가요…?”

이안이 회수한 신분패.

데이브의 여동생이었다.

“제 형님은 잘 있는 겁니까?”

“제 친구는요?! 연락이 없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메이슨의 얼굴이 붉게 물드는 가운데.

“너희들의 마음은 잘 알았다. 어째서 이런 의심을 품게 되었는지도.”

후작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장남과 달리 너그러운 말투.

“정말 그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사건에 의해 희생당한 것이라면, 조사단을 꾸려 파견하겠다. 내 의도에 대한 의혹도, 폐하께 직접 수사를 요청하도록 하지. 우리가 타락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 역시… 제국 교단의 감찰과 판결을 요청하겠다.”

차근하게 말을 이은 그가 군중들을 한차례 돌아보고는 덧붙였다.

“이만하면 노기를 가라앉힐 수 있겠느냐?”

“…….”

“…….”

당장이라도 성벽으로 달려갈 것 같던 백성들이 움찔했다.

정말 그들의 요청을 전부 들어줄 줄은 몰랐으니까.

“그, 그렇게 해 주신다면야….”

누군가가 중얼댔다.

‘역시. 정치인들의 구라는 세상을 가리지 않는군.’

이안이 심드렁하게 코웃음 쳤다.

아까 그가 우려했던 상황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이제 만족하겠지? 그렇다면 돌아가라! 계속 이곳에 남는 놈들은, 이제부터 반역자로 간주할 테니!”

소리친 메이슨이 손을 들었다.

병사들이 쇠뇌를 겨눴다.

백성들의 얼굴에 공포가 번졌다.

완전히 분위기가 넘어간 상황.

하지만 데클란의 얼굴에는, 반대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방금, 국왕 폐하의 수사와 교단의 판결을 받겠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그리 말했다, 아들아.”

후작이 마주 웃으며 말했다.

데클란의 미소가 짙어졌다.

“잘 되었군요. 마침 제가, 그에 걸맞은 인물을 알고 있거든요.”

“걸맞은 인물…?”

후각의 미간이 좁아졌다.

데클란이 필립을 바라보았다.

“전에 했던 그거, 다시 해 줄 수 있겠나? 이왕이면, 뒷부분만.”

“그거…? 아, 그거 말씀이시군요.”

필립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거라면, 설마.

이안의 미간이 좁아지는 가운데, 데클란이 그에게 한쪽 눈을 찡긋댔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어울려 주게.”

“…….”

입맛을 다신 이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용병…?”

“지하 수로의 괴물을 처치한, 그자 같은데.”

그를 알아본 병사들이 수군댔다.

이안의 명성은 이미 오른델 전체에 퍼져 있었다.

“걸맞은 인물이라더니. 또다시 용병이군.”

메이슨이 조소를 머금을 찰나.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이안의 옆에 선 필립이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티르 엔의 사도이며 남부 국경의 집행자, 아겔 란의 보검이신 메브 리우렐 경의 유일하며 공식적인 대행자이자, 엄정한 여신의 총애를 받는 심판자! 이안 호프 경입니다!”

…뒤에 뭐가 더 붙었는데?

이안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필립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저는 경을 모시는 종자, 필립입니다.”

“…….”

메이슨과 후작의 입이 순간 벌어졌다.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

필립에게 고개를 끄덕인 데클란이 덧붙였다.

“또한, 호프 경은 브래들리의 타락을 직접 목격했고, 심판한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이만하면 자격은 차고 넘치는 것 같은데요?”

“…말도 안 되는.”

이윽고 내뱉은 버차드 후작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지금까지의 너그러운 표정이 거짓말처럼.

“공식적인 대행자? 티르 엔의 심판자? 그자가 성기사라도 된단 말이냐?”

“글쎄요. 하지만 확실한 건, 두 분에 대한 판결은 엄정한 여신께서 직접 내리시리란 겁니다.”

데클란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제 판이 다 깔렸다는 듯이.

희미하게 미소 지은 이안이, 보란 듯 단죄의 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을 타고 푸른 신성력이 불길처럼 번졌다.

“오… 오오…….”

“성기사. 정말 성기사시다….”

빛의 검을 움켜쥔 듯한 형상에, 병사와 백성들이 탄식을 흘렸다.

몇몇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기까지 했다.

후작과 메이슨의 얼굴에도 경악이 번져나가는 가운데.

“…….”

이안은 설핏 미간을 좁혔다.

날을 타고 솟구치는 신성이 평소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검신 내부에서 싸늘한 분노가 전해졌다.

…아, 그래. 이걸로도 엿볼 수 있단 거지.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버차드 후작을 올려다보았다.

후작의 눈썹이 꿈틀댄 직후,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걸음은 이내 질주로 바뀌었다.

“쏴, 쏴라! 왜 구경만 하는 것이냐?”

버차드 후작이 뒤늦게 소리쳤다.

하지만 쇠뇌를 든 병사들조차 망설이고 있었다.

“하, 하지만, 신의 사도입니다…!”

누군가 탄식하듯 말했다.

메이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희가 누굴 섬기는지 잊지 마라! 당장 저자를 저지해!”

검을 뽑아든 그가 덧붙였다.

“명령을 따르지 않는 놈들은 이 자리에서 목을 베겠다!”

그제야 병사들이 이안을 조준했다.

떨리는 손길들.

“쏴라!”

피피피핏-!

쇠뇌가 일제히 발사됐다.

대부분 조준이 형편없었지만, 일부는 정확하게 이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슈확-!

하지만 이안의 근처까지 날아간 볼트들은 보이지 않는 바람에 휘말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휘몰아치는 방벽.

어느새 전신에 바람을 두른 이안이, 쏜살같이 성벽에 닿았다.

타타탓-!

성벽을 연달아 박찬 이안이 새처럼 솟구쳤다.

바람이 그의 몸을 힘껏 떠밀었다.

허공에서 잠시 멈춘 이안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메이슨과 눈을 마주쳤다.

“여신께서 내린 판결은….”

신성력이 가득 맺힌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며, 그가 덧붙였다.

“사형이다.”

눈부신 섬광이 메이슨을 향해 떨어졌다.

허공에 새겨진 푸른 궤적이 메이슨이 치켜든 검을 쪼개고, 그 너머의 팔뚝을 꿰뚫었다.

메이슨의 오른팔이 피를 흩뿌리며 잘려 나갔다.

“아아악-!”

메이슨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이안의 시선은 저만치에 선 후작에게로 향해 있었다.

‘저자가 미쳐 날뛰면 좋겠는데. 할 수 있겠냐?’

손가락에 따끔한 감각이 이어졌다.

신성력에 질색하던 늪지의 원한.

놈의 분노가 이안의 피를 매개로, 후작을 향해 뻗어나갔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현상은 실제보다 훨씬 초라했다.

망령화되어 후작에게 날아간 놈이, 다시 실뱀의 형태로 돌아와 목덜미를 깨문 것에 불과했으니까.

후작은 이안의 난입에 놀라, 따끔함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 개자식이-!”

이안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후웅, 메이슨이 휘두른 팔이 그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대로 뒷걸음질 친 메이슨이, 잘린 팔뚝을 움켜쥐었다.

“뭣들 하느냐! 다들 이자를 막아!”

“…….”

이안은 주위의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두려움 가득한 눈빛들.

신성력 맺힌 검을 치켜든 그가 내뱉었다.

“오늘 흘릴 피는 타락자들의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마, 맞습니다.”

챙그랑, 가장 가까이에 있던 병사가 창을 떨어뜨렸다.

다른 병사들도 손에 든 쇠뇌와 창을 떨어뜨리는 가운데.

“도란 경! 병사들을 물리시오!”

데클란의 외침이 이어졌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경비대장이 소리쳤다.

“경비병들은 모두 물러나라! 정규군 모두 물러나시오! 이건 우리가 낄 싸움이 아니니!”

병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물러나기 시작했다.

메이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 내성으로 물러 나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님!”

주춤주춤 물러나며 외친 그가 고개를 돌렸다.

“아버님…?”

후작의 상태를 확인한 그의 눈이, 이내 찢어질 듯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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