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카렐 녀석이 다른 세계에서 환생했고, 충분히 성장했다.”
카렐은 내 기사였던 NPC로 참 똘똘하고 선량한 녀석이었다.
내가 법왕 마우그리스라는 빌런을 만나 고전할 당시.
카렐은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구를 구했고, 세계를 구해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지금 수억 명의 게이머들이 BNW의 판타지 서버를 즐길 수 있는 건 나뿐만 아니라 그 녀석의 공도 크다는 거다.
그때 사부는 카렐의 고귀한 희생을 높이 평가했고, 녀석의 영혼에 끈을 매달아 놓았다고 했다.
녀석이 다른 세계에서 환생한다면, 다시 이 세계로 데려올 수 있도록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게 <다른 세계>다.
<다른 세계>란 게임 BNW의 다른 서버들을 뜻했다.
BNW의 서버는 총 3개.
제일 처음 오픈한 서버가 내가 활동하던 <판타지> 서버.
그리고 동양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무림> 서버.
마지막으로 현대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어반> 서버.
어쩌면 아직 공개되지 않은 또 다른 서버가 있을 확률이 매우 컸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다른 서버로 갈 수 있게 됐다는 거다!
1111의 법칙 때문에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슈퍼계정인데도 다른 서버에 캐릭터 생성이 막혀 있는 상황이지 않느냐고?
천만의 말씀!
사부는 가능하다.
사부는 나를 <디버프 마스터>로 만들어 준 999레벨의 히든 NPC.
이 게임의 법칙마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신적인 존재.
나 하나쯤 다른 서버로 보내 주는 건 일도 아니다.
낚싯대로 다른 세계의 신적 존재―예컨대 청룡 같은―를 낚는 양반이 그 정도도 못 하겠어?
“하지만 네 녀석이 다른 세계로 가려거든 육체는 여기 놔두고 가야 할 게다.”
아?
캐릭터가 통째로 이동하는 게 아니란 말씀이시죠?
그렇다면….
‘부캐다! 부캐!’
가슴이 터질 듯 두방망이질을 쳤다.
잠들어 있던 게이머의 본능이 깨어나는 듯했다.
“게다가 이 우주의 법칙이 네 녀석에게 온갖 페널티를 가할 테니, 숱한 사건·사고에 휘말리게 될 게다. 운도 더럽게 안 따라줄 테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게 될 게다.”
예?
부캐를 1레벨부터, 그것도 극악의 난이도로 플레이할 수 있다고요?
오히려 좋아.
사부님 앞만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괴성을 질러 댔을 거다.
“그래도 가겠느냐?”
“예! 사부님!”
엎드려 절해야죠!
‘부캐다, 부캐야! 부캐를 키울 수 있다니! 크흑!’
눈물이 찔끔 나왔다.
카렐을 다시 이 세계로 데려오는 것만 해도 즐거운 일인데, 부캐를 키우며 다시 BNW를 즐길 수 있다니!
복귀다!
드디어 복귀라고!
* * *
그날 밤.
“오빠, 오늘 뭐 좋은 일 있어?”
현역 프로게이머로 활동하고 있는 아내가 물었다.
“응. 있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뭔데에? 요 근래 많이 힘들어 보여서 걱정했단 말야.”
아내는 현역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언제나 내 상태를 섬세하게 살피곤 했다.
서서히 말라 죽어가던 내가 오래간만에 기분이 좋아 보이니까, 아내의 표정 역시 밝다.
참 감사한 일이다.
이런 아내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게.
“사실 나….”
아내에게 다른 서버에서 부캐를 키우게 됐다는 이야기를 해 줬다.
“정말?! 정말로 복귀하는 거야?!”
“응. 정말이야.”
“잘됐어! 정말 잘됐어!”
아내는 내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언젠가부터 오빠가 게이머 생활 그만두고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였거든. 정말 다행이야.”
“티 많이 났어?”
“난 오빠 표정만 봐도 다 알아.”
“미, 미안. 걱정시키려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걱정시켜도 돼. 오빠 걱정하는 게 내 일인데.”
“여보….”
“사랑해.”
“나도 사랑해.”
나 눈과 아내와 눈이 서로 마주쳤다.
번쩍!
스파크가 튀었다.
그 뒤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
3일 후.
햄찌 녀석과 함께 마법진 위에 올랐다.
마법진의 용도는 카렐이 환생한 세계에 내 영혼을 담을 그릇을 찾아 빙의시키는 것.
그럼 기존에 가지고 있던 내 스킬체계가 고스란히 계승된단다.
이곳 판타지 서버에서처럼 다른 서버에서도 <디버프 마스터>라는 내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내가 원할 때면 언제든 판타지 서버로 로그인해서 본캐를 플레이하는 것도 가능하단다.
역시 사부님은 전지전능하시다니까?
“다녀오겠습니다, 사부님.”
“오냐.”
아홉 번 절을 마치자 사부가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준비됐냐?”
“뀨! 준비됐다! 뀨우!”
“그래, 그럼 가자.”
번쩍! 눈부신 섬광이 나와 햄찌를 휘감았다.
내 게임 인생 제2막의 서막이 올랐다.
* * *
[알림: 로딩 중….]
[알림: <무림> 서버에 접속하셨습니다!]
오호?
무림 서버에서 환생했구만?
[알림: 캐릭터를 생성해 주십시오!]
[알림: 이 세계에서, 당신은 다른 세계에서 강림한 <천인>이란 존재로 활동하게 됩니다!]
[알림: 천인으로서 사용할 이름을 입력해 주십시오!]
[입력: ]
<무림> 서버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인>들이 활동한다는 컨셉.
여기서 말하는 <천인>이란 게이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문득 귀찮아져서 <닉네임 랜덤생성> 버튼을 눌렀다.
게이머라면 누구나가 공감하겠지?
닉 만드는 게 어디 보통 일이냐고.
고민하다 보면 튜토리얼보다 시간을 배로 잡아먹는 게 닉네임 짓는 거잖아.
[알림: 시스템이 당신의 이름을 무작위로 추첨합니다.]
[알림: 추첨, 완료!]
[알림: 당신의 이름이 정해졌습니다!]
[알림: 당신의 이름은 <연오랑>입니다!]
[알림: 앞으로 당신은 무림 서버의 배경이 되는 세계에서 <연오랑>이란 이름으로 활동하게 될 것입니다!]
‘괜찮은데?’
연오랑?
이 정도면 만족.
이런 S급 닉네임이 아직도 남아 있었어?
[알림: <무림> 서버에 접속하셨습니다!]
[알림: 로딩 중….]
[알림: 로딩, 완료!]
[알림: <무림> 서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눈앞의 풍경이 바뀌며 알림창이 주르륵 떠올랐다.
[알림: 스킬 체계가 계승되었습니다!]
[알림: 우주의 법칙이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알림: 행운이 300% 하락했습니다!]
[알림: 악운이 300% 증가했습니다!]
[알림: 우주의 법칙에 의해, 당신의 캐릭터 <연오랑>은 매우 나약하고 볼품없는 존재입니다!]
[알림: 행운을 빕니다!]
‘매우 나약하고 볼품이 없다고…?’
뭔가 불길한데?
대명 제국 황궁 외곽
내서당[內書堂]
깊숙한 곳에 자리한 수술실
도움말이 떠올랐다.
[알고 계셨나요?]
내서당[內書堂]이란 환관, 즉 내시를 양성하고 가르치는 교육기관입니다!
동양 세계관이 익숙하지 않은 게이머들을 배려해서, 시스템이 낯선 용어를 쉽고 간략하게 설명해 주는 모양.
친절도 하셔라!
‘내서당? 내시를 양성하고 가르친다고?’
그때.
“어허!”
시퍼런 칼을 든 환관―내시―이 나를 내려다보며 눈을 부라렸다.
“중요한 수술을 앞두고 어찌 입을 연단 말이냐!”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이놈이 양물을 자른다니 아주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모양이로구나! 시끄러우니 얌전히 있도록 해라! 한칼에 끝내 줄 터이니!”
“자, 잠깐만요!”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꽈악!
주변 다른 환관들이 내 팔과 다리를 꽉 붙들고 있는 바람에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알림: 준비하십시오!]
[알림: 곧 거세가 시작됩니다!]
[알림: 거세가 끝나면, 아쉽지만 더 이상 성인콘텐츠를 즐길 수 없게 됩니다!]
[알림: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알림: 거세 후에는 성욕을 자극하는 매혹 계열의 스킬에 면역이 된다는 장점이 있답니다!]
[알림: 거세를 하면 탈모에 걸리지 않는 장점도 있습니다!]
[알림: 거세를 하면….]
“그만해 이 미친놈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내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이게 맞아?
맞냐고.
겜 시작하자마자 이런 위기에 처하는 게 말이 돼?
“놔요! 놔! 이거 놓으라고! 야! 놓으라고! 야 이 미친놈들아! 놔! 으아아아악!”
“어허! 이놈이!”
“놔! 이 고자 새끼들아!”
“금방 끝난다 하지 않았더냐! 눈 한번 질끈….”
너 같으면 얌전히 있겠냐아아아!
“퉤!”
팔을 붙들고 있던 환관의 눈을 향해 침을 탁! 뱉었다.
“악!”
환관이 붙들고 있던 내 팔을 놓쳤다.
지금이다!
번개처럼 주먹을 휘둘러 그 환관의 죽빵을 후려갈기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퍽! 퍼억! 퍽! 퍽! 퍽!
환관들을 단숨에 때려눕혔다.
이게 피지컬이지!
오랜만에 복귀지만, 평범한 NPC들쯤 두들겨 패는 건 일도 아니란 말씀!
‘어서 여길 벗어나야 해!’
일단 문을 박차고 나가 미친 듯이 내달렸다.
부캐고 나발이고 1레벨부터 거기(!)가 잘리는 대참사만은 피해야 할 거 아냐?
“잡아라!”
“게 서라!”
뒤돌아보니 내 거기(!)를 자르려는 놈들이 마치 개떼처럼 맹렬히 추격해 오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공포에 질린 내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자, 잡히면 잘려 버려…!!!’
너무 오랜만이라 깜빡했다.
이 게임, 어딘가 나사 빠진 게임이었지.
그래.
그랬지.
방심하면 사람 하나, 아니 게이머 하나 병신 되는 건 일도 아닌 게임이었어.
복귀 첫날.
나는 목숨 그 이상의 것(!)을 지키기 위해, 젖 먹던 힘을 다해 도망쳐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