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망캐가 되었다-368화 (368/412)

#368화

하마터면 영혼에 기생충을 키울뻔한 것이다. 이안의 뇌리로 꿈속의 그놈이 절로 스쳐 지나갔다.

‘도와주는 것처럼 지껄이더니….’

물론 그놈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선택지도 그에게 있지 않았던가. 함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손가락을 집어든 건, 다름 아닌 이안 자신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영혼을 건드리려 하다니.

아무리 살갑게 굴어도 놈의 본질은 고대신이며,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하지만 불가능하더군.

그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속삭임이 이어졌다.

-네 영혼에는 파고 들어갈 수가 없었어. 뭔가가 막고 있더군. 그저 거기에 달라붙는 게 고작이었지. 네가 품고 있는 그 혼돈의 씨앗처럼.

놈을 막아준 건 아마도 상태창이리라. 이미 몇 번이나 비슷한 상황을 겪지 않았던가.

신적인 존재들의 침범이나 혼돈의 오염을 절대적으로 막아주는 무언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는 없었다.

충격으로 내부가 곤죽이 되는 것까지 막아주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나는 그렇게는 살아남을 수 없어. 나를 담을 그릇이 필요했지. 게다가, 네가 품은 혼돈이 날 잡아먹으려 들더군.

변명처럼 이어지는 속삭임을 한귀로 흘리며, 이안은 정보창을 열었다.

이놈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볼 가장 간편하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자아를 잃을 수는 없지 않겠어? 그러니 다른 선택지가 없었지. 이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진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정보창의 상태가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다. 뜻을 알 수 없는 문양과 기호들이 글자 사이에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모드 충돌 오류…?’

현실이 된 이후로는 한 번도 겪은 적 없었지만, 게임에서는 가끔 일어나던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에러 메시지와 함께 게임이 다시 시작됐었다.

-네게 허락을 구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는 얘기야, 친구.

현실이 된 지금도 그렇지는 않았다. 문양과 기호들이 마구 뒤섞이다 멋대로 창이 꺼지더니, 곧이어 다시 깜빡이며 떠올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정보창은,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기만하는 조력자….’

이안이 늪지의 원한의 이름 앞에 새롭게 추가된 글자들을 눈에 담는 사이, 다시 느긋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게다가 이 망령은 죽은 게 아니야. 여전히 존재하고 있어. 그저, 나와 하나로 이어졌을 뿐이지. 일종의 공생 관계랄까.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능력치 추가 옵션은 그대로였다.

대신 아래로 새로은 스킬이 추가되어 있었다.

조력자의 속삭임.

추가적인 정보를 확인할 수도, 이안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도 없는 스킬이었다.

심지어 그 아래로, 물음표로 표기된 스킬이 두 개나 더 있었다.

퀘스트라면 몰라도 아이템 옵션에 물음표라니.

‘모드로 추가된 아이템이라 그런 건가…?’

이안의 뇌리로 과거의 기억들이 뒤엉켰다. 모드는 DLC와 달리, 유저들이 데이터를 임의로 커스텀해 만들어낸 비공식 콘텐츠였다.

그리고 그가 다운로드 받은 게임은, DLC와 모든 모드가 포함된 풀 패키지였다.

다만 확실하게 구별이 가능하던 DLC와 달리, 모드는 어떤 부분에 적용되어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게임의 원본을 플레이해 본 적도 없지 않던가.

공략 글에도 모드와 관련된 부분들은 언급이 많지 않았었다.

외형 변경을 비롯한 몇 가지 필수 모드는 깔아두는 게 좋다는 것 정도가, 당장 떠오르는 문장의 전부였다.

‘…대체 어떤 모드들이 적용되어 있었던 거지?’

이안이 그다지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던 의문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는 사이.

-그래… 화만 난 게 아니군. 뭘 그렇게 궁금해하는 거지, 친구? 생각만 하지 말고 털어놔 주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말이야.

부드러운 속삭임이 뇌리를 간지럽혔다.

말투와 달리, 어느새 이안의 손가락에서 슬며시 몸을 풀어버린 채였다.

여차하면 도망가려는 것처럼.

멀리 가지는 못하겠지만, 이안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숨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필요 없어.”

이안이 비로소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확인은 대충 다 끝났으니까.”

-내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있었나 보군.

“아니. 네가 아직도 내 사역마이자 소유물인지를 확인했지.”

이안이 손가락 위를 기어가는 놈을 눈으로 좇으며 대답했다.

-의미심장한 말이군….

뱀이 혀를 날름댔다. 그 와중에도 멈추지 않고 손가락을 지나, 손등까지 기어가는 중이었다.

-내 조언이 도움이 됐다는 걸 잊지 말라고, 친구.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내가 너를 도울 일이 있을 거야.

하지만 녀석의 움직임은 빠른 속도로 느려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족쇄가 몸을 옭아매고 있는 것처럼.

“글쎄. 네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 족쇄는 이안의 시선과 의지, 그 자체였다. 본래 늪지의 원한이 그랬듯, 지금 이놈도 여전히 그의 통제하에 있었다.

“네가 어떤 놈에게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인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아하… 그래. 내가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았군.

어느새 완전히 멈춰 선 부스러기가, 머리만 간신히 움직여 이안을 올려다 보았다.

-내 본신은 내게, 네가 살아남도록 도우라는 절대적인 명제를 남겼지. 그게 내가 태어난 목적이기도 해. 게다가 나는 이제, 이 그릇에서 벗어날 수도 없게 됐다고. 그러니까….

다가오는 이안의 왼손 손가락을 바라보며, 녀석이 덧붙였다.

-…남은 오해가 있다면, 차근히 대화로 풀어가는 게 어때?

이안의 손가락에 맥없이 붙잡힌 검은 뱀이 축 늘어진 채로 딸려 올라왔다.

녀석을 얼굴 앞까지 들어 올리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럼 하나 묻지.”

-얼마든지, 친구.

“아까 그 마수가 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냄새… 아니, 맛이라고 해야겠군.

손가락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놈이 가늘고 긴 보랏빛 혀를 날름댔다.

-내 그릇은 이쪽 감각이 특히 뛰어나거든. 눈도 아주 좋고. 물론 둘 다 정교하진 못하지만, 아까 그놈처럼 선명한 맛은 놓치지 않아.

이 새끼, 진짜 뱀이었구만.

내심 코웃음을 흘린 이안이 말했다.

“그럼 다시 한번 느껴 봐. 근처에, 다가오는 다른 놈들이 있나?”

-글쎄….

몇 차례 혀를 허공에 날름댄 부스러기가, 이윽고 속삭였다.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 눈먼 놈은, 이미 많이 멀어졌군. 맛이 아주 연해.

대답이라도 하듯, 흐릿한 괴성이 메아리쳤다.

이안의 눈매가 설핏 휘어졌다.

“그래, 거짓말 같진 않네.”

-물론이지. 우리 사이의 오해가 또 하나 풀렸군. 친구.

“푸는 김에 하나 더 풀지.”

-어떤?

“난 네 친구가 아니야.”

동시에 이안이 손을 털듯 아공간에 넣었다. 딸려간 뱀이 그대로 그 속으로 사라졌다.

-이건 대체… 잠깐만, 이봐 친-

손가락을 놔 버린 이안이 아공간을 닫은 순간, 뇌리로 번지던 속삭임이 칼로 자른 듯 끊어졌다.

…이제야 조용하네.

이안이 짧게 콧방귀를 뀔 찰나.

“그 사역마에… 무슨 일이 생긴 건데요?”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루시아가 비로소 속삭였다. 어리둥절한 와중에도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녀석에게는 부스러기의 속삭임이 들리지 않았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별 거 아니야.”

태연하게 어깨를 까딱인 이안이, 계곡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웬 고대신의 부스러기가 내 사역마에 깃들었을 뿐이지.”

“네…?”

물론 루시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게 대체… 설마, 우리가 싸운 그 화신체의 파편인가요?”

“아니. 다른 놈. 이름도 모르는.”

대충 대답하며, 이안은 텅 빈 계곡을 눈으로 훑었다. 낮게 뒤덮여 있던 안개는 이미 완전히 흩어진 뒤였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몇 번째인지 모를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시아를 다시 돌아본 이안이, 바깥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지금은 다른 은신처를 찾는 게 우선인 것 같으니까. 여긴 너무 좁잖아. 깔려 죽기에도 딱 좋고.”

“…….”

“못 걷겠으면 말해. 안고 갈 테니까.”

덧붙인 이안이 그대로 밖으로 기어나갔다. 눈만 깜빡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시아도, 이윽고 짧은 탄식을 흘리고는 그 뒤를 따랐다.

***

이안과 루시아는 계곡 가장자리를 따라 나아갔다. 대화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둘 다 신경을 곤두세운 채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이안은 절벽의 쩍 갈라진 틈을 발견했다.

성인 둘 셋은 충분히 들어갈 너비. 지축이 기울어지며 만들어진 듯한 뾰족한 형태의 균열이었다.

조금씩 좁아지며 이어진 내부에는 다행히도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둠 속을 앞장서 걸음을 옮기던 이안은, 적당히 평평한 공간이 나오자 비로소 멈춰 섰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다리를 뻗고 잘 수는 있을 만한 공간이었다.

“여기서 쉬자.”

“…네.”

벽면에 손을 딛고 더듬더듬 걸음을 옮기던 루시아가 대답했다.

주위의 윤곽 정도는 구별할 수 있는 이안과 달리, 녀석에게는 너무 어두운 모양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아공간에서 꺼낸 금속 상자를 옆에 내려놓으며 이안이 말했다.

그 잠깐 사이에 뇌리를 파고든 속삭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였다.

철컥-

상자가 금속음과 함께 열렸다.

육각 연맹의 파엘에게 받아 온, 이제는 봉인함을 대신하는 가장 큰 보관 상자였다. 안에는 담요와 털옷, 털장화나 늑대 가죽 망토 같은 여분의 생필품과 간단한 보조 장비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식량도 있었다.

가죽 수통 두 개 분량의 물과 천으로 감싼 몇 가지 종류의 육포. 결정적으로 술도 세 병이나 있었다. 북부의 독주였다.

모포를 꺼내 바닥에 깐 이안이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그가 녀석을 안아 들며 속삭였다.

“불은 못 피울 것 같다.”

“괜찮아요. 견딜 만해요.”

담담하게 대답하는 녀석을 모포 위에 내려놓은 이안은, 그대로 상자에서 수통과 육포를 꺼냈다.

“일단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먹어. 어차피 생각할 시간은 차고 넘치니까.”

“…네.”

대답하며 수통을 열어 살짝 입술을 축인 루시아가 앞으로 내밀었다. 아직도 전혀 보이지 않는지, 전혀 엉뚱한 방향이었다.

“난 이거면 돼.”

낮게 읊조린 이안이, 방금 꺼낸 술병을 찰랑대는 소리가 나게 흔들었다. 그제야 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본 루시아가, 조금은 머쓱한 미소를 짓고는 수통을 입으로 가져갔다.

꼴깍꼴깍 물 삼키는 소리가 이어졌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목이 많이 탔을 터였다.

녀석이 손에 쥔 육포를 입에 넣는 것까지 확인한 이안이, 비로소 손에 들고 있던 요정의 궐련을 입에 물었다.

이게 그의 식사이자 안주였다.

화륵-

약초 냄새. 머릿속이 조금 맑아지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미뤄뒀던 온갖 생각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루시아에게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사실 그건 이안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궐련의 연기를 내뱉으며 술병을 든 그는, 루시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술병을 흔들어 보인 그가 내뱉었다.

“마음은 알지만, 둘 다 안돼. 미련 가지지 말고, 먹던 육포나 마저 먹어.”

“지금쯤, 우리가 사라진 걸 다들 알게 됐겠죠.”

루시아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녀석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이안이 입맛을 다셨다.

“차라리 그냥 한 모금 줄 걸 그랬나….”

어쨌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군단의 수색이 끝나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났으니까. 그리고 자신들의 대전사와 화로의 차기 성녀가 침식 중인 검은 벽에 삼켜졌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을 터였다.

그놈들이라면 대전사를 찾겠다며 검은 벽으로 몸을 던지고도 남았다. 물론, 그런다고 당장 벽을 넘을 수는 없을 터였다.

침식을 끝낸 검은 벽은 한동안 깊은 침묵에 잠길 테니까. 다시 안정을 되찾기 전까진, 그 무엇도 벽을 넘을 수 없었다.

물론, 그것도 희소식은 아니었다.

“다들 이성을 잃을 거예요. 군단도. 미구엘과 원장님도. 다른 사제님들도. 소식을 듣게 된다면 언니도… 어쩌면, 우리를 아는 모두가요.”

그들의 소식이 더 빨리 알려질 테고, 더 많은 이들이 그들을 찾기 위해 벽을 넘을 준비를 시작할 테니까.

아마 사상 최대 규모의 순교 원정대가 꾸려질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건, 전혀 이안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벽을 넘어온 이들과 무사히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마경은 지나치게 넓고, 또 위험했다.

아마 대부분은 이안과 만나기도 전에 목숨을 잃게 될 터였다. 게임에서 그와 함께 벽을 넘었던 순교 원정대가 그랬듯이.

“저는 아니라도, 이안 님은 살아 계실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거예요. 어쩌면 모두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요.”

이안을 바라보는 루시아의 눈에, 궐련의 불빛이 반사되어 위태롭게 아른거렸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이안이, 이내 애써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전 황태자처럼?”

“…네. 그분처럼요.”

대충 넘어갈 수는 없겠구만.

웃음기 없이 대답하는 루시아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쉰 이안이,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사이, 루시아도 이안이 내린 것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많은 이들이 이쪽으로 넘어오게 될 거예요. 몇 년 뒤에 벽이 다시 안정을 되찾으면 바로요. 하지만 그때쯤엔 어쩌면-”

“…잠깐만.”

술병을 확 내려놓은 이안이 말을 잘랐다. 멈칫한 루시아의 눈을 마주 보며, 그가 덧붙였다.

“다시 말해 봐. 검은 벽이 안정을 되찾는 게, 몇 년 뒤라고?”

몇 개월이 아니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