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버프로 무림정복-1화 (1/115)

프롤로그

적이 내게 말했다.

“네놈은 본좌보다 약하다. 그러니 순순히 포기하고 본좌의 가랑이 밑을 기어라. 그러면 특별히 단전을 폐하는 것으로 봐 주마.”

그리고 1분 후.

“크윽! 이, 이게 무슨 사술이냐! 끄어어어어어억!”

조금 전까지 내 앞에서 강함을 과시하던 적은, 만신창이가 되어 내 발밑에 빌빌 기었다.

잠깐.

이 자식 이름이 뭐였더라?

뭐, 아무렴 어때.

이런 잡몹 이름 따위 알 게 뭐람.

근데, 무림 서버도 별거 없네.

이런 허접 NPC가 흑도십대고수인 거 보면.

참고로 흑도십대고수가 뭐냐면….

“왜… 어찌하여.”

“너 때문에 까먹었잖아!”

“크아아아악!”

열 받아서 놈에게 <분근착골>이란 고문 기술을 선물해 줬다.

허접 주제에 어디서 말을 끊고 있어?

“보, 본좌가. 네놈에게 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도대체 무슨 사술을 쓴 것이냐? 본좌가 네놈보다 강하거늘!”

“어쩌라고?”

“약육… 강식.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세상 이치가 아니더냐. 흑도십대고수인 본좌가 네놈보다 강하다는 건 삼척동자도 알 만한 사실이거늘.”

“응~ 약해지게 만들면 그만이야~”

“……!”

“나보다 약해지게 만들면, 내가 이기는 거 아냐?”

“그, 그런!”

후후.

표정을 보니까, 너도 똑같네.

틀에 박혔어.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인간은 발전할 수 없다.

강한 놈이 무조건 이긴다고 누가 그래?

약한 놈이 이길 때도 있는 거지.

이기기 위해서 꼭 적보다 강해질 필요는 없다.

나보다 약해지게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약해지게 만들어서, 한 방에 패 죽이는 거다.

참고로, 꼭 한 방이어야 된다.

두 방은 안 된다.

꼭.

왜냐고?

두 방은 간지가 안 나잖아, 간지가.

난 디버프 마스터.

판타지 서버는 진작 정복했고.

지금은 무림 서버 정복 중.

제1화.

전직 프로게이머인 나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모든 걸 이뤘다.

나는 가상현실게임 <브레이브 뉴 월드>에서 GOAT의 자리에 오른 세계적인 슈퍼스타다.

GOAT가 뭐냐고?

염소 아니고.

The Greatest Of All Time.

한 분야에서 역사상 최고로 꼽힐 업적을 이룬 자들만이 거머쥘 수 있는 수식어.

나는 공식전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해 본 적이 없었다.

프로게임 업계 역사상 유례없는 커리어를 일군 거다.

그만큼 돈도 많이 벌었다.

돈 굴리기도 잘 굴려서, 부동산 투자에 크게 성공해 조 단위의 자산을 일구기도 했다.

젊은 나이에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거다.

결혼도 잘했다.

그 누구보다 예쁘고, 사랑스럽고, 현명하고, 나를 잘 이해해 주는 아내를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 나가는 중이다.

나도 안다.

이게 자랑같이 들린다는 거.

하지만 완벽해 보이는 삶에도 나름의 결핍은 있는 거다.

만약 누군가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은 없다.

왜냐고?

심심하니까.

살아 있다는 느낌이 안 든다.

슬슬 매사에 의욕이 떨어지고 있었다.

무기력하고, 때론 우울하다.

그립다.

그 시절이.

게임에 내 모든 걸 걸었던 그때가.

가상현실세계 속에서, 동료들과 함께 모험하며 울고 웃던 추억이.

게이머 은퇴 3년 차.

다시 게임이 하고 싶다.

* * *

콰앙!

봉 무게까지 합쳐 240킬로그램에 달하는 바벨이 바닥에 떨어졌다.

“후우.”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트레이너를 돌아보았다.

“10킬로 추가할 테니까 보조 좀 해 주세요.”

“어우야.”

트레이너가 혀를 내둘렀다.

“요즘 장난 아닌데요? 회원님? 이대로라면 3대 600도 거뜬하겠는데요?”

“아직 멀었죠. 스쿼트 중량이 생각보다 잘 안 올라서.”

“이대로만 훈련하면 금방이겠는데요?”

“에이.”

피식 웃으며 텀블러에 든 물을 한 모금 들이켤 때였다.

“저어… 한태성 선수 맞으시죠?”

아까부터 힐끔힐끔 내 근처를 서성거리던 남성 회원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아, 예. 맞습니다.”

“오오! 태성 선수! 저 팬입니다!”

“감사합니다.”

“호, 혹시 괜찮으시다면….”

“당연히 해 드려야죠. 사진도 찍어 드릴게요.”

주머니―늘 가지고 다닌다―에서 유성매직을 꺼내 그의 운동복에 사인을 해 줬다.

찰칵! 같이 사진도 찍어줬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광이에요!”

“별말씀을요. 제가 감사하죠.”

“아, 그런데 혹시….”

“네?”

“복귀는 안 하세요?”

“아직은… 생각 없네요. 하하하.”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아쉽네요. 저 정말 팬이거든요. 태성 선수 다시 활약하는 모습 꼭 보고 싶어서요. 지튜브에 게임 플레이 영상이라도 올려 주시지.”

“이미 은퇴한 사람인데요, 뭘.”

“너무 아쉬워서 그러죠.”

“좋은 날이 오겠죠.”

“아무튼, 정말 감사합니다! 복귀 기다릴게요!”

“네, 응원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득근하세요.”

운동이 끝난 후 샤워를 하는데, 팬이 했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복귀는 안 하세요?’

복귀?

나도 하고 싶다.

근데 할 게 있어야 복귀를 하지.

너무 강해도 노잼인 법.

요즘 나오는 최종보스도 평타 한 방이면 뒈져 버리는데 무슨 재미로 복귀를 해?

* * *

가상현실게임 브레이브 뉴 월드―이하 BNW―는 지난 10년 동안 전 세계를 강타한 전대미문의 히트작이다.

드넓은 월드맵.

인간과 똑같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NPC들.

그리고 시각·촉각·미각·청각·후각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감각 효과까지.

BNW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게임이었다.

때문에, BNW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 세계인이 즐기는 게임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는 실생활의 일부마저 되어 버린 느낌이랄까?

나는 그 BNW의 전설이다.

게임을 처음부터 잘한 건 아니었다.

나 역시 별 볼 일 없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999레벨의 히든 NPC를 사부로 모시게 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디버프 마스터.

디버프를 걸어 적을 약하게 만든 뒤 쳐부수는 물리공격형 폭딜러.

나는 디버프 마스터가 된 후 빠르게 성장했고, 프로게이머로 데뷔해 전성기를 누렸다.

게다가 게임의 메인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되는 영광을 누리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위기가 찾아왔다.

창조주(!)가 최종보스로 등장해 게임 속 세계를 파괴하려 한 것이다.

그건 정말 큰 위기였다.

BNW는 개발사이자 유통사인 <하이브 게임즈>에서조차 개입하지 못하도록 설계된 게임.

게임 자체가 AI 알고리즘에 의해 돌아가기에 <하이브 게임즈>조차 창조주가 게임 속 세계를 파괴하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만약 창조주를 막지 못한다면?

세계가 멸망하면서, 게임은 그대로 서비스 종료.

모든 플레이어의 캐릭터와 NPC들이 삭제되고, 게임의 주무대가 되는 세계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AI 알고리즘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낼 때까지, 몇 년이고 게임 서버가 닫히는 거다.

나는 그런 위기에 맞서 창조주와 맞서 싸웠고, 결국에는 게임의 서비스 종료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그다음.

창조주를 쳐부수고 나니 더 이상 즐길 컨텐츠가 없었다.

그 어떤 적이든 평타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데, 어떻게 게임을 즐기겠는가?

퀘스트도 끊기고.

새로 맞출 템도 없고.

캐릭터 스펙이 너무 높아지다 보니 무슨 템을 착용한다 한들 티도 안 나서, 창조주 사냥에 성공한 뒤로는 그냥 벗고 다녔다.

맨몸에 <찢어진 면 팬티> 한 장 걸치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는 주 컨텐츠였으면 말 다 했지.

너무 강해서.

그게 내 은퇴 이유였다.

* * *

‘그래,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이 세상에 게임이 BNW 하나뿐이냐!’

다른 게임에 손을 대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노잼, 노잼, 노잼.’

하지만 어떤 게임도 BNW처럼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 주지는 못했다.

은퇴한 지 2년 11개월.

난 하루하루 메말라가는 중이다.

- 아! 승구 선수! 신들린 골렘 컨트롤! 일인군단입니다! 일인군단!

무심코 튼 게임채널.

현역 프로게이머로 활동하고 있는 친한 동생 녀석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받으며 아래 맹활약하고 있었다.

승구야.

난 니가 부러워.

‘도대체 왜 부캐 생성이 안 되는 거야?’

몰래 다른 서버에 부캐를 파서 소소하게나마 게임을 즐겨 보려고 해 본 적도 있었다.

본래 게임 BNW는 1111법칙을 고수한다.

1개의 명의.

1개의 계정.

3개 서버 중 1개의 서버.

오직 1개의 캐릭터.

즉, 부캐를 키우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내 계정은 슈퍼계정.

다른 서버에도 캐릭터 생성이 가능하다고 했다, 했는데…….

[알림: 신규 캐릭터 생성이 불가능합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슈퍼계정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서버에 캐릭터 생성이 불가능했다.

게임사에 문의해 봤지만, 자기들도 이유를 모르겠단다.

이런 무능한 놈들 같으니!

맘 같아선 게임사에 소송이라도 걸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하지만 BNW는 게임사조차 개입하지 못하도록 설계된 게임.

고객센터에 문의해 봤자 뭐 하나 바뀌는 게 있을 리가.

내가 아무리 이 게임의 레전드고, 게임사의 대주주 중 하나라 할지라도.

상황이 이러니 다시 BNW를 1레벨부터 즐길 방법은 없었다.

기존 서버의 캐릭터를 삭제하고, 다른 서버에 신규 캐릭터를 생성한다면 몰라도.

하지만 난 절대 그러지 못한다.

로그인하면 이렇게 날 반겨 주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뀨! 주인놈아! 왔냐! 뀨우!”

녀석 이름은 햄찌.

햄스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정령왕의 아들로 숲의 대정령이다.

나와는 오래오래 함께 한 소중한 친구이자 동료다.

매일 로그인해서 친구―NPC들―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내 유일한 낙이다.

“너 근데 왜 그렇게 피곤해 보이냐?”

“뀨우. 오늘 모찌랑 애들 데리고 놀이공원 다녀왔다. 뀨우. 피곤하다.”

“네가 고생이 많다.”

처음 만났을 땐 총각이었던 녀석도 이제는 어엿한 가장이 되어 있었다.

“뀨우. 요즘 모찌 바가지 너무 심하게 긁는다. 햄찌 털 다 빠질 거 같다. 뀨.”

흠.

확실히 기름기 좔좔 흐르던 털이 푸석푸석해지긴 한 것 같네.

“결혼생활이 다 그렇지 뭐. 니가 좀 참아. 제수씨도 애들 키우느라 힘들잖아.”

황궁 지붕에 올라 야경을 바라보며 녀석의 넋두리를 들어주었다.

게임 속에서 NPC의 결혼생활에 대한 넋두리나 들어주는 게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게 이 게임의 매력이다.

NPC들이 진짜 사람처럼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거 말이다.

“야, 햄찌야.”

야경을 바라보며 햄찌에게 물었다.

내가 이 게임 속에 건설한 대제국 프로아.

그 수도인 프로이센의 야경은 너무나도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옛날 안 그립냐?”

“뀨우! 주인놈아! 그게 뭔 소리냐!”

“아니, 우리 옛날에 재밌었잖아. 막 어? 다 때려 부수고! 사고 치고! 뒤통수도 후려갈기고! 돈도 많이 벌고! 어? 얼마나 재밌었냐 이 말이야!”

“주인놈 이제 슬슬 몸이 근질거리는 거냐? 뀨우?”

“으응?”

“하긴. 주인놈 그간 많이 심심하게 살았다. 뀨우. 근질거릴 만하다. 뀨.”

“딱히 그런 거라기보다는.”

게이머로서 순수하게 게임을 즐기고 성장해 가던 시절이 그리워서 그러지.

다시 게임을 즐기고 싶다.

단 한 번.

딱 한 번만 그때처럼 게임을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것 같은데.

답답한 마음에 사부님을 찾아뵙기로 했다.

999레벨의 히든 NPC인 사부는, 비록 NPC지만 나에게 있어 아버지와 같은 존재다.

그래서 문안 인사도 드릴 겸 조언도 구할 겸 종종 찾아뵙곤 한다.

사부는 늘 그렇듯 황궁 내에 자리한 커다란 호숫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채 무언가를 낚고 있었다.

뭘 낚냐고?

다른 세계의 신적인 존재?

외계인?

솔직히 사부가 뭘 낚을지 나도 모르겠다.

붕어 같은 민물고기가 아니라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하지만.

“왔느냐.”

“예, 사부님.”

“마침 잘 왔느니라.”

“예?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때가 되었다.”

“이제 카렐 녀석을 찾으러 가도 되겠구나.”

어?

“이제 다른 세계로 갈 시간이니라.”

쿵쾅쿵쾅!

멈춰 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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