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자욱한 먹구름이 눈부시게 명멸하며 천둥과 벼락을 흩뿌렸다.
용의 포효와 뒤섞여,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이어졌다.
“…….”
“…….”
하지만 성벽 위의 그 누구도 그 광경에 비명을 내지르거나 도망치지 못했다.
강건한 야인 전사들조차, 용의 포효가 울려 퍼진 순간 무기를 떨어뜨리며 주저앉았다.
성벽 위의 모두가 넋을 잃은 것처럼 멍하니, 번쩍이는 먹구름과 그 사이로 드러나는 거대한 형체를 눈에 담을 따름이었다.
이안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주저앉지 않은 게 고작이었다.
게임에서도 최고 수준의 무력화와 공포 상태를 유발하던 용의 포효는, 그의 육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만, 공포 상태에까지 빠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가사 상태에서 깨어난 것처럼 보였는데. 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건 그래선가? 아니면 그저 의도적으로 감춘 걸지도. 육체를 잠재운 건 그게 이 권역을 유지하기 더 편해서일 수도 있겠어. 혹은 힘을 아껴야 한다거나. 그렇다면 움직일 수 있는 시간에 한계가 있다는-’
그의 뇌리로는 온갖 생각들이 어지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답을 알 수 없는 추측과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건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한 본능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어쨌거나 일어날 리 없다 여긴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용이 나타났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곧 높은 확률로 놈과 싸우게 되리란 것도.
‘그리고 비슷한 확률로 죽게 되겠지.’
그런 결론까지 곧바로 도출해 내면서도, 이안은 이성을 잃지 않았다.
그건 비단 높은 정신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게 정말 멀쩡한 용이라면.’
과거 언급했듯, 지금은 용이 등장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장했다면, 그에 걸맞은 무언가가 있을 터였다.
그게 무엇이건, 결국 끝까지 살아남는 건 그의 역량에 달렸겠지만.
‘시발….’
이안이 내심 탄식하는 그때, 포효를 끝낸 용이 크게 날개를 펄럭였다.
놈은 지금까지 날갯짓 한 번 하지 않고 공중에 떠 있었다.
새카만 먹구름을 몰고 다니며 포효 한 번에 천둥과 벼락을 흩뿌리는 모습에 비하면 놀랄 것도 없는 일이긴 했지만.
용이 구름 사이로 솟구쳤다.
그의 날갯짓에 휘몰아친 먹구름이 요란하게 번쩍이며 뒤늦게 굉음을 흩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계곡으로 미끄러지듯 하강한 용이 요새가 잘 보이는 위치에 착지했다.
거인을 막기 위해 높다랗게 지은 성벽은, 용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게 분명했다.
제법 먼 거리임에도, 놈의 형태는 원근감을 무시하듯 또렷했다.
‘작은 아파트 정도는 되겠는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놈의 전신을 차근히 훑었다.
그가 기억하는 용에 비하면, 어쨌거나 다소 깡마른 모습이었다.
다른 이들은 완전히 압도당해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하겠지만. 저 용은 뼈 위에 마른 가죽을 덮어 놓은 것처럼 앙상했다.
일종의 미라화가 진행된 것처럼 보였다. 눈이나 얼음 속에서 오랜 시간 마력만을 추출 당하고 있었을 테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놈이 날개를 접자 날개의 관절을 따라 투두둑, 비늘이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물론 그렇다 해서 저게 용이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과거 거인 여왕의 상태로 미뤄 봤을 때, 공허의 마력을 축적하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해 보였고.
“------!”
하늘로 고개를 치켜든 용이 다시금 울부짖었다.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뿐 아니라, 아까처럼 보이지 않는 충격파가 계곡과 요새를 휩쓸었다.
먹구름이 용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밀려나면서, 벼락을 온 사방으로 흩뿌렸다.
‘포효를 또 한다고…?’
이안의 미간이 구겨지는 사이.
“컥…….”
“…….”
주저앉아 있던 병사들 몇몇이 풀썩 쓰러졌다. 이안의 근처에 있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죽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정신을 잃은 것이기를 바랄 뿐.
근처에 주저앉은 발베르는 아직 살아 있었지만, 탁 풀린 동공에는 전혀 생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아래턱을 타고 침이 줄줄 흘렀다. 어느새 신성력은 완전히 사라진 채였다.
“후…….”
하지만 이안은 이번에도 견뎌냈다.
또다시 버틸 수 있었던 건 혼돈력 덕분이었다.
혼돈의 파편이 공명하던 것을 떠올렸던 것이다.
파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서 아주 적은 양의 혼돈력만이 몸속을 맴돌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아까처럼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의 무력감은 피할 수 있었다.
물론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저릿저릿해서, 힘은커녕 여전히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크르르르….
포효를 끝낸 용이 요새 쪽을 바라보았다.
계곡 주위로 번개가 번쩍이며 떨어지는 가운데, 새파랗게 빛나는 안광이 성벽을 응시했다.
“……!”
이안은 숨을 들이켰다. 놈이 정확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한 대가를… 치■■라…
그르렁대는 듯한 사념이 뇌리를 후벼 파더니, 놈의 아가리로 푸르스름한 빛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입자화되는 마력. 저게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용의 숨결.
‘미친…?’
이안의 눈이 커졌다. 온몸의 피가 식는 듯한 불길함이 엄습했다.
어쩌면 그가 한 생각들은 그저 현실 도피성 망상에 불과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공포 상태에 완벽하게 저항하지 못한 걸지도 몰랐다. 이성이 멀쩡하다고 여긴 것조차 착각일지도.
그런 불길한 생각을 이어가면서도, 이안은 스킬을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마력은 평소처럼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포효의 여파가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은, 도망치는 대신 상태 창을 열었다.
이 힘 빠진 몸으로는 아무리 애를 쓴들 용의 숨결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애먼 희생만 늘릴 뿐.
“후….”
그래서 이안은 한편으론 마력과 혼돈력을 일으키려 애쓰면서, 포인트를 정신력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몸속의 마력이 다시금 그의 통제에 따를 때까지.
효과는 몇 개쯤 올린 순간부터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용의 아가리가 벌어진 건, 이안의 눈동자에 푸른 마력이 맺히기 시작한 그때였다.
콰아아아아-
벌어진 용의 아가리에서 새하얀 숨결이 불길처럼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저건 대기를 얼어붙게 만들 만큼 지독한 냉기였다.
이안은 시야를 하얗게 물들이며 날아드는 용의 숨결을, 마력이 아른대는 눈으로 마주 보았다.
주문은 완성됐다. 앞에 얼음 결정이 피어오르는 게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빙하 방벽이라도, 밀려드는 저 숨결을 온전히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이상하게도 한쪽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용에게 죽다니.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의 최후치고는 멋지다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솨아아아아-
눈부신 황금빛이 시야를 가득 채운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이안의 눈이 커졌다.
생성되던 빙하 장벽을 산산이 깨뜨리면서, 황금빛의 거대한 역장이 성벽 앞에 돌연 피어오른 것이다.
반투명한 역장이 성벽 앞을 가득 채우며 번져 나갔다.
콰아아아아-
용의 숨결이 그대로 역장을 뒤덮었다. 마력이 가득한 냉기가 역장 위로 분수처럼 솟구치고, 황금빛이 눈부시게 명멸했다. 솟구친 숨결이 그대로 얼어붙으면서 산산이 바스러졌다. 역장의 구조가 그 사이사이로 드러났다.
촘촘하게 이어진 벌집을 떠올리게 하는 육각형의 윤곽.
이렇게나 거대하고 정교한 마법을 순식간에 펼칠 만한 존재라면….
“……!”
이안은 목을 꺾듯이 위로 치켜들었다. 상공 한복판, 황금색 장막이 공간을 가르며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허여멀건 한 비늘을 가진 거대한 용이 장막을 가르며 날아드는 중이었다.
이안의 입이 설핏 벌어졌다.
‘아르케아스…?’
저 용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대륙에 단둘만 남은 용 중 하나.
수많은 칭호와 아명을 가진, 백금룡 아르케아스.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순리를 거스른 자, 타후므리트.
“하….”
백금룡과 함께 타락용을 처치하라는 내용을 눈에 담던 이안의 입가에, 비로소 헛웃음이 번졌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그가 겪은 건, 일종의 보스전 이벤트 컷 씬에 불과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아르케아스가 왜 이제야 나타난 것인가 하는 분노 섞인 의문이 뒤를 따랐다.
일찍 나타났다면 무고한 희생이 쌓이는 일도, 그가 능력치 포인트를 소모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래서 기척을 감췄던 건가? 동족이 가로막지 못하게 하려고?’
상념은 거기까지였다.
푸스슷-
흐릿하던 붉은 신성력이 선명하게 타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무력화 상태의 여파가 빠른 속도로 밀려나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것 역시 퀘스트에 포함된 이벤트일지도 몰랐다. 저 두 용의 싸움에 끼어들려면, 고작 2챕터 수준의 캐릭터로는 턱도 없을 테니까.
‘정말 그런 거라면….’
이안의 시선이 문득, 손에 쥔 단죄의 검으로 향했다.
검신 내부에 신성력이 꿈틀대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날을 타고 은은하게 번져 나왔다.
‘하난 야만 전사고, 하난 기사 버프라 치면.’
그럼 마법사는?
생각할 찰나, 용의 숨결과 함께 황금빛 역장이 잦아들었다. 저 너머, 타후므리트를 향해 날아가는 백금룡의 뒷모습이 보였다.
머릿속의 의문들이 씻은 듯 사라졌다. 결국, 당장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부딪혀 보면 알게 되겠지.’
검 자루를 쥔 이안의 손아귀에, 비로소 힘이 들어갔다.
***
콰아아아-
아르케아스가 내뿜은 숨결이 타후므리트를 휩쓸고, 그 뒤의 망자 군단까지 불태우며 뻗어나갔다.
샛노란 불길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캬아아아-!
그 한복판에서 타후므리트가 포효했다. 훅, 힘찬 날갯짓 한 번으로 허공에 멈춰 선 아르케아스가 마주 울부짖었다.
허공에서 맞부딪힌 마력의 파장이 산산이 흩어지면서 대기를 찢어발겼다.
뼈와 재가 뒤덮인 계곡에 흙먼지가 치솟았다.
다음 순간 타후므리트가 솟구쳤다.
숨결이 휩쓸고 간 부분의 가죽이 타들어 가서, 내골격을 고스란히 드러난 채였다.
말라붙은 근육과 뼈대 사이로 새파란 마력이 혈관처럼 번쩍였다.
쩌어엉-
두 용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아르케아스의 주위로 황금색 역장이 번쩍였지만, 그건 타후므리트도 마찬가지였다. 새파란 마력의 장막이 번개처럼 터지며 황금색 역장을 깨뜨렸다.
콰르릉-!
새하얀 뇌전이 아르케아스를 관통했다. 백금룡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아가리에서 솟구친 황금색 마력이 그대로 먹구름 한복판에 번뜩였다. 먹구름 사이로 황금빛 마력 회로가 번졌다. 꿈틀대던 검은 먹구름이 휘청대며 밀려났다.
콰드득- 그의 목덜미를 타후므리트가 물어뜯은 건 그때였다. 피가 튀거나 가죽이 찢겨나가지는 않았지만, 용을 추락시키기엔 충분한 공격이었다.
쿠우웅-
뒤엉킨 두 거체가 계곡 한복판을 굴렀다. 튕겨져 나온 타후므리트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었다. 휘청대던 먹구름이 다시금 검게 물들면서, 그 사이의 황금빛 마력 회로를 집어삼켰다.
아르케아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전신에서 황금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먹구름 사이로 흐릿한 빛이 아른거렸다.
두 용 모두, 마력을 끝도 없이 소모하며 인간은 짐작하기도 힘든 방식의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었다.
한쪽은 일대를 어둠에 물들이기 위해서. 또 한쪽은 그 어둠을 밀어내기 위해서.
“루… 솔라여….”
관문 망루 위에 주저앉아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겔루드 장군의 입에서, 비로소 나지막한 탄식이 흘렀다.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는 그는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아까 기절한 마법사인 멘데스는 미동도 없었고. 경호병들은 하나 같이 넋이 나간 얼굴이었으니까.
물론 그렇다 해서, 겔루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 중인 두 용을 바라보며, 빛의 신께 기도를 올릴 뿐.
백금룡의 전신에서 마력이 빛의 기둥처럼 솟구친 건 그때였다.
-■■■… ■■… ■■■■…!
웅혼한 사념이 뇌리를 울렸다.
이해할 수 없는 고대어. 겔루드로선 백금룡이 타락용에게 무언가 의사를 전했으리라 짐작할 따름이었다.
-■■■■… ■■■- ■■■■-!
“컥…….”
이어 뇌리를 울리는 사념에, 겔루드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 역시 이해할 수 없었지만, 타락용이 분노했다는 것만큼은 명확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타락용의 전신에서 새파란 마력이 솟구쳤다. 선명한 푸른빛이 아니라, 옅은 보랏빛이 섞인 듯한 불길한 색.
두 용이 뿜어낸 마력이 하늘의 먹구름을 뒤덮고, 물감처럼 얽히며 빙글빙글 돌았다.
콰아아-
백금룡이 타락용을 향해 달려든 건 그때였다. 쩍 아가리를 벌린 백금룡이 타락용의 비쩍 말라붙은 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타락용이 앞발로 백금룡을 후려치며 뒤엉킨 건 그 직후였다.
말 그대로 짐승의 싸움을 보는 듯한 원초적인 사투.
아르케아스와 타후므리트가 서로의 마법을 상쇄하는 데에 모든 마력을 쏟아붓고 있음을. 마력이 먼저 고갈되기 전에 교착 상태를 끝내려 육탄전에 돌입한 것임을 겔루드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전설처럼 전해 들었던 존재인 백금룡, 아르케아스가 끝내 승리하기를 기원하고 또 기원할 따름이었다.
저 강대한 존재들의 싸움에 끼어 봐야, 한낱 미물에 불과한 그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
겔루드의 미간이 좁아진 건 그때였다.
계곡 한복판, 누군가의 뒷모습이 문득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용에 비하면 작디작은. 전신에 타오르는 붉은 신성력을 두르고, 푸른 빛이 번지는 검을 움켜쥔 자.
“……!”
그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겔루드의 눈이, 이윽고 찢어질 듯 커졌다.
전투 내내 병사들을 수없이 위기에서 구해낸, 티르 엔의 성전사이자 북부의 대전사.
“이안… 호프…!”
그가 홀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용들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