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트라벨가, 서문.
“어서 내성으로 달려가, 대공 전하께 직접 소식을 전하시게. 설원 변경백께서 대면을 청하셨다고 말일세.”
말에서 내린 빌모르가 관문 대장에게 말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설원 변경백이라면…?”
미간을 좁힌 채 되묻던 관문 대장의 시선이, 빌모르의 뒤편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안장에서 내리는 이안의 얼굴을 확인한 그의 눈이 비로소 커졌다.
“저, 정말이군요. 맙소사, 루 솔라여….”
“서두르시게. 어서.”
“알겠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대답한 관문 대장이 득달같이 몸을 돌려 달려갔다.
‘바로 알아보다니.’
내 직위에 대해서도 소문이 다 퍼진 건가. 이안이 슬쩍 눈썹을 꿈틀대는 사이, 작게 한숨을 내쉰 빌모르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전하께서 준비하실 시간을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 우웁.”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성벽으로 달려간 빌메르가 속을 게워냈다. 관문 대장과 대화 중일 때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종일 흔들리는 안장 위에 앉아 있던 여파일 터였다.
“별 말씀을.”
고삐를 손에 쥔 이안이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빌모르에게 미리 대면 요청부터 전하라 한 건, 물론 전혀 대공을 배려해서가 아니었다.
대장간이나 잡화상, 그리고 외부의 상인들로 바글거리던 공방 거리를 돌아보고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세라스의 지원이 도착하지 않았으니, 조금이라도 대안을 찾아봐야 했다.
“…자, 잠깐. 설마…?”
관문을 지나치자, 트라벨가의 전경이 펼쳐졌다.
저 멀리 보이는 성과 무채색의 건물들. 이안이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다소 뒤숭숭하고 삭막해 보이는 주민들의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런 건, 침식이 머지않았음을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맙소사, 북부의 초인이여….”
그 와중에도 이안의 얼굴을 본 주민들 몇몇이 놀란 듯 눈을 치켜뜨며 멈춰 서고 있었다. 이안이 그들을 지나치는 가운데, 속을 추스른 빌모르가 곁으로 허둥지둥 따라붙었다. 안색이 누렇게 뜬 채였다.
이안을 곁눈질하던 그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이쪽 길로 접어드십니까? 성으로 가시는 길은-”
“공방과 대장간을 돌아볼 거요. 쓸 만한 물건이 없는지.”
이안의 덤덤한 대답에 빌모르가 낮게 탄식했다.
“무엇을 원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눈에 차시는 물건은 없을 겁니다. 외부 상단의 출입이 끊긴 지 한 달이 넘었고, 좋은 물자는 전부 전선이나 본국으로 보내졌습니다.”
“뭐, 그렇겠지….”
놀랍지도 않다는 듯 대답하면서도, 이안은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잠깐. 저 분, 설마…?”
“이럴 수가. 정말 똑같으시군….”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번지는 가운데, 빌모르도 흘깃흘깃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오는 동안엔 말을 달리느라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었지만. 이렇게 함께 걷고 있으니 영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열기도 활기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거리로 접어든 이안이 불쑥 입을 열었다.
“예, 예. 말씀하십시오. 각하.”
어깨를 들썩인 빌모르가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다. 조촐하기 그지없는 가판을 돌아보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어떻게 다들 나를 알아보는 건지, 혹시 알고 있소?”
벌써 수십 명째, 그를 본 순간 눈을 부릅뜨며 멈춰 서거나 긴가민가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남녀노소 다양했다.
트라벨가인 만큼 그의 얼굴을 아는 이들이 제법 있다 해도 이상하지는 않지만, 이건 지나치게 많았다.
애초에 이안이 만났던 일반인은 주점 주인이나 여급 정도가 전부이지 않던가.
“모르셨나 보군요.”
비로소 빌모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아마 이곳에 각하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 다들 천장화를 봤으니까요.”
“……?!”
이안의 고개가 절로 그에게로 돌아갔다. 동시에 그의 뇌리로 과거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트라벨가의 교회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천장화를 그리겠다던.
“그걸 진짜 그렸고, 완성까지 시켰다고…?”
“예. 완성된 건 몇 달 전입니다. 제국의 가장 유명한 화가 둘이 자원했다고 하더군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 빌모르가 말을 이었다.
“빌헬름과 레오나르도라는 자들인데, 제국 최고의 명인들이 처음으로 합작품을 만들어 낸다고 귀족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됐었습니다. 정말 들어 본 적 없으십니까?”
“…전혀.”
이안이 간신히 내뱉은 대답에, 빌모르가 자부심 넘치는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두 명인이 밤잠을 줄여 가며 작업에 매진했다고 하더군요. 거기다 겔루드 장군이 틈만 나면 들러 감수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직접 본 것들과 가장 똑같은 결과물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요.”
“겔루드 장군이…?”
“예. 아주 열성적이셨다더군요. 놀라운 일은 아니죠. 그분은 각하를 숭배합니다.”
그 미친 늙은이가. 속으로만 읊조린 이안이 내뱉었다.
“장군도 아직 이곳에 있소?”
“애석하게도 아닙니다. 지금은 헬리네제 요새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셨으니까요. 아마 그분도 각하를 뵙지 못한 것을 그 누구보다 아쉬워하고 계실 겁니다.”
“…언젠간 꼭 다시 만나야겠군.”
그리고 그때는 주먹으로 반가움을 표시할 터였다.
“장군을 뵐 일이 있다면 꼭 전하겠습니다.”
이안의 속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대답한 빌모르가, 저만치에 보이는 교회 지붕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덕분에 한동안 교회에는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입장료가 비쌌지만, 다들 주머니를 털어 방문하곤 했죠. 타락용의 두개골과 함께, 트라벨가의 명물이 된 겁니다. 비록 지금은 교회가 민심을 잃었지만 말입니다.”
“…….”
이안은 더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시 이안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빌모르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궁금하시다면 한 번 들러보시겠습니까? 저도 몇 번이나 봤습니다만. 정말이지 장면 장면이 생생하고 웅장해서, 볼 때마다 새로운-”
“그만.”
들르긴 뭘 들러. 이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영문도 모른 채 바짝 얼어 버린 빌모르를 잠시 바라본 그가, 이윽고 옅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성으로 갑시다. 귀하의 말씀대로, 내가 건질 만한 물건은 없는 것 같으니.”
이만하면, 그를 맞을 준비도 충분히 끝냈을 터였다.
***
울라프 대공은 성의 대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여기서 물러나 보겠습니다. 각하.”
가장자리를 강철로 마감한 목조 대문 앞에 선 빌모르가 공손하게 옆으로 물러났다.
“수고하셨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걸음을 내딛자, 대문이 육중한 소리와 함께 좌우로 천천히 열렸다.
넓은 장내가 드러나자, 이안은 덤덤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의 겉모습이 그렇듯, 화려하기보다는 칙칙하고 어두운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다.
좌우 벽면에는 횃불을 따라 중무장한 근위병들이 서 있었다.
완전히 무장하고, 손에 도끼 창까지 세워 든 채였다. 홀로 온 손님을 맞이하기엔 과한 호위였다.
‘바짝 쫀 건가, 아니면 내 기를 좀 죽이려는 건가.’
이안은 내심 웃음을 삼켰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는 싸우러 온 게 아닌 데다, 대공과 나눌 대화를 생각하면 보는 눈이 많은 쪽이 오히려 좋았다.
게다가 이안의 초인적인 시력은, 음영 진 근위병들의 안면 가리개 사이를 어렵지 않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미동도 없는 와중에도 그를 주시 중인 눈동자들. 그리고 그 눈에 맺힌 경외와 두려움까지.
저벅- 저벅-
물론, 이안의 시선이 근위병들에게 머문 건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시선은 줄곧 정면의 단상에 놓인 상석에 고정되어 있었다. 왕좌를 방불케 할 만큼 크지만, 아무런 장식도 없이 각진 형태의 상석.
그 아래에 앉은 대머리 중년인이 바로, 북부의 지배자인 울라프 대공이었다.
좌우에는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기사와 고급스러운 두건 망토를 뒤집어쓴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주문 쟁이네.’
이안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어떤 색의 마법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황상 적색이 아닐까 유추할 뿐.
물론, 이것 역시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이번 대화에서 저자가 끼어들 자리는 없을 테니까.
“호오….”
물론 대공 역시, 이안이 들어선 순간부터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벗겨진 머리와 달리 수염을 풍성하게 기른 입가에 미소가 맺힌 채였다.
물론, 눈빛은 그다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탐색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내가 찾아온 이유를 엄청나게 고민 중인 모양인데….’
이안이 생각할 찰나, 옆에 서 있던 기사가 반걸음 앞으로 나섰다.
울라프 대공이 오른팔을 들어 저지한 건 거의 동시였다. 검은 털가죽으로 덮인 치렁치렁한 소매가 흔들리는 가운데, 대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과연, 천장화에 그려진 모습 그대로시군…!”
내뱉는 그는, 많은 북부인이 그렇듯 체구가 좋았다. 저 두툼한 옷 아래의 몸은 이제 근육보다는 기름이 더 많을 것 같긴 했지만.
“불필요한 절차는 생략합시다. 위대한 북부의 초인 앞에서 권위를 내세우는 건 우습기만 할 뿐일 테지.”
대공이 호탕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시선은 멈춰 서는 이안에게 고정된 채였다.
“전에 만나지 못했던 아쉬움을 이렇게 풀게 되는군. 반갑소.”
이안의 눈을 응시하며 잠시 미소지은 그가 덧붙였다.
“내가 귀하를 어떻게 불러주기를 원하시오? 대전사? 용살자? 변경백? 그도 아니라면, 성자 대행?”
간 보긴.
이안은 또 한 번 실소를 삼켰다.
물론, 대공이 그를 견제하고 의식하는 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는 천장화까지 그려진 북부의 살아있는 영웅이 아니던가. 게다가 지금은 황제가 직접 박아 넣은 굴러온 돌이기까지 했다.
어쨌건, 이안이 찾아온 진짜 이유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변경백이면 충분하겠군요.”
이안이 대답했다. 주머니를 털러 온 입장에서, 이 정도 예의 정도는 충분히 갖춰줄 수 있었다.
그가 이렇게 공손하게 대답할 줄은 몰랐던지, 눈을 몇 번 빠르게 깜빡인 대공이 미소 지었다.
“알겠소. 변경백.”
각을 세우러 온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엔 충분한 대답이었을 터였다. 물론, 눈빛을 봐선 곧이곧대로 믿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자리에 앉은 대공이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묻겠소. 임명장과 명령서, 그리고 전언까지 남겼거늘. 왜 굳이 직접 찾아온 것이오? 그것도 이런 급박한 시기에. 설마하니….”
대공의 목소리가 슬며시 낮아졌다.
“내 뜻에 항명하려는 건 아닐 텐데 말이오. 또다시.”
거, 뒤끝도 기시군.
이안은 빙긋 미소 지었다.
하긴. 그는 전에 끝내 대공을 만나지 않고 북부를 떠났었다.
고마움은 잊어도 서운함은 잊지 않는 게, 귀족과 주문 쟁이의 공통점이 아니던가.
심지어 이안은 대공의 시선에서 때때로 저릿한 느낌이 드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육감이 특출나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었을 만큼 옅은 감각이었다.
저자 역시 주문 쟁이 이거나, 어떤 타고난 혈통의 힘을 감추고 있으리란 의미였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아무래도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이안은 상념을 떨치며 입을 열었다. 고저는 없지만, 평소보다는 부드러운 말투였다.
“황명으로 임명되었다 하나, 그것이 대공 전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호오…?”
“적어도 다가올 위기를 극복할 때까지, 전하와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일 겁니다.”
또다시 빠르게 눈을 깜빡인 것도 잠시, 대공이 이윽고 덧붙였다.
“그 후에는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가?”
“그렇지요. 그때는 다시 북부를 떠날 테니까.”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농담처럼 내뱉으며, 대공이 슬며시 이를 드러냈다. 그 와중에도 이안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그의 속내를 헤집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이.
‘쉐도우 복싱 오지네.’
피곤하게도 산다. 생각하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럼 왜 직접 행차하셨소? 나와 한마음 한뜻이라면,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도 잘 알고 계실 텐데.”
“잘 알고 있으니 온 겁니다.”
이안의 미소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한마음 한뜻으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하의 도움이 필요하니까요.”
“도움…?”
비로소 대공의 눈매가 슬쩍 꿈틀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발언이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역시, 이 작자의 머릿속에는 온갖 정치적인 구도와 중상모략, 권력을 위한 큰 그림 따위 밖에는 들어있지 않은 것이다.
“아시다시피, 내 병력은 야인과 용병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야인들은 뛰어난 전사들이지만, 무장은 형편없는 편이죠. 그러니까….”
덤덤하게 말을 이은 이안이 대공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병기고를 열어 병장기를 내어 주십시오. 전하.”
“병장기…?”
대공의 한쪽 눈매가 비로소 좁아졌다. 그의 눈동자에 당혹과 동시에 영문 모를 경계가 짙어졌다.
고작 그것만으로 자신을 찾아올 리가 없다고 여긴 것이리라.
“변경백은 카링기온으로 가게 될 것이오. 그리고 그곳에, 귀하의 병력을 무장시킬 만한 재고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겠지.”
“군단 하나를 통째로 재무장시킬 만큼 충분합니까?”
“……?”
좁아져 있던 대공의 눈매가 삽시에 커졌다. 눈동자에 맺힌 경계심이 삽시에 날아갔다.
대공의 입술이 달싹였다.
“군단…?”
“아직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지금 야인 정착지에 주둔 중인 병력의 숫자는 천 명이 훨씬 넘습니다.”
“……!”
대공이 숨을 들이켰다.
역시. 아직 이안의 병력에 대한 정확한 보고는 받지 못한 게 분명했다. 장벽 요새와 관문을 지나쳤지만, 트라벨가까지 그 보고가 도착하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심지어 이안은 망자 군단보다도 빠르게 남하하지 않았던가. 그럴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사실, 망자들처럼 걸리는 모든 것을 파괴하지 않아서이긴 했지만.
“설원의 야인들. 그 무법자들을 진정, 군단 규모로 집결시켰단 말인가…? 그 짧은 시간 만에?”
“저는 설원 지대를 하나로 통합했습니다. 전하.”
“……!”
“그리고 가장 뛰어난 전사들만을 추려 이곳으로 왔죠.”
이안의 덤덤한 대답이 이어질수록, 대공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태어나서 처음 마법을 본 사람 같은 눈빛. 이안이 잠도 거의 자지 않고 움직였다는 사실까진 알 도리가 없으리라.
동시에 북부의 가장 노련한 전사와 용병들로 이루어진 변경백의 군단이, 트라벨가에서 고작 하루 거리에 집결해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터였다.
대부분의 병력이 전선 인근에 집결한 지금, 트라벨가 역시 상대적으로 텅 빈 상태가 아니던가.
물론 모든 건 저 반질반질한 머릿속에서만 굴러가는 상상에 불과했다.
이안은 자신을 따르는 군단을, 고작 이런 늙은 너구리의 목을 따기 위해 희생시킬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 뛰어난 북부의 전사들이, 빈약한 무장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일렁이는 대공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며 말을 이은 이안이, 입꼬리를 싸늘하게 말아 올렸다.
“전하께서 도움을 주신다면, 그들은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겁니다.”
내어주지 않으면 그 원한도 잊지 않으리라는 뜻이었다. 단박에 알아들은 듯 대공의 낯이 굳어졌다.
게다가 어느새, 좌우에 늘어선 근위병들이 이안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은 모두 북부인이었다.
야인들이 하나로 뭉쳤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여기서 거절한다면, 그가 야인 전사들을 버린 셈이 되리라.
“전투가 끝난 뒤에 남은 물자는, 모두 카링기온에 반납하겠습니다. 전하의 것이니 돌려 드려야지요.”
입가의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이안이 쐐기를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