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어둑한 장내를 밝히는 건, 책상 위에 놓인 촛불뿐이었다.
책상에 놓인 온갖 종류의 낡은 책들이, 불빛을 따라 좁고 낡은 집무실의 벽면에 이리저리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래서, 그게 끝이오?”
책상 앞에 앉은 중년의 사제가, 부드럽지만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이 낡고 초라한 집무실 만큼이나 생기 없어 보였다.
앞에 선 관리를 응시하며, 그가 덧붙였다.
“북부의 용살자가 붉은 기사를 수족으로 부리고 있으시며…. 백작의 명령을 받고 찾아갔을 때는 이미 버브룩을 떠난 상태셨다?”
“…예. 그렇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은밀하게 모시라는 명을 받은 몇몇이 신속하게 움직였다고 합니다만. 그런데도 한발 늦은 모양이더군요. 떠나신 지 하루가 더 지났다는 걸 보면, 버브룩에서 단 하룻밤만 묵으신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게 벌써 이틀 전의 일이고.”
“예. 돌아온 자들이 보고한 건 오늘이지만요. 워낙 비밀리에 진행된 터라, 제가 알게 된 것도 요행이었습니다. 백작께서도 이 사실은 주교님께만 공유하셨고, 대교회에만 알릴 예정이라더군요.”
“그래… 그럴 것이오. 그분에 대해선 함구하라는 교단의 엄명이 있었으니….”
“저도 이번엔 제법 큰 위험을 감수하고 알려 드리는 겁니다, 사제님.”
관리가 나지막이 속삭이며 미소 지었다. 그는 사제에게 돈을 받고 백작가의 사정을 전해 주는, 일종의 정보원이었다. 그 은근한 시선을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사제가 낮게 탄식했다.
“교단에서도 알지 못한다던 용살자의 소식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듣게 될 줄이야…. 아쉽고도 아쉽소.”
여긴 버브룩에서 불과 나흘거리에 위치한 도시였다. 도보일 때의 얘기였고, 말을 탄다면 절반 가까이 줄일 수 있었다.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어떻게든 그분을 찾아뵈었을 텐데. 해서, 그분들이 어디로 향하시는지는 정말 전해 들은 바가 없소?”
“예. 백작께서도 모르시는 것 같더군요. 벨 론데의 국경을 넘어 버브룩으로 가셨으니, 서쪽이나 남쪽으로 가셨으리라 추측할 뿐이지요. 양쪽 다 딱히 짐작 가는 부분은 없습니다만.”
“흐음…. 그래. 알겠소.”
사제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듣는 건 그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혹여 말이 달라지는 부분이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기본적인 검증법이었다.
서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낸 사제가 말없이 책상 위에 놓았다. 절그럭대는 동전 소리. 촛불에 비친 관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냉큼 주머니를 집어 든 그가 허리를 굽혔다.
“매번 감사합니다, 사제님.”
“내가 감사하지. 교단의 숨겨진 눈과 귀를 돕고 있으니, 찬란한 여신께서도 어여삐 여기실 것이오.”
공허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자세의 말이 헛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관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거래일 뿐이었다. 중년 사제의 야심 따윈,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전해 드릴 만한 일이 생긴다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덧붙인 관리가 몸을 돌렸다.
문이 닫히고 장내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본래도 가라앉아 있던 사제의 눈빛이 더 냉막해졌다. 촛불의 불빛을 반사하는 게 아니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무표정하게 일어선 그가 몸을 돌려 창문을 닫았다. 이미 밤이라 어두웠지만, 손짓에 망설임이 없었다.
촛불의 미약한 불빛만이 장내를 간신히 밝혔다. 다시 책상 앞에 앉은 사제가, 비로소 나지막이 중얼댔다.
“이토록 가까이에 있었다니…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어떻게든 발을 묶어 두었을 것을.”
아까와 비슷한 말이었지만, 어조는 정반대였다.
용살자는 교단이 새로운 성자 후보로 점찍은 인물이건만.
그의 목소리에선 그 어떤 존경이나 경외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아쉬움뿐.
당연한 일이었다. 사제복을 입고 있긴 했지만, 그는 루 솔라를 섬기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공허의 고대신을 섬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기도에 응답한 건, 전혀 다른 존재였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신을 끌어내리려다 도리어 유폐된, 용의 육신을 입은 실존하는 신.
그의 속삭임을 악마의 유혹이라 여긴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이 대륙의 참된 역사와 비밀을 아는 유일한 존재였다.
드륵.
사제가 서랍을 열었다.
촛불 위의 수저에 밀랍을 얹은 그가, 펜을 들어 작은 종이 위에 글자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비록 정확한 행방까진 알 수 없었으나, 이 편지를 받은 신의 사도에겐 충분한 단서가 될 터였다.
그분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용살자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
“…그리고 주께선, 신도의 공을 잊지 않으시겠지.”
분명 합당한 은총 역시 내려 주시리라. 어쩌면 이번엔 금단의 지식을 속삭여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힘을 내려 주실지도 몰랐다.
“용의 권능을….”
기록을 끝낸 사제가 다시 몸을 숙였다. 달칵, 잠금장치가 풀어지는 소리와 함께 숨겨진 서랍이 열렸다.
안에는 기다란 목함이 담겨 있었다. 사제가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뻣뻣하게 굳어진 잿빛 비둘기가 구겨진 채 들어 있었다.
비둘기를 꺼내 책상 위에 놓은 그가, 길게 접은 종이를 녀석의 다리에 묶었다.
비둘기의 눈이 붉게 반짝인 건, 밀랍을 살짝 떨어뜨려 편지를 단단히 고정한 직후였다.
녀석은 언제 굳어 있었냐는 듯 일어섰다. 붉은 안광이 잦아들었다.
일어선 사제가 닫혀 있던 창문을 열었다. 푸드득, 회색 비둘기가 기다렸다는 듯 날아올랐다.
녀석의 형체가 순식간에 검은 그림자가 되어, 먹구름 낀 밤하늘 너머로 멀어졌다.
밤하늘을 가만히 응시하던 사제가, 이윽고 엄숙하게 읊조렸다.
“용살자의 죽음으로, 세상은 진정한 주인께서 돌아오셨음을 알게 되리라….”
***
버브룩을 떠난 지 어느덧 사흘째였다.
마차는 관도를 벗어나, 평평하게 이어진 숲길로 접어들었다.
관도에서도 어느 순간부턴 인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글루미르까지 은밀하게 이동하기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말들의 체력을 아끼려 천천히 이동하던 필립도, 오늘 낮부터는 조금씩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안이 보기에도, 그들은 이미 루 사드에 접어들었다.
그렇다해서 긴장감이 감도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그가 새로운 버차드 후작으로 영주 자리에 올랐습니다. 얼마 전 들었던 오른델의 영주가, 바로 그 데클란 버차드인 것이죠.”
오히려 일행의 분위기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마부석의 필립이 새로 산 방패에 한쪽 팔을 기대 얹은 채로 말을 이었다.
“만약 그가 끝내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너와 이안이 그의 기틀을 만들어 준 셈이 되겠군.”
샬롯이 덤덤하게 내뱉었다.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다시 오른손을 펼쳤다. 그의 손아귀에서 은은하게 번진 빛이 허벅지에 놓인 정수를 내리쬈다.
“오늘 제 이야기는 여기까집니다. 드디어 샬롯의 차례로군요.”
“기다려라. 나도 이야기를 곱씹을 시간은 필요하니까.”
단호하게 말한 샬롯이 손에 든 휴대용 숫돌을 밀었다.
그녀는 한 손에는 은검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숫돌을 든 채 날을 벼리고 있었다.
말 위에서 하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운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이런 식으로 벌써 은검의 날을 두 자루나 날카롭게 세웠다.
…드디어 좀 조용해졌네.
그들의 뒤를 따르던 이안이, 홀가분하게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그는 파엘이 선물로 준 술을 병째로 한 모금씩 마셔 대고 있었다.
술병이 제법 컸지만 어느새 반 가까이 마셔버린 상태였다.
걸작이라던 말대로 맛이 꽤 좋고, 향은 그보다 더 좋은 술이었다.
물론 취기를 불러일으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정의 지루함을 희석시켜줄 자극으로는 충분했다.
“나도 한 모금 주겠어?”
마차에 앉은 메브가 물었다. 이안은 선선히 술병을 내밀었다.
“드시고 마개를 닫아 두시오.”
“그래.”
거, 말투 적응 안 되네.
병나발을 불고 있는 성기사를 돌아보며, 이안은 짧게 피식댔다.
버브룩을 떠나고부터 그를 대하는 메브의 태도가 본격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가까운 친우를 대하는 듯했다.
물론 칼부림이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딱딱한 말투로 돌아가겠지만.
“다 된 것 같습니다, 나리.”
그때 필립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가 치켜든 손바닥 위에 하얗게 변한 정수가 놓여 있었다. 다가간 이안이 정수를 받아들었다. 안개를 담은 것처럼 자욱한 구슬 내부를 응시하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됐군. 수고했다.”
이안은 정수를 만족스럽게 어루만지고는 아공간에 넣었다.
하급이라도 정수는 정수였다. 강력한 화력이 필요한 순간에 제 역할을 다해주리라. 물론, 그의 마력을 제물로 하겠지만.
오른손을 쥐락펴락하며 필립이 덧붙였다.
“몇 개 더 있지 않으십니까? 계속할까요?”
“일단은 이거면 충분해. 네 그 성물에도, 힘을 모아 둬야 하니까.”
“예. 그래도 다행입니다. 여기선 여신님의 손길이 닿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렇진 않군요.”
“밤만 조심하면 돼. 가능하면 낮에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좋겠지만.”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나무가 듬성듬성 이어진 숲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여길 지나는 동안엔 괜찮을 겁니다. 평야가 많아서 조금 걱정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숲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어쩌면 글루미르까지 이대로 평화롭게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그러면 좋겠다만.
이안이 어깨만 까딱이는 사이, 기름 먹인 천을 집어 든 필립이 방패를 닦기 시작했다.
이안처럼 거의 모든 장비를 새로 산 수준은 아니었지만, 필립 역시 장비가 여럿 바뀌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특히 더 애지중지했다. 제국제 명품을 써 본 게 태어나 처음이라는 것이다.
이안이 보기엔 전투를 몇 번 거치면 넝마가 될 것들이었지만, 굳이 그런 사실을 미리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짐승 한 마리 없군. 죄다 도망쳤거나, 숲에 굶주린 마물이라도 살고 있는 모양이야.”
샬롯이 검을 허공에 탁탁 털며 읊조렸다. 필립이 손길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루 사드는 뱀파이어들의 땅이잖습니까? 그런데도 여기 마물이 있을까요?”
“놈들은 인간을 잡아먹고 사니까. 대신 혐의를 덮어씌울 것들은 필요하지 않을까.”
이안이 뒤로 물러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필립이 슬쩍 미간을 좁혔다.
“그럼 마물을 하수인으로 부릴지도 모르겠군요.”
“어쩌면.”
뱀파이어는 여러 방식으로 하수인을 만들었다. 사람을 이지를 가진 구울처럼 만들 수도 있었고, 흑마법이나 진혈의 권능을 통해 노예로 부리기도 했다. 마물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리라.
“그런 것들은 쉽게 죽지 않을 거다. 일반적으로는 죽었을 상황에서도 살아서 덤빌 수 있으니까, 언제든 긴장을 늦추지 마. 여차하면 그냥 신성력을 쓰든지.”
“예. 명심하겠습니다.”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벼리는 샬롯의 눈빛도 진지해졌다. 어쨌거나 다들, 머잖아 싸우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메브, 당신도 마찬가지요. 이제 신성력을 마음대로 쓸 수도 없으시잖소.”
“그래. 이왕이면 끝까지 쓰게 될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메브가 술병을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향을 음미하듯 숨을 내쉬는 그녀를 잠시 바라본 이안이, 이윽고 물었다.
“정확한 조건이 뭐요?”
“무슨 조건?”
“신성력 말이오. 전에는 복수의 대상에게만 사용할 수 있으셨잖소.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
“그래. 여신께선 복수를 위해서만 은총을 내려 주시지. 그것이 비단 나의 복수가 아니라도 상관없을 뿐이다. 소중한 것. 소중한 이를 잃은 슬픔에 빠진 이들의 복수 역시, 대행할 수 있지. 여신께선 정당한 복수를 수호하시니까.”
“그럼 전에 그건 뭐였소? 내가 피를 흘리니까 신성을 쓰기 시작하셨잖소.”
“그 역겨운 고블린들과 싸울 때요? 그게 이안 나리 덕분이었군요. 이제야 의문이 풀렸습니다.”
메브가 순간 멈칫하는 가운데, 필립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짧게 헛기침한 메브가 입을 열었다.
“내게 소중한 이들이 다치는 것 역시, 복수를 다짐할 이유로는 충분하니까.”
“그래서 신성을 쓸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하신 거군.”
이안이 읊조리자, 그를 슬쩍 돌아본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군가 피를 흘리게 되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제가 다쳤을 때는, 그렇게까지 신성을 휘두르진 않으셨잖습니까?”
필립이 문득 물었다. 멈칫한 메브가 재빨리 내뱉었다.
“그때는 살짝 긁힌 정도였지 않느냐? 네가 멋대로 앞서가다 생긴 상처고.”
“어… 이안 나리의 부상은 그보다 훨씬 심각하셨던 모양이군요.”
“물론이지.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렸으니까.”
그 정돈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안은 볼을 긁적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메브를 바라보았다.
어쨌건 그녀가 사도의 권능을 발현하는 조건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메브가 다시 한번 헛기침하는 사이, 그가 툭 덧붙였다.
“그럼 여차하면 내가 또 다치면 되겠군.”
“뭐라고…?”
눈을 치켜뜬 메브가 돌아보았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경의 복수심에 불이 붙을 정도면 충분한 거잖소.”
“그건 그렇지만… 무슨 그런… 그러지 말거라. 부상은 언제나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어.”
특유의 엄격한 말투로 돌아온 메브가 말했다. 코로 웃은 이안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걱정 마시오. 듣지 못하셨소? 난 온몸의 뼈가 다 으스러지고서도 살아남았소. 물론 백금룡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그 정도로 심각한 부상만 아니라면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거요.”
“…….”
메브가 말문이 막힌 듯 미간만 좁혔다.
물론 이안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목이 잘리거나 머리가 터지거나 심장이 꿰뚫리는 게 아닌 이상, 어지간해선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의 각종 저항력과 회복력은, 이미 범인의 범주를 한참 초월한 상태였다.
어쩌면 손가락 정도는 잘려도 다시 자라날지도 몰랐다. 정말 가능한지 실험할 생각까진 없었지만.
“그럼, 내 복수를 대행할 수도 있지 않겠나?”
샬롯이 불쑥 내뱉은 건 그때였다. 메브가 냉큼 시선을 돌렸다. 그녀를 돌아본 샬롯이 덧붙였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그 박쥐 새끼들에게 복수하고 싶으니까.”
“그래… 소중한 이를 빼앗긴 거라면 여신께서도 인정하시겠지. 다만 그럼 너는 이번 싸움에서 빠져야 할 텐데. 괜찮겠느냐?”
“…빠져야 한다고?”
“내가 네 복수를 대행하는 것이니까. 네가 네 복수를 수행한다면 나는 자격을 잃게 돼.”
“그럴 순 없지. 없던 일로 하겠다.”
즉답한 샬롯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숫돌이 날을 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옅게 미소 짓던 메브가,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역시,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진 않군.”
“…….”
“걱정 마시오. 경의 신성력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그러고 싶지 않아도 피를 흘리고 있을 테니까.”
“…그래.”
메브가 이윽고 내뱉었다.
이안의 고집을 꺾는 건 애저녁에 포기한 그녀였다.
샬롯이 이안에게로 몸을 돌린 건 그 직후였다.
“다 벼렸다. 이안.”
“아, 이게 내 거였군.”
공을 엄청 들인다 싶더니.
은검을 받아든 이안은, 검집에서 날을 반만 뽑았다. 서늘할 정도로 예리한 칼날. 금방 다시 뭉툭해지겠지만, 적어도 몇 번은 사람도 벨 수 있을 터였다.
그가 오른쪽 허리춤에 검집을 장착하는 사이, 눈치를 살피던 필립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다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겁니까?”
“…….”
“너무 궁금해서 그럽니다. 투쟁의 신이 이안 나리께 관심을 보인 건 이해가 됩니다만. 나리께서 그분을 섬긴다는 건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아서요. 이안 나리잖습니까…?”
“이안은 카르하를 섬기지 않아.”
샬롯이 선심 쓰듯 말했다. 필립은 물론 메브의 눈에도 갈증의 빛이 번졌다. 침을 삼킨 필립이 물었다.
“그럼, 투쟁의 신은 자신을 섬기지도 않는 자를 대전사로 삼은 겁니까? 루 솔라 맙소사….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데요?”
그래, 또 시작이군.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이안이 메브에게 손을 내밀었다.
“술병, 다시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