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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망캐가 되었다-326화 (326/412)

#326화

“허어….”

입을 설핏 벌렸던 트루드가 짧은 탄식을 흘렸다.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곧바로 문을 연 그가 복도로 나설 찰나.

“이렇게 말씀을 끝내신다고? 대, 대장, 잠깐만 기다려 보시오…!”

뒤늦게 벌떡 일어선 트루드가 허둥지둥 따라 달려 나왔다. 덩치가 커서인지 바닥의 나무판자가 삐걱댔다.

“할 말이 남았냐?”

이안이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그의 시선은 함성 비슷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복도 너머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한 달은 너무 촉박한 시간이오. 단원들을 전부 집결시키는 데만 해도 최소 보름은 걸릴 거란 말이오. 보급은 또 어떻고?”

트루드는 그의 뒤를 따르면서 쏟아내듯 속삭였다.

“물자란 물자는 만들어지는 대로 족족 전선이나 본국으로 보내지고 있어서, 트라벨가엔 지금 변변찮은 것들밖에 없단 말이오. 우리가 괜히 직접 도시를 오가면서 물건을 구하겠소…?”

하지만 이안은 표정 변화조차 없었다. 트루드가 마른 침을 삼켰다.

“소, 소문은 또 어떻고? 대장이 돌아오셨다는 걸 알리려면-”

“착각하나 본데.”

이안이 말을 잘랐다. 트루드가 멈칫하는 가운데, 그가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덧붙였다.

“지금은 이미 전시 상태야. 기한도 내가 정한 게 아니고. 나한테 징징거려 봐야 아무 의미 없어.”

“…검은 벽.”

침음하듯 내뱉은 트루드가, 비로소 얼굴을 쓸어내렸다.

“침식이 세 달도 남지 않았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제기랄… 그래도 조금은 더 시간이 있는 줄 알았소만.”

정확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는 건,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침식이 코앞이라는 걸 다들 확실히 알게 되면 통제할 수가 없을 테니까. 아마 다소 희망적인 가짜 소문들을 잔뜩 퍼뜨렸으리라.

이안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보다 훨씬 더 짧을 거다.”

“……!”

“한 달도 최대한 미룬 거야. 그리고….”

이안이 눈을 부릅뜬 트루드를 돌아보았다.

“그 힘든 걸 해내는 게, 네 역할이다.”

“그… 렇지. 그게 내 역할이오. 암….”

대조적으로 검게 가라앉은 눈을 바라보던 트루드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눈을 질끈 감고 숨을 고른 그가 이내 덧붙였다.

“대공 전하께 요청을 넣어 보겠소. 대장의 이름을 써서 말이오. 그게 아니라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겠소.”

“일단은 사람들을 모으는 것에만 집중해. 어쩌면, 뜻밖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

트루드가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이안은 망설임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에서는 박자를 맞춘 괴상한 함성이 번지고 있었다.

그 소리가 칼로 자른 것처럼 끊어진 건, 이안이 계단을 반쯤 내려갔을 때였다.

“…….”

“…….”

손을 맞잡고 식탁에 마주 앉은 두 용병과 그들을 감싸고 모여 선 용병들이, 다들 하던 걸 멈추고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안은 바로 옆의 식탁에 앉은 미구엘과, 그 맞은편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루시아를 번갈아 눈에 담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아, 그게….”

다소 난처한 미소를 지은 미구엘이, 식탁에 놓아둔 지도를 집어 들어 올렸다.

“머리를 모아서 북쪽 동네 지도를 그리고 있었어서 말이오.”

무슨 볼일이 있단 건가 했더니….

내심 읊조린 것과 달리, 이안의 눈매는 조금 더 가늘어졌다.

“그게 팔씨름하고 무슨 상관인 건데.”

“그… 서로 마을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를 놓고 설전이 벌어져서….”

이안의 미간에 진 그림자가 조금 더 짙어졌다.

“설마, 이긴 놈 의견대로 그리겠다는 건 아니겠지.”

“바로… 맞추셨소만….”

미구엘의 대답에, 이안은 비로소 그가 펼쳐 내민 지도를 눈에 담았다. 장벽 윗부분에 검은 잉크로 새로 그려진 점선들과 어린이 낙서 같은 집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만든 지도를 보고 다녀야 한다니.

“용병들이 약도를 그릴 때 종종 쓰는 방식이래요. 보기보다 아주 정확하고요.”

루시아가 담담하게 덧붙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냥 팔씨름 구경이 재미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이안의 시선에 정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 미구엘이, 재빨리 덧붙였다.

“그, 그래서. 말씀은 다 나누셨소?”

“…그래.”

이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내의 침묵이 조금 더 짙어진 건 물론이었다.

“저… 대장.”

몸을 반으로 접다시피 숙인 트루드가 속삭인 건 바로 그때였다.

“한 말씀만 해 주시면 안 되겠소?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말이오.”

부하들 앞이라 그런지 제법 근엄한 표정이 된 채였다.

귀찮게 진짜…. 이안은 낮게 코웃음을 흘리면서도 장내를 내려다보았다. 용병들을 눈으로 차근히 훑으며,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용살자의 전사들….”

몇몇은 걱정과 불안이 뒤섞인. 그리고 몇몇은 경외와 기대감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자는 대부분 그와 함께 했던 녀석들이었고, 후자는 대부분 처음 보는 놈들이었다.

…그래. 원래 아는 게 더 무서운 법이지.

건조하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너희들의 이름을 증명할 순간이 왔다.”

“……!”

“……!”

용병들의 눈이 일제히 커졌다. 몇몇은 기대된다는 듯, 몇몇은 두려움이 현실이 되었다는 듯. 침묵을 깨뜨린 건 트루드였다.

“말씀 끝나신 거, 안 보이냐?”

“와, 와아아아-!”

봇물이 터지듯 함성이 터져 나왔다.

“북부의 대전사! 용살자여-!”

“북부의- 초인이여-!”

용병들이 내지르는 포효는 건물을 무너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내 귀도 멀겠군.

이안은 간부들에게 올라오라는 눈짓을 보내는 트루드를 등진 채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아직도 서로 손을 맞잡은 채 포효하는 두 용병을 눈에 담은 그가, 식탁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계속해. 지도는 완성해야지.”

“……! 예, 대장…!”

여관이 텅 빈 건 바로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날이 밝기도 전에, 둘 셋씩 짝을 지은 용병들이 도시 밖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몇몇은 다른 도시의 지부로. 몇몇은 화로의 사원으로. 그리고 덩치가 산 만 한 용병을 비롯한 몇몇은 트라벨가로. 그리고 또 몇몇은, 자치령 구석구석까지 북부의 초인이 돌아왔음을 알리기 위해서.

그들이 퍼뜨린 소식은 마치 불씨처럼, 차갑게 식어 있던 자치령 구석구석에 새로운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열기는 용병들이 의도한 것보다 더 빠르고 뜨겁게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하지만 정작 용살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장벽을 넘어, 눈 덮인 자신의 영지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

이른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반나절이 지나도 그치지 않았다. 먹구름과 어우러져 잿가루가 내리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주위 풍경만큼은 착실하게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닐라의 발굽 소리 사이에 사각대는 소리가 겹쳐졌다.

“…….”

두건을 눌러쓴 채 안장에 앉은 이안은, 설원 지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변해가고 있는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 세계의 문명은 아주 지엽적이어서, 조금만 벗어나도 이렇게 막막할 정도의 대자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이 경험한 바로, 예외는 제국의 중앙 지역뿐이었다.

다각- 다각-

하지만 다행히, 아직까지 일행의 여정은 무탈하고 평화로웠다.

눈이 내리는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바람이 휘몰아치지도 않아서, 오히려 평소보다 더 적막하고 고요하게 느껴졌다.

말발굽 소리조차 관도를 거의 덮어가는 눈에 묻혀서 평소보다 조용했다.

심지어 이안은 추위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그의 높은 냉기 저항력 때문이 아니었다.

사아아….

앞장선 미구엘과 나란히 걷고 있는 루시아 덕분이었다.

안장에 흘러내린 그녀의 가죽 망토는 미풍이 부는 것처럼 저절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주위로 온기가 번져 나갔다.

이른 아침, 야영지를 떠나기 전에 모닥불을 앞에 놓고 기도를 올린 결과였다.

“제 성흔에 불씨를 지폈어요. 말들이 덜 지칠 거예요.”

루시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물론 대단한 기적이었다. 이안의 감각은, 정말 루시의 내면에서 뭔가 타들어 가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 어떤 불길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본래는 녹색이던 눈동자가 불길을 머금은 것처럼 주황색으로 변해 아른거렸을 뿐이었다.

본래의 눈동자 색과 합쳐져, 때때로 노란색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래서 루 엔테르의 성화를 북부에 둔 건가?’

어쨌건, 그녀가 뿜어내는 은은한 온기는 뒤따르는 이안까지 충분히 감쌀 정도로 넓었다. 눈송이조차 자연스럽게 밀려나서, 일행은 몸이 젖을 일도 없었다.

“밤중에는 그쳤으면 좋겠군. 아니면 어디, 계곡에 숨어 있는 동굴이라도 찾아봐야겠어.”

지도를 펼쳐 든 미구엘이 문득 읊조렸다.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였다. 루시아를 흘깃 일별한 그가 덧붙였다.

“우리 사도님께서 밤새 이렇게 온기를 품어 주실 수 없을 테니까.”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지금도 그다지 피곤하지 않은걸요.”

“무리하지 마라. 힘들면 언제든지 멈춰도 돼.”

루시아의 담담한 말에 대답한 건, 미구엘이 아니라 이안이었다.

꼬박 반나절 만에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기도 했다. 뒤를 홱 돌아본 루시아가 미소 지었다.

“네. 그럴게요, 이안 님.”

이안의 시선이 그녀의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길 잃지 않게도 신경 쓰고.”

그를 돌아본 미구엘이 즉답했다.

“염려 마시오. 내 출신이 뭔지 잊으셨소? 눈이 이보다 더 쌓여도 길을 잃을 일은 없을 것이오.”

놀랍게도 꽤 믿음직스럽게 느껴져서, 이안은 그런 자기 자신에게 의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길을 찾는 건 그가 간섭할 부분이 아니었다.

미구엘과 필립은 그림 낙서에 불과한 지도로도 귀신같이 길을 찾아내지 않던가.

그리고 그건, 팔씨름 승부의 결과로 만들어진 저 지도를 손에 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직까지 미구엘은 단 한 번도 갈림길 앞에서 고민한 적이 없었다.

이안이 보기엔 그게 더 마법 같은 일이었다.

낮게 헛기침하던 미구엘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이안을 돌아본 건 그때였다.

“…어떻게든 예정대로 마을에 도착할 수 있게 할 것이오. 시간도 촉박한데. 형씨 등을 밀어주진 못할망정 발목을 잡을 수는 없잖소. 지금도 종일 그렇게 혼자 머리를 싸매고 계셨는데.”

왜 이렇게 조용한가 했더니. 날 배려한 거였군.

코로 웃음을 흘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던 대로 해. 무리하지 말고.”

“원래 그 말이 제일 부담스럽다는 거, 모르시오?”

미구엘이 덧붙인 말에 이안의 입꼬리가 조금 더 말려 올라갔다.

미구엘의 표정도 비로소 풀어졌다.

“그래… 이제야 생각 정리가 좀 끝나신 모양이군.”

“너희가 조용히 있어 준 덕분에.”

“뭐 어려운 일이라고. 오히려 역시 형씨는 대단하다 싶었소. 나였으면 온 사방에 욕부터 갈겨 댔을 텐데 말이오.”

“나도 했어. 속으로만.”

“아 그러셨소? 으하하. 그걸 참으신 것도 대단하군.”

너스레를 떨며 루시아를 슬쩍 돌아본 미구엘이, 이내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도 참 지독한 분이시오. 아무리 형씨를 믿는다고 해도, 주둔군을 반이나 옮겨 버리실 줄이야. 성전사단에 정화대는 또 어떻고. 아무리 코딱지만 한 규모라도, 아시잖소? 그들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성전사단과 정화대를 물린 건 황제가 아니며, 그도 바라지 않던 상황이겠지만.

이안은 굳이 그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바로 잡는다고 해도 미구엘의 눈에는 다를 바 없어 보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황실과 교단의 복잡한 관계 같은 건, 그가 알 바 아닐 테니까.

“사실상 북부 전선은 자치령이 알아서 지켜 내라고 선언한 것과 다름없소. 아무리 동부나 남부보다 기본적으로 튼튼한 전선이라고 해도 말이오. 북부인들은, 이번 일을 기억할 것이오.”

…나도 기억할 거고.

이안은 속으로만 읊조렸다. 어쨌건,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번에는 충분히 해 볼 만하다 여긴 게 불과 얼마 전이건만. 지금은 솔직히 카링기온을 지켜 내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 같았다.

전선을 전부 지켜 내리란 기대는 깔끔하게 버렸다. 그가 아무리 애쓴다 해도, 북부 전선 곳곳에는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으리라.

어쩌면 게임에서 그랬듯 끝내….

‘…아니. 그렇게 되진 않을 거다.’

내가 막아낼 거니까. 어떻게든.

내심 다짐한 것과 달리, 이안은 담담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미 일어난 일이야. 우리는 그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 최선을 다해서.”

“끙… 그야 그렇지만….”

“게다가 그 누구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대공이야. 영악한 작자니까, 자기 발이 다 타버리는 걸 그냥 보고 있진 않겠지. 나만 믿고 있지도 않겠고.”

이안이 덧붙인 말에, 미구엘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건 또 그렇소. 그분은 또, 자기 안위는 끔찍하게 챙기는 분이시니까. 지금도 눈이 벌게져서 대안을 물색하고 있을 것이오.”

“아마, 마탑과 손을 잡지 않을까요?”

루시아가 끼어들었다.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대공과 긴밀한 관계인 마탑이 있나?”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적색 마탑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 얘긴 나도 들은 적 있수. 아시잖소, 마법사들은 죄다 조금씩 이상한 거. 아, 물론….”

슬쩍 이안을 돌아본 미구엘이 머쓱하게 덧붙였다.

“형씨를 노리고 한 말은 아니오.”

“누가 뭐래?”

“괜히 찔려서 말이오. 흐흐…. 아무튼, 듣자 하니 적색 주문쟁이들은 일단 태우거나 터뜨릴 수만 있으면 좋아한다더군. 거기서 어떤 아름다움을 찾는다나.”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그렇다고 들었어요. 불꽃에 그렇게까지 매료되는 이유를 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요. 아시다시피.”

루시아가 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덧붙였다. 이안의 시선이 문득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너는 이제 아예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거냐?”

“네. 제 심장에 성흔이 자리하게 된 후로는요. 그렇다고 제 재능이 사라진 건 아니에요. 대신, 성화를 다룰 수 있게 되었을 뿐이죠.”

루시아가 이안을 돌아보며 슬며시 오른손을 펼쳤다. 손아귀에서 소리 없이 피어난 주황색 불꽃이, 춤을 추듯이 아른거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싱긋 미소 지은 그녀가 덧붙였다.

“원장님 말씀으로는 성흔이 사라지면 다시 주문을 사용할 수도 있을 거라는데.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다른 마법사들 앞에서는 그런 말 꺼내지 마라. 혹시 모르니까.”

이안이 덧붙인 말에 루시아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이안 님은, 여전히 마법사들을 전혀 믿지 않으시는군요.”

“해가 서쪽에서 뜨기 전까진. 아마도. 어쨌든, 대공이 적색 주문쟁이들과 각별한 관계란 말이지.”

이안은 과거, 벨리움 요새에서의 전투를 떠올렸다. 그때 전투를 지휘한 겔루드 장군의 곁에도 적색 주문쟁이가 함께 있었었다. 아마도 그자는 울라프 대공의 사람이었으리라.

“북부는 그자들이 마음 놓고 터뜨려 대기에 딱 좋은 환경이잖소. 게다가 북부인들도, 적색 주문쟁이들은 그나마 덜 싫어하는 편이지. 다른 주문쟁이들처럼 음침하지 않고 화끈하다나. 물론 뭐, 실제로 그렇진 않겠지만 말이오.”

“물론이지.”

화끈하게 정신 나간 놈들이라면 모를까.

이안이 콧방귀를 뀌는 사이, 어깨를 으쓱인 미구엘이 말을 이었다.

“이젠 교단도 맥을 못 출 테니, 확실한 대가를 약속받고 합류할지도 모를 일이오. 저쪽에서도 바라던 일이겠지. 교단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기를 못 피고 살고 있잖소.”

간만에 그럴듯한 소릴 하는데….

이안은 미구엘의 추론이 허무맹랑하지 않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대부분 정신 나간 놈들이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오히려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화기가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이 세계에서, 그들은 걸어 다니는 대포나 다름없으니까. 수성전에서는 특히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거기다 우리도 있어요. 용병들을 통해 자세한 상황을 전했으니, 아마 최대한의 사제단을 파견하게 될 거예요. 더 중무장하고, 체계적으로요.”

덧붙인 루시아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우린 그나마 적색 마법사들에 대한 편견이 적은 편이니까, 큰 충돌 없이 어우러질 수 있겠죠. 물론 전선 곳곳이 불바다가 되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좋지 않겠어요?”

“그렇겠지….”

대답하면서도, 이안은 미간을 설핏 좁혔다. 그의 뇌리로는 게임에서의 화로의 사원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정확히는 광기에 물들어 인신 공양을 일삼던 사제들이.

그리고 그들은, 백색에 가까운 푸른 불꽃을 뿜어 댔었다.

“하지만 다들 너처럼 계시를 받은 건 아닐 텐데. 여신의 은총도, 마음먹은 대로 막 받을 수 있는 건 아닐 테고.”

“물론 그렇죠. 하지만 우리에게는 성화가 있잖아요. 사도가 아니라도, 불씨를 품을 수는 있거든요.”

꽤 위험하게 들리는 말인데.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물론 그 불씨를 유지하려면, 계속해서 다시 열기를 불어 넣을 성화가 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지금 성화를 피워내고 지필 수 있는 건, 단 둘뿐이죠. 원장님과 저요.”

“……!”

이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루시아를 마주 보았다. 노란색에 가깝게 일렁이던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주황빛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어쩌면 이게, 북부를 지키기 위해 제게 내려진 사명일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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