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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망캐가 되었다-209화 (209/412)

#209화

일행은 돌아오는 동안 한 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서는 아니었다. 이안은 물론이고 메브도 굳게 입을 다문 채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장원으로 들어선 순간 필립의 표정이 밝아진 건 그래서였다.

“저게 뭐죠? 저 사람들은 저런 걸 왜 들고 다닌 답니까?”

분위기를 환기할 명분이 생겼으니까.

그의 시선은 여러 자루의 검을 낑낑대며 들고 가는 하인을 좇고 있었다. 그 뒤로는 또 다른 하녀가 강철 투구를. 그 옆에는 사슬 갑옷과 강철 장갑을 품에 안은 하인이 걷고 있었다.

곧 그들이 별관으로 들어가자, 필립이 이제는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이 되어 덧붙였다.

“왜 우리 숙소로 들어가는 거고요?”

그 와중에도, 방금 들어간 이들과 달리 빈손인 하인들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 일이 끝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메브도 설명해 달라는 듯 이안을 돌아보았다.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기면서, 이안이 말했다.

“백작이 창고와 병기고를 열어 줬소. 보답으로.”

필립이 짧게 탄성을 흘렸다.

“아. 그래서 두 분을 부른 거였군요.”

“뭐, 겸사겸사.”

“뭐가 더 있었습니까? 그러고 보니, 백작과는 무슨 얘길 나누신 건데요?”

거참 빨리도 물어본다.

짧게 웃음 지은 이안이 저택 입구로 들어서며 내뱉었다.

“알 필요 없어. 별로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으니까.”

“예,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았습니다.”

필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올랐다. 빈손이 된 하인들이 계단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을 발견한 그들이 옆으로 물러나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들에게 미소 지어 보인 필립이 덧붙였다.

“이따 따로 주군께 여쭤보겠습니다. 주군께선 분명 자세히 알려 주실 테니까요.”

알면서 왜 굳이 자꾸 나한테 먼저 묻는 거냐고.

속으로만 읊조리며, 이안이 닫힌 문을 열었다.

“왔느냐? 기다렸다.”

한쪽 다리를 꼰 채 침대맡에 앉아 있던 테사이아가 텐시아 아이나스의 미소를 지으며 일행을 맞이했다.

그건 동시에 일종의 신호였다. 곧 하인들이 다시 올 테니, 각자의 역할극을 유지하라는.

방 한복판, 몸 곳곳에 붕대를 두른 샬롯도 장내로 들어서는 이안을 돌아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이안과 달리 잠시 문 앞에 멈칫하고 섰던 메브가, 이내 내뱉었다.

“…보답이라기엔 지나치게 많은 것 같은데.”

내 말이.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내부를 돌아보았다. 방 전체에 온갖 병장기들이 진열된 것처럼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무기는 전부 도검류이긴 했지만, 날의 생김새나 길이가 제각각이었다.

“병기고를 아예 통째로 털어 오셨나 보군.”

“내가 이리 명한 게 아니다. 샤론의 작품이지.”

이안의 시선을 받은 테사이아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곧이어 이안을 마주 본 샬롯이 혀를 날름대며 입맛을 다셨다.

“의외로 쓸 만해 보이는 게 많더군. 뭘 원할지 몰라서, 괜찮아 보이는 건 전부 추렸다. 너희가 고르고 나면 나머지는 도로 돌려보낼 거야.”

“전에 그 제국 상인을 만났을 때가 떠오르는군요. 물론 그때만큼 품목이 화려하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좋은데요.”

용병의 눈빛이 되어 내뱉은 필립이, 품에서 목걸이 뭉치를 꺼냈다.

끝에 오밀조밀 단단하게 만든 작은 가죽 주머니가 달린 목걸이.

델라 루의 은총을 보관하는 용도가 분명했다. 루스가 잊지 않고 준비해준 것이리라.

필립이 목걸이들을 침대 위에 놓는 사이, 제가 한 일인 양 거만한 미소를 지은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천천히들 둘러보거라. 시간은 많으니까.”

몸을 돌린 필립은 이미 벽에 기대 놓은 장검 하나를 집어 드는 중이었다. 중간 길이에 날이 넓적한, 제국 병사들이 보조 무기로 자주 들고 다니는 장검이었다.

메브가 문 옆의 벽에 기대서고 이안이 식탁으로 다가서는 가운데, 노크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세 명의 하인이 몇 가지 물건들을 더 들고 장내로 들어섰다.

일행에게 엉거주춤 인사한 그들이 저마다 흩어져 가져온 물건들을 내려놓았다. 또 다른 셋이 장내로 들어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말씀하신 물품은 이게 전부입니다. 나리.”

들고 온 검을 식탁 맨 가장자리에 놓은 하인 하나가 공손하게 말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건물 앞에서 기다리거라. 선별이 끝나는 대로 부를 것이니.”

악덕 귀족이 따로 없군.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품에 손을 넣으며 하인들을 돌아보았다.

“다른 하인들을 불러 대기하라 하시오. 그쪽들은 물러나서 쉬고.”

그가 은화를 쥔 손을 내밀며 덧붙였다.

“맥주라도 한 잔씩 마시면서.”

“……! 감사, 감사합니다, 나리.”

눈을 치켜뜨며 받아든 하인이 납죽 허리를 숙였다. 얼굴에 화색이 도는 다른 하인들을 돌아보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러는 김에, 간단한 부탁을 더 하고 싶은데.”

“예. 말씀하십시오.”

“백작께서 말을 내어 주시기로 하셨소. 마구간지기에게 말해 두고, 우리 마차와 함께 언제든 나갈 수 있게 준비해 두라 이르시오. 시종에게도 우리 식량과 술을 준비해 실어 달라 전하시오. 가능하면, 오늘 밤 안에.

“빠짐없이 전달하겠습니다, 나리.”

공손하게 대답한 하인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몸을 돌렸다. 노동의 피로가 싹 가신 얼굴들이었다.

문이 닫히자,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읊조렸다.

“당근을 주는 척하면서 일을 더 시키다니. 역시 이안이네.”

“뭘 또 역시야.”

그런 거 아니거든?

“주근깨가 그랬거든. 너한테 배우는 게 많다고. 나도 그러는 중이야. 확실히, 도움이 되네.”

“…….”

이안의 시선에 재빨리 헛기침한 필립이, 손에 든 검으로 시선을 옮기며 내뱉었다.

“그, 그런데 괜찮을까요? 만약 정말 테센에 마경이 열린 거라면, 중간에 분명 말이 또 죽게 될 텐데요. 식량이 다 썩어 버릴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도보로 이동할 생각도 해야지.”

이어진 이안의 대답에, 테사이아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무시한 채 식탁에 놓인 소검을 집어 든 이안이, 그걸 아공간에 휙 던져 넣으며 덧붙였다.

“식량이나 보급품 일부는, 이렇게 보관하면 그만이고.”

“아. 나리의 마법이 있었죠. 하지만 용량에 한계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적당히 욕심내라. 그런 눈빛 하지 말고.”

“…예.”

앞서서도 그랬듯. 부피가 크지 않은 것들 위주라면, 일행 모두의 여벌 장비를 보관할 수도 있을 터였다.

식량은 봉인함에 넣어 둘 생각이었다. 아공간에 빵 부스러기가 잡히게 두고 싶진 않았으니까.

일행들은 한층 더 진중해진 얼굴로 병장기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예외는 벽에 기대 선 메브와 이안 뿐이었다.

이안은 늘 그렇듯, 물건들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려 보기만 했다. 그에겐 그거면 충분했다.

어쨌건, 병장기를 보는 안목은 샬롯을 따라갈 사람이 없는 게 분명했다. 절반 이상이 정보창을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특출난 건 없지만…. 역시, 제국제 물건은 기본적으로 능력치가 높네.’

낮은 등급의 장비조차 쓸 만해졌다는 부분에서, 이안은 환경의 변화를 또 한 번 실감했다.

게임이라면 2챕터 후반과 3챕터 초반 사이의 어디쯤일 터였다.

게임에서는 제국에 발을 들이자마자 냅다 제도로 갔었지만, 지금의 이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뒤늦게 알았을 뿐, 사실 제도로 가는 걸 서두를 이유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위를 돌며 천천히 진행하는 게 더 좋았다.

물론 현실이 된 지금은 다를 수도 있었지만. 확실하지 않은 이상, 굳이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전에는 몰라서 건너뛰었거나 수많은 시도 끝에 간신히 통과했던 난관들을 무사히 통과하는 게 우선이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한 번의 실패도 없이.

‘목숨 원 코인으로…. 시발.’

당장 테센에 기다릴 것들도, 그런 미지의 난관 중 하나였다.

“넌 왜 그러고 있어, 빨강 머리? 안 골라?”

테사이아가 문득 말한 건 그때였다. 벽에 기대선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메브가, 붉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난 지금 내 장비로도 충분해.”

“아닐걸? 넌 신성력을 휘둘러 대서 모르겠지만, 무기가 순식간에 녹이 슬어서 부서지고 그랬다고. 나랑 야옹이 봐. 장비를 반은 다시 맞춰야 하잖아.”

“일리는 있는 말이오.”

강철 장화를 집어 들면서,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놈들에겐 신성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으신 건 알지만. 최소한의 방비는 해서 나쁠 건 없잖소. 어쨌든, 상대는 공허의 존재니까.”

게다가 부식의 저주는 꼭 전투 중에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었다. 일행은 아직 모르지만.

“그렇긴 하겠다만….”

“이건 경의 복수이기도 하잖소. 배려하지 말고 고르시오.”

“아. 우리 물건만으로도 공간이 부족할까 봐 그런 거였어? 역시, 착하네. 빨강 머리.”

테사이아가 놀리듯 미소 지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다.”

머쓱하게 헛기침한 메브가, 앞으로 나서 무기들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미 선택을 끝낸 이안은, 그런 그녀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메브가 물러나 있던 건, 물론 자신감의 표출이나 일행을 배려해서만은 아닐 터였다.

아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겠지.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물론 굳이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녀의 고민은 결국 그녀의 몫이었다.

“…나도 알고 있다, 이안. 지금 내 걱정은 시기상조라는 걸.”

메브가 툭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소.”

“무슨… 걱정을 하고 계셨던 건데요?”

하던 일을 멈춘 필립이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메브가 검날에 얼굴을 비춰 보며 말했다.

“말 그대로, 때 이른 고민이다. 필립. 현실이 되고 나서 다시 생각해도 늦지 않은.”

“…아. 알겠습니다. 또 단서가 끊어질 걸 염려하신 거군요.”

그제야 알겠다는 듯 필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메브가 얇고 긴 양손검 한 자루를 방 중앙에 놓으며 내뱉었다.

“내 복수의 근원에 아주 가까이 까지 다가왔다는 확신이 든다. 그래서 조바심이 나는 거겠지. 목표를 코앞에 두고, 다시 길을 잃게 될까 봐.”

“그러더라도 혼자 헤매지는 않으실 거요.”

침대 맡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든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나도 찾는 놈들이 있잖소. 경도 아시겠지만, 같은 놈들일 확률이 높고.”

메브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필립이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맞습니다. 막다른 길이면 어떻습니까? 이안 나리가 계신데요. 분명 어떤 식으로든, 생각지도 못한 길을 찾아내실 겁니다.”

“물론, 그건 이번 싸움에서 살아남아야 가능한 일이지.”

그 근거 없는 믿음은 둘째 치더라도.

코웃음 치며 대답한 이안이, 일행들을 차근히 돌아보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다들 눈앞의 목표에만 집중해. 잡생각이나 소풍가는 기분으로 상대할 만큼 호락호락한 것들은 아닐 것 같으니까.”

샬롯은 물론, 테사이아까지 진지한 눈빛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샬롯과 눈이 마주친 이안이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남은 시간 동안, 다들 휴식도 충분히 취하도록 하고.”

“옳은 말이다, 이반.”

슬쩍 앞으로 나선 테사이아가,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깐 채 일행을 돌아보았다.

“이반 경이 말했듯, 휴식도 여정의 일부이니. 필립? 나가서 하인들을 들라 이르고, 식사를 준비하라 하거라. 성대하게.”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평소보다 더 과장된 태도였다. 풀썩 웃음 지은 필립이, 마찬가지로 과장된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주군.”

꼬박 하루를 더 휴식으로 보낸 일행은, 그 다음 날 오전이 되어서야 드네로브를 떠났다.

마중 나온 주민들과 루스의 인사를 받으며, 시들어 쓰러진 밀밭들을 등진 채로.

***

루스는 예배당에 놓인 의자의 간격을 다듬고 있었다. 백작을 비롯한 모든 주민들이 정화 기도와 의식을 치렀으니, 예배당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린 것이다.

당분간은 도시의 유일한 사제인데다 그마저도 임시 승격된 처지에 불과했지만. 루스는 모든 고된 업무를 담담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물론 주민들의 도움과 백작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터였다. 백작은 그날의 비극에서 살아남은 그를 아주 신뢰하고 있었다.

“사제님, 사제님…!”

문이 벌컥 열리며 예배당으로 청년 하나가 달려 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교회의 일을 도우며, 루스의 수족 역할을 자처하는 이였다. 하던 일을 멈춘 루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 중앙, 중앙의 대교회에서 나온 분들이 오셨습니다…!”

청년이 숨을 헐떡이며 한 말에, 루스의 낯이 순간 굳어졌다.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다시 평소의 얼굴로 돌아온 그가 차분하게 말했다.

“중앙에서 온 분들이 확실합니까?”

“예, 본교단의 분들만 입으신다는 망토를 걸치고 있답니다.”

“그렇군요… 교회로 오고 계시고요?”

“직접 본 건 아닙니다만, 아마도요. 경비 대장에게 인근의 밀밭이 말라 죽은 이유라던가, 도시의 사건 같은 것들을 물었다고 합니다.”

“…바로 가서 백작께 상황을 전해주세요. 제가 보냈다고 말씀하시면 들여보내 줄 겁니다.”

“예…!”

숨을 고른 청년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루스의 눈빛에, 비로소 감추고 있던 긴장과 두려움이 묻어나왔다.

‘대 교회의 사제님들이… 무슨 용무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물론, 백작도 아직 중앙에 이곳에서 일어난 비극을 알리지 않았으니까.

이제야 겨우 도시에서 그날의 흔적을 전부 지우지 않았던가.

그러니 지금 도시에 들어선 이들은, 전혀 다른 목적으로 이곳을 찾은 것이란 뜻이었다.

애초에 중앙이 알게 되었다 해도, 조사단이 파견을 나오기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다.

원로 요정 일행이 도시를 떠난 지도, 아직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해도… 이 일을 문제 삼는다면….’

어쩌면 다음에 드네로브를 찾는 것은 조사단이 아니라 정화자들일지도 몰랐다. 온갖 흉흉한 소문으로만 존재하는, 신의 엄벌.

그들을 실제로 만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끼이-

그때, 예배당의 대문이 다시 열렸다. 그 너머로 드러난 두 실루엣을 눈에 담은 루스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서,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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