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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망캐가 되었다-350화 (350/412)

#350화

철컥-

판금 견갑을 백린 갑옷의 어깨 부분에 고정한 이안이 어깨를 휘휘 돌렸다.

‘훌륭하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곧바로 반대쪽 견갑도 착용하기 시작했다.

컨디션이 아주 좋았다. 높은 능력치와 몇 개의 성물, 그리고 루 엔테르의 축복이 더해진 그의 회복력은 말 그대로 초인적인 수준이지만. 결국, 정신과 육체의 피로를 무한대로 없애 주지는 못했다.

역설적이게도 묘한 안도감을 주는 사실이기도 했다. 아무리 능력치가 높아진다 한들,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지는 않는다는 걸 확인받는 느낌이었으니까.

‘고작 한나절 쉬고 할 생각은 아니긴 하지만….’

강철 장화까지 정강이와 뒤꿈치에 딱 맞게 고정한 이안이 일어섰다.

몸에 착 달라붙는 갑옷과 각반은, 역시나 움직임이 아주 편하고 밀착감이 좋았다.

새로운 피부가 돋아난 듯한 느낌.

얇은 판금을 겹쳐 만든 안감 덕분에 갑옷 특유의 굴곡이 남아 있는데도 그랬다.

이안은 허리춤에 진은 강철 장검을 장착했다. 그림자 망토는 곧바로 머리에 뒤집어쓰는 대신, 견갑 안쪽과 갑옷의 목덜미 안쪽에 딱 맞게 고정했다.

이렇게 해도 원한다면 언제든 두건을 뒤집어쓸 수 있었다.

‘역시, 그때 몇 개 더 챙겼어야 했다니까.’

찢겨지거나 구멍이 뚫린 망토 끝자락을 내려다보며, 이안은 짧게 입맛을 다셨다.

어쨌건 망토 표면은 여전히 광택 없는 검은색을 유지하고 있었고, 어딘가에 걸리거나 붙잡히지 않을 만큼 매끄러웠다.

마지막으로 오른 팔뚝 위에 연발 쇠뇌까지 꽉 조여 장착한 이안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전신의 감각을 예리하게 일깨우는 듯한 무게감에 차근히 숨을 고른 것도 잠시.

“…….”

머리를 쓸어넘긴 이안이 몸을 돌렸다. 문을 여는 손길에 망설임이 없었다. 하늘하늘 내리던 눈송이가 바람을 타고 그에게로 밀려들었다. 이상하게도 공기가 차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드디어 나오셨군.”

문 앞에는 미구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른손에 말 고삐를 쥔 그의 미소는 평소보다 묘하게 경직된 상태였다.

당연했다. 이안은 그를 부군단장으로 임명했으니까. 사제단의 유일한 북부인이 그라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상징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이름만 바꾼 길잡이였다. 군단의 행군 경로를 인도하는 게, 사실상 미구엘의 역할의 전부였다.

“모든 준비가 끝났소. 군단장.”

고개를 끄덕인 이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미구엘의 뒤로 향했다.

미구엘의 말 옆에, 미끈한 백마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은색 마갑을 고스란히 드러낸 닐라였다.

화로의 축복을 받은 말들은, 굳이 무거운 방한 장구를 착용할 필요가 없었다.

다각- 다각-

이안의 시선을 받은 닐라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제대로 쉰 듯 눈빛과 움직임에 활력이 넘쳤다.

살도 조금 붙은 상태였다. 행군이 끝날 때쯤엔 근육의 결이 다 드러나게 되겠지만.

‘마석도 전부 새 거고.’

닐라는 어째서인지 말머리를 광장 반대편으로 돌린 채 멈춰 섰다.

이안은 별말 없이 훌쩍 안장 위로 올라섰다. 동시에 마갑 곳곳에 박힌 마석이 옅은 빛을 머금었다.

마갑에 새겨진 주문은 닐라를 보호하고, 동시에 녀석의 근력과 지구력을 보조했다. 이 녀석이 유독 똑똑한 건 마력에 노출된 시간이 길어서인지도 몰랐다.

“…….”

닐라가 반대로 선 이유가 눈앞에 펼쳐졌다. 정착지 주민들이 모여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선이 이안에게 집중됐다.

‘날 태우고 뽐내고 싶었던 건가.’

생각하는 사이, 닐라가 걸음을 옮겼다. 크게 원을 그리듯 주민들 앞을 지나치려는 게 분명했다.

이안은 맨 앞줄에 선 파엘과 조이스. 그리고 당장이라도 합류하고 싶은 두 북부인 경호병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들이 북부식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주민들이 파도치듯 고개를 숙였다.

그들을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정착지를 떠나려거든, 갤 마로로 가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다들 고개를 조금 더 깊이 숙였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주위가 유독 조용했다.

왜 그런지는 굳이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다각- 다각-

닐라가 방향을 완전히 틀었다.

미구엘이 안장에 앉아 기다리는 가운데, 이안은 비로소 저만치의 광장을 눈에 담았다.

“…….”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누군가가 높게 치켜든 깃발이었다.

광장을 중심으로 번지는 은은한 바람에 깃대에 달린 커다란 깃발이 물결치듯 나부끼고 있었다.

이안은 흰 깃발 정중앙. 노란색 육각 테두리와 검날을 아래로 한 붉은 검의 문양을 눈에 담았다.

‘…대체 저건 또 언제 준비했대.’

닐라가 광장으로 다가가는 가운데,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갔다.

육각형은 백금룡. 그리고 붉은 검은 카르하를 뜻했다. 결국 백금룡의 대행자이자 북부의 대전사가 군단을 이끌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안과는 일언반구의 상의도 없이 만들어진 군단기였다.

물론, 상의했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을 터였다. 호프 시의 이름을 정할때 그랬듯, 거절해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게 분명했으니까.

‘죽으러 가잔 명령은 잘도 따르면서….’

입맛을 다신 이안의 시선이 깃발 아래로 내려왔다. 광장 가장자리를 따라 길게 도열 한 군단의 모습이 비로소 눈앞에 펼쳐졌다.

다각- 다각-

가장 후미에 선 건 기병들이었다.

이렇게 보니 오십 기 가까이 되어 보였다. 물론 수성전이 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사실 기병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말들은 어디까지나 행군용이었다. 가는 길에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그날 밤 군단의 식사가 될 터였다.

이안은 고삐를 쥔 그들의 허리춤을 슬쩍 일별했다. 다들 같은 검을 차고 있었다. 불씨의 장검.

백인장들과 함께 이들이 군단의 최고 정예병들이라는 의미였다.

말에 타서 편하게 이동하는 만큼, 전장에서는 가장 위험한 선봉에서 앞장서 싸우게 될 터였다.

그리고 그들 모두,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게 분명했다.

“따르겠습니다. 대전사.”

“…대전사.”

이안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굳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의 곁을 지나쳤다.

중무장한 군단병들이 이어졌다.

대부분 사슬과 판금으로 이루어진 방어구를 걸치고, 손에는 기다란 도끼 창이나 장창, 양손 도끼를 움켜쥔 채였다. 복장이 유독 다양한 건 용병 출신들의 백인대였다. 물론 중무장하고 있다는 부분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었다.

“…대장.”

이안의 시선을 받은 트루드가 속삭이듯 읊조리며 고개를 숙였다.

각 백인대 앞에는 말에 탄 백인장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섬뜩할 정도로 결의에 찬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차라리 가기 싫어하면 덜 미안할 텐데.’

내심 쓴웃음을 흘리면서도, 이안은 그들 모두와 눈을 마주치며 옆을 지나쳤다.

이어진 건 두 대의 커다란 짐 마차였다. 둘 다 트라벨가에서 가져온 군용 마차였다. 가는 동안 먹을 건조 식량과 루 엔테르의 축복을 받지 못한 이들의 무기를 운반하는 용도였다.

다각- 다각-

그리고 그 앞에는 화로가 실린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나무가 아니라 금속으로 만든 이두 마차였다. 팔로 감싸 안을 수 있을 정도의 소형 화로와 잘 다듬어진 장작더미가 실린 채였다.

솨아아-

화로에서는 주황색 성화가 일렁였다. 내리는 눈도 성화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광장에 번지는 은은한 바람의 근원지이기도 했다.

“…….”

화로 옆에 선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을 바라보는 눈빛이 평소보다 결연했다.

이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석에는 칸토가. 나머지 세 전투 사제들은 말에 탄 채 마차 앞쪽에 서 있었다.

다그닥-

닐라가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몸을 옆으로 반쯤 돌며 멈춰 섰다.

광장 가장자리를 따라 늘어선 군단 행렬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눈앞으로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새로운 군단 퀘스트가 완료된 것이다.

뒤이어 또 다른 연계 퀘스트가 이어졌다. 전선으로. 이번에도 직관적인 이름이었다.

“예상했겠지만 급속 행군이다. 휴식은 최소화하고, 식사도 이동하면서 할 거다.”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고 창을 닫으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낙오자는 용납하지 않겠다. 잘들 따라와라.”

“--!”

일제히 창대로 땅을 찍은 군단병들이, 짐승의 포효 같은 짧은 함성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모집하고 집결시켜 무장을 갖추게 했을 뿐이건만. 그것만으로도 어느새 어엿한 군단이 완성된 것이다.

‘언제나 내 목숨이 최우선 순위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이들도 최대한 많이 살려 돌아오리라는, 뿌듯함과는 거리가 먼 다짐을 곱씹게 하기에는 충분한 광경이기도 했다.

이안이 고삐를 흔들었다.

닐라가 기다렸다는 듯 말머리를 돌려 활짝 열린 동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사이.

“출진!”

어느새 바로 뒤로 따라붙은 미구엘이 목청 높여 소리쳤다.

“출진!”

“출진!”

대답하듯 외치며, 용살자의 군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부끼는 군단기를 높이 치켜든 채였다.

***

관도를 따라 동남쪽으로 이틀을 나아간 군단은, 이윽고 정동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멈추지 않고 내리는 눈도 행군에 장애가 되지 못했다.

대다수가 북부인이어서이기도 했지만, 이동식 화로에 일렁이는 성화의 영향력 덕분이기도 했다.

“내면의 어둠을 불사르고 세상을 밝히는….”

화로 마차에 탄 루시는 하루에 세 번씩 기도 의식을 치렀다. 양손에 장작을 움켜쥔 채였다.

기도가 끝날 때쯤엔 장작 표면에 흐릿한 성화가 맺혔고, 그녀는 그것을 화로 안에 던져 넣었다.

화로의 성화가 출발할 때보다 더 밝게 타오르는 건 그 덕분이었다.

솨아아….

성화의 온기는 군단을 완전히 감쌌다. 이안을 비롯해 이미 화로의 축복을 받은 이들은, 내면에 자리한 불씨가 식지 않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축복을 받지 못한 이들도 비슷한 효과를 누리고 있었다.

앞길을 어느 정도 비춰 주는 역할까지 해서, 부자연스러운 어둠에 휩싸인 장소들을 피할 수 있게도 해 줬다.

물론, 그렇다 해도 군단은 관도를 절대 벗어나지 않았다. 곳곳에 붉은 벼락이 만들어낸 흉지가 도사리고 있었다. 실수라도 발을 들이지 않도록, 이안은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

“아니…?”

묵묵히 이동하던 군단병들 사이에 파란이 번진 건,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나서였다.

본래도 그리 밝다고는 할 수 없는 날씨였지만. 한순간에 갑자기 밤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카르하여….”

“이런 미친… 시벌….”

하늘을 올려다본 군단병들이 출신을 막론하고 경악성을 흘렸다.

하늘을 뒤덮은 어둠은 구름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마물의 체액처럼 끈적한 질감으로 일렁이며, 금방이라도 땅으로 쏟아져 내릴 것처럼 꿈틀댔다.

어둠이 드리우기 직전까지만 해도 전혀 보이지 않던 광경이었다.

“검은 벽이… 어느새 이렇게나….”

그건 이 어둠이 검은 벽이 만들어 낸 현상이라는 의미였다.

군단은 검은 벽을 인식할 수 있는 거리까지 접어든 것이다.

탄식하며 하늘을 응시하던 사제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왔다.

어둠은 저 멀리 어딘가에서 땅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검은 벽.

거리를 가늠하는 건 불가능했다. 정확히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부터가 벽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걸쭉한 어둠은 그저 땅에서 하늘로. 순리를 역행하듯 꿈틀대며 번지고 있을 뿐이었다.

“찬란한 빛이여… 타오르는 열정이여… 부디 우리에게 힘을 주소서.”

이 순간 모두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아니, 이미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게 말이 되나… 시부럴….”

압도된 듯 입을 벌리고 있던 미구엘이 멍하니 뇌까렸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이안 쪽으로 돌아왔다. 살짝 뒤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안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안이 평소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상태라는 건, 뒷모습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마른침을 삼킨 미구엘이 물었다.

“검은 벽이 이런 상태인걸, 알고 계셨소?”

“아니. 전혀.”

이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심드렁한 목소리였다.

“그럼 혹시 침식이….”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멍하니 읊조리던 미구엘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안이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침식이, 뭐?”

“…아니오. 입 밖으로 꺼내면 재수 옴 붙을 것 같아서 말이오.”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린 이안이, 오히려 더 밝게 느껴지는 성화를 일별하고는 고삐를 흔들었다.

닐라의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하늘을 뒤덮은 어둠이, 그들을 환영하듯 꿈틀댔다.

***

“비탄의 계곡에 접어든 것 같소.”

미구엘이 불쑥 말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이래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밤낮의 구별이 사라지면서 시간 감각이 빠르게 무뎌졌기 때문이다.

모닥불을 피우지도 않은 채 몇 시간 정도 야영했었으니, 하루쯤 더 지났으리라 유추할 뿐이었다.

“비탄의 계곡?”

두건을 눌러쓴 이안이 되물었다.

“과거 마족과의 전쟁에서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입니다.”

대답은 뒤편에서 돌아왔다.

“북부와 제국 모두로 통하는 교두보로, 결국 마족들을 밀어내고 계곡 한복판에 장벽을 세웠죠. 그곳이 바로 카링기온입니다.”

칸토였다. 그는 오늘 도널드에게 마부석을 양보하고 말에 탄 채 뒤따르고 있었다.

“군단장은 그런 걸 궁금해하시는 게 아니오. 하여간…. 물러나 계시오.”

혀를 찬 미구엘이 뒤를 향해 손짓했다. 칸토가 어리둥절하게 미간을 좁히는 와중에도 선선히 물러났다. 한 번 더 짧게 혀를 찬 미구엘이 덧붙였다.

“짧으면 반나절. 늦어도 한나절 안에는 카링기온에 도착할 거요.”

“…역시 구관이 명관이네.”

미구엘이 그건 또 무슨 말이랴는 듯 바라보았지만,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더 짙은 음영이 진 능선이 좌우에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반쯤 어둠에 삼켜져 별빛처럼 일렁이는 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아마 카링기온에서 번지는 빛이리라.

‘지대가 조금 높네.’

그 너머가 온통 새카만 건, 검은 벽이 있기 때문이리라.

아마 많은 이들이 땅만 보며 걷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일 터였다.

검은 벽을 응시하고 있으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형용할 수 없는 원초적인 공포가 고개를 드는 것이다.

물론, 이안에게는 그다지 문제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저긴 마물들도 못 올라갈 것 같은 곳인데. 정말 지을 수만 있으면 장벽을 죄다 이어 붙인 거군.’

그는 좌우의 깎아지른 능선을 따라 장난감처럼 이어진 장벽을 훑어보고 있었다.

거의 만리장성이나 다름없었다.

하긴. 저렇게 지어만 두더라도, 일정 수준 이하의 마물들의 통과를 억제하는 효과는 있을 터였다.

“……!?”

그때, 이안이 불현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이 확 밝아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빛은 삽시에 붉은색으로 변해 잦아들었다. 완전히 잦아들지 않고, 하늘을 뒤덮은 어둠 사이에 뒤섞여 일렁였다.

“이런 미친, 염병할… 깜짝이야.”

그리고 그건 저 먼 검은 벽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이 온통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핏방울처럼 느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한 미구엘이 이윽고 덧붙였다.

“…가까이서 보니까 느낌이 또 완전히 다르구만. 안 그래도 발작할 때가 지나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차라리 다행이오. 안 그렇소?”

“…작이 아니야.”

이안의 읊조림에, 미구엘의 고개가 그에게로 돌아갔다.

“뭐라고 하셨소?”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한 미구엘이 이안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미구엘의 눈이 순간 찢어질 듯 커졌다.

“히익…?”

하늘을 응시하는 이안의 눈동자가 온통 검붉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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