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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망캐가 되었다-180화 (180/412)

#180화

“미친…?!”

욕지거리를 토해내는 와중에도, 흑기사가 반사적으로 흑검을 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전신에 검붉은 마력이 솟구칠 찰나, 대검이 그 위로 떨어졌다.

콰아아아아- 콰앙-!

대검에 짓눌린 채 추락한 흑기사가, 엉망이 된 바닥에 그대로 처박혔다. 검과 검이 맞부딪쳐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굉음. 흑기사를 중심으로 바닥의 깨진 판석과 흙더미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거미줄 같은 균열이 연회장 바닥 전체로 번졌다. 흑검의 검면과 자루를 쥔 양팔이 다 구부러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초인적인 완력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단지 버텨 낸 것뿐이었다. 전신을 뒤덮은 충격을 전부 떨쳐내는 건 불가능했다.

“흡…!”

대검을 내리친 자세로 착지한 이안이, 땅에 발이 닿기가 무섭게 대검을 다시 치켜들었다. 태산처럼 짓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진 흑기사가 간신히 참았던 숨을 토할 찰나.

쒸아아악-!

대검이 커다란 호선을 그리며 다시금 떨어져 내렸다. 흑기사가 황급히 다시 양팔에 힘을 불어넣었다.

또 한 번의 폭음. 그리고 방금보다 더 강한 힘이 실린 대검이 흑검 위를 후려쳤다.

흑기사의 몸이 바닥에 더 깊이 박혀 들고, 내뻗은 팔의 팔꿈치가 절로 굽어졌다.

솨아아- 대검 날을 따라 새겨진 고대어에 푸른 빛이 새겨지는 가운데, 이안이 다시 대검을 치켜들었다.

“…아니-”

또?!

흑기사가 뒷말을 내뱉기도 전에, 뒤로 젖혀졌던 대검이 다시 한번 거대한 호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새하얀 냉기의 궤적까지 더해진 채였다.

천장의 벽돌들이 줄지어 떨어져 내리고 있었지만, 대검을 내리치는 이안은 피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이미 그가 미로 저택의 지하에서 이보다 더한 붕괴를 경험했음을 알 리 없는 흑기사의 눈에, 처음으로 놀람과 당황을 넘어선 생경한 감정이 서렸다.

공포.

콰아아아-

그 와중에도 대검이 만들어 낸 거대한 궤적은 어느새 흑기사의 코앞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흑기사가 품고 있던 용의 마력을 일제히 뿜어내면서 팔을 들었다.

비명을 지르듯 징징 울리던 흑검에 마력이 폭포수처럼 치솟았다.

대검이 그 위를 후려친 건 거의 동시였다.

쩌어엉-!

전신을 울리는 충격파와 함께, 용의 마력과 신성력이 뒤엉켜 만들어 낸 빛의 폭발이 일었다. 그 위로 한 박자 늦게 수많은 냉기의 칼날이 쏟아졌다.

콰과과과과-

연회장의 바닥이 흑기사와 이안을 중심으로 움푹 꺼졌다. 동시에 팔에 가해지는 압력을 더는 견디지 못한 흑기사의 장갑과 팔목 보호대가 터져 나갔다. 빛의 폭발을 뚫고 들어온 냉기의 칼날들이 흑기사의 전신에 난도질한 듯한 선과 흠집을 그려 댔다.

하지만 흑기사는 끝내 버텨 냈다.

충격파와 압력, 그리고 쏟아지는 냉기 칼날의 포격이 잦아들었다.

흑기사가 거의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온 대검 날을 간신히 응시한 다음 순간.

“…….”

이를 악문 이안이 다시 휙, 대검을 치켜들었다.

이런 미친 새끼가…?

그게 다시 대검을 내리찍기 위해서라는 걸 깨달은 흑기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정말 이놈은 자신이 쪼개질 때까지 대검을 내리치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성이 무너지게 되더라도.

퍽.

떨어진 돌덩이가 이안의 머리를 후려치고 튕겨 나갔지만, 그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조차 없었다.

어쩌면 용도 이렇게 죽였을지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흑기사의 내면에, 문득 불같은 분노가 치밀었다.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에 대한 수치심까지 더해진,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한 분노였다.

밀도 높은 마력이 만들어 낸 전신의 아지랑이가, 그에 감응하듯 끓어 올랐다.

“꺼져라-! 이 미친 자식아!”

콰아아아아-!

포효와 동시에 끓어오르던 마력이 폭발했다. 대검을 치켜든 이안이 눈을 치켜뜬 채로 휩쓸려 튕겨 나가고, 흑기사가 박혀 있던 바닥의 돌과 흙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쉬아아악-!

하지만 이안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지는 못한 게 분명했다.

생성과 동시에 갈기갈기 찢겨나간 푸른 역장이 사그라드는 가운데.

부릅뜬 흑기사의 눈에, 대검을 무게추 삼아 자세를 다잡는 이안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가 대검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카가가가각-

대검 날이 기다란 호선을 만들어 내며 속도를 줄였다.

이안의 발이 땅에 닿았다.

다시 대검을 뽑아드는 그의 모습은 어느덧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흔적도 남지 않은 흉갑. 한 쪽만 남은 견갑과 팔목 보호대. 너덜거리는 각반. 받쳐 입은 사슬 갑옷은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떨어져 나가서 누더기가 따로 없었다.

그 아래의 누비옷은 터진 사슬 조각들이 박혀 붉게 물들었고, 먼지에 뒤덮인 얼굴 한쪽에는 머리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끈적하게 반짝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고요했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무표정하기 그지 없는 얼굴. 전신에 맺힌 붉은 신성력은 고요하게 타오르고 있었고, 광택 없이 우묵한 눈에는 오로지 하나의 의지만이 담겨 있었다.

너를 죽이겠다는.

“미친 자식…. 이제 보니 누더기의 사도였구나…. 네놈이야말로 저 신들이 얼마나 모순적이며 얄팍한 것들인지를 증명하는 산증인이군.”

비틀대며 일어선 흑기사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양팔에 힘을 주며 씹어 뱉었다.

“자신들이 그토록 불경하게 여기는 마법사에게 앞다퉈 힘을 내리다니 말이야….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 그만큼이나 싫다는 것이겠지. 교단도 알고 있느냐? 자신들이 섬기는 신과 성자가 음흉한 주문쟁이를 대행자로 삼았음을? 북부인들은 아느냐? 자신들의 대전사가-”

“시도는 좋았어.”

이안이 말을 잘랐다. 다음 순간 쿠확,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대검을 늘어뜨린 그의 신형이 삽시에 커졌다. 일직선으로 흑기사를 향해 달려들며, 이안이 툭 덧붙였다.

“하지만 난 주절대면서 시간 끄는 취미는 없거든.”

“이런 명예도 모르는-!”

말과 동시에 이어진 파공음에, 흑기사가 다급하게 움켜쥔 흑검을 옆으로 치켜들었다.

반격이 아니라 철저하게 방어를 위한 자세. 그의 전투 의지가 이전과 같지 않음을 무의식중에 증명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카가가가가각-

횡으로 긴 호선을 그리며 뿜어져 나온 대검이 흑검의 날 위를 미끄러졌다. 흑기사의 몸이 옆으로 죽 밀려나는 가운데, 맞부딪친 검날에서 불티가 폭죽처럼 튀어 올랐다.

이를 악물던 흑기사의 눈에, 이안의 눈동자가 보였다. 잿빛.

설마, 또?

퍼엉-!

추측을 현실로 만들듯, 기다란 대검 날에서 소리 없는 폭발이 터졌다. 일순간 빨아들였다가 밀어내는 엄청난 압력이 흑기사의 몸을 연회장 벽면으로 날려 버렸다.

끝내 놓치고만 흑검이 핑그르르 돌며 날아오르는 가운데, 벽면에 처박힌 흑기사를 놓치지 않고 노려보던 이안이 재차 몸을 날렸다.

어느새 내뻗었던 대검을 머리 위까지 치켜들면서.

키히이이이-!

유령마가 귀곡성 같은 울부짖음과 마력의 폭발을 토해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주인이 절체절명의 위기라는 것을 깨달은 듯 모든 마력을 토해내고는, 폭주하듯이 이안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그렇다 해도, 뒤에서 터져 나오는 붉은 궤적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푸확-!

뒤에서 기다란 선을 그리며 날아든 붉은 궤적이, 마갑이 거의 다 떨어져 나간 유령마의 몸을 그대로 썰고 지나쳤다.

잘려나간 유령마의 몸이 안개 덩어리처럼 터져 나갔다. 그러면서도 밀려드는 속도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신성력을 떨쳐낸 뒤에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듯, 타들어 가는 안개 사이로 말 머리의 형상이 아른거리며 피어올랐다.

바닥에 그림자처럼 깔린 채 질주하던 샬롯이 솟구친 건 바로 그때였다. 그녀가 올려 친 도끼날 끝에, 말의 두개골로 보이는 새카만 뼈가 걸렸다.

푸확-! 말의 흉상을 만들어내던 검은 안개가 증발하듯 흩어졌다.

“멈추지 마라! 이안!”

두개골을 도끼날에 건 채 솟구친 샬롯이 소리쳤다.

물론 이안은 이미 그러고 있었다.

그는 애초부터 멈출 생각이 없었다.

쒸아아아악-!

벽면에 처박힌 와중에도 도끼날에 걸린 검은 두개골을 뚫어질 듯 노려보던 흑기사가, 귀를 파고드는 파공음에 뒤늦게 팔을 치켜들었다.

카가가가가각-

천장과 벽면을 모조리 찢어발기며 밀려든 사선이, 그 한복판에 내밀어진 흑기사의 검붉은 팔뚝까지 갈라 버렸다.

대검이 만들어 낸 궤적은 흑기사의 팔을 지나쳐 가슴 한복판에서야 비로소 잠시 멈췄다.

대검을 양손으로 쥔 이안을 응시하는 흑기사의 눈빛에, 일순간 묘한 평온함이 내려앉았다.

“내 영혼은… 참된 주의 곁으로….”

콰지지직-!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안의 팔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대검 날이 흑기사의 상반신을 전부 잘라냈다.

잘려나간 흑기사의 상반신이 비스듬하게 떨어져 내렸다. 검은 피를 왈칵 왈칵 토해내던 하반신도 털썩,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하아- 하아-”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완료창을 응시하며, 비로소 이안이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흥건하게 번진 핏물과 흑기사의 육신에서 검붉은 빛이 끓듯이 피어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푸화아아악-

흑기사의 육체가 번쩍이며 검붉은 아지랑이를 사방으로 토해냈다.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젖힌 이안이, 그 아지랑이가 만들어 내는 검붉은 장막을 올려다보았다.

장막 너머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인지한 것만으로도 심장을 옭죄는 듯한 존재감. 어렵지 않게 그 정체를 깨달은 이안이, 치미는 공포를 내색하지 않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서, 이 놈의 영혼은 네 곁으로 갔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뇌리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번졌을 뿐이었다. 놀랍게도 적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음 순간, 마력의 아지랑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머릿속을 긁던 웃음소리와 존재감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치이이이….

숯덩어리처럼 새카맣게 변한 흑기사의 시신이 흐릿한 불티와 매캐한 연기를 토해냈다.

동시에 이안의 전신에서 아른거리던 붉은 신성력도 증발하듯 사라졌다.

남은 건 더 짙게 느껴지는 어둠과 귀가 먹먹한 적막 뿐.

철그렁-

군단장의 대검이 땅에 떨어졌다.

축복이 끝남과 동시에 새삼 느껴지기 시작한 무게감에, 이안이 그냥 나루를 놔버린 것이다.

비틀댄 이안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지고, 욱신거리는 통증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이러다 괴물들한테 죽기 전에 골병으로 먼저 죽겠는데….

흐릿하게 이어진 뭔가를 부수는 소리에, 이안의 입가에 맺힌 쓴웃음이 더 짙어졌다.

보지 않아도 샬롯이 유령마의 두개골을 박살내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 확인 사살 한번 철저하네.’

대충 하지. 혹시 모르는데.

속으로 덧붙이며, 이안은 엉망이 된 연회장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마력과 신성력이 만들어내던 빛이 사라져, 연회장은 흐릿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그나마 아직 멀쩡한 벽면의 등잔 몇에 꺼질듯한 불이 맺혀 있긴 했지만, 을씨년스러움을 더할 뿐이었다.

폭탄이 터진 것처럼 뒤집히고 가라앉은 바닥에는 천장의 잔해들이 나뒹굴었다. 곳곳이 무너지고 균열이 간 벽면은 위태로웠고, 한쪽에 구멍이 뻥 뚫린 천장은 그 너머의 먹구름을 훤히 드러낸 채 쉬지 않고 흙먼지를 떨어뜨렸다.

이렇게 보니 성 전체가 무너지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아마도 위보다 옆으로 넓게 지어진 구조물인 덕분이리라.

“이안…!”

그리고 그 한복판, 잔해를 헤치며 달려오는 메브와 도낏자루를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는 샬롯의 모습이 보였다. 이안 못지않게 만신창이가 된 샬롯의 상반신이 부풀었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번뜩이는 주황색 안광에는 묘한 만족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괜찮은 것이냐…? 움직일 수 있겠어?”

그의 앞에 멈춰 선 메브의 목소리에도 짙은 피로가 묻어나왔다. 안면 가리개를 올리자, 땀과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드러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유령마와의 전투도 쉽지는 않았을 테니까.

북부 혈통의 전마만큼이나 덩치가 큰 데다, 미친 듯이 마력을 토해내며 날뛰어대지 않았던가.

이들 둘이 그놈을 상대해 주지 않았다면, 전투가 훨씬 더 힘들어졌을 터였다.

“…괜찮진 않소만. 움직일 순 있소. 경도 앉으시오. 좀 쉽시다.”

이안의 대답에, 메브가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숨을 헐떡이는 소리만 번지는 가운데, 이안은 이제 연기도 토해내지 않는 흑기사의 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놈의 전신 판금 갑옷은 이제 성한 곳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장화 정도가 멀쩡해 보였지만, 이안이 착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컸다.

너무 열심히 깨부쉈나.

이안이 짧게 입맛을 다신 찰나였다.

“끄, 끝인가…?”

“다들 무사하신… 맙소사….”

반쯤 무너진 통로 너머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던 병사들 몇이, 이윽고 탄식을 흘리며 걸어 나왔다. 아까는 죄다 정신이 나가 있더니, 전투가 이어지는 사이에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하긴. 그런 굉음과 폭발이 이어졌으니 없던 정신도 돌아왔으리라.

“루 솔라여….”

“이런 처참한 꼴이라니….”

그들이 본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연회장의 전경을 눈에 담으며 연신 탄식을 흘리는 사이.

“……?”

이안의 시선이 문득 옆으로 돌아갔다. 피부가 따끔해지는 마력의 파장이 문득 느껴진 것이다.

주위의 인간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하지만 은밀한 악의가 깔린 마력의 파장.

그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린 이안의 입꼬리가, 이내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난장판이 된 연회장 한구석.

잔해 사이에 덩그러니 박혀 있는 흑검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래도, 건질 게 없진 않군.”

짧게 침음한 이안이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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