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가까스로 놈들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옛날부터 도망치는 것 하나는 예술의 경지에 오른 나다.
이 정도로 쉽게 잡힐 리 없지.
일단 으슥한 골목에 숨어 잠시 숨을 골랐다.
“헉, 허억.”
어우.
숨이 찬다, 숨이 차.
“큭큭. 큭큭큭.”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 맛이지. 이게 게임이지. 너무 재밌잖아.”
그때 그 시절 감성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살려고 도망쳐 본 게 도대체 얼마 만이야?
아아, 10년 전엔 오우거 한 마리 잡겠답시고 4시간 동안 구르기도 했었는데.
잠깐.
갑자기 든 생각인데… 슬슬 심술이 나네?
“벌집 이 미친놈들 진짜.”
<벌집>이란 BNW의 개발사이자 유통사인 <하이브 게임즈 엔터테인먼트>를 뜻했다.
“아무리 부캐라도 그렇지! 튜토리얼도 없이 밑도 끝도 없이 시작하는 게 말이 되냐! 어?!”
물론 이 상황이 <벌집>이 의도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벌집>은 절. 대. 로. 게임 운영에 관여하지 않는다.
시스템상 운영자가 게임에 개입할 방법도 없다.
BNW는 오직 AI가 만들어 낸 세계를 무대로 NPC들과 게이머들이 만들어 나가는 게임.
<벌집>은 오직 지켜볼 뿐이다.
괜히 <방관의 하이브> 혹은 <방관의 벌집>이라 불릴까.
“이게 게임이냐! 어? 게임이냐고!”
하늘을 향해 주먹감자를 먹이며 악을 썼다.
확신한다.
지금쯤 <벌집> 놈들이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내가 3년 만에 부캐로 복귀했는데 <벌집> 놈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내가 부캐를 생성하자마자 <벌집> 모니터링팀에 비상이 걸렸을 거라는 데 내 X랄을 건다.
“웃지 마. 다 아니까. 이빨 보이기만 해. 아주. 내가 대주주인 거 알지. 확 본사로 쳐들어가서. 뒤집어 놓을라니까.”
<벌집>의 모니터링팀 직원들이 날 보며 킥킥대며 웃고 있으리라는 것 또한 확신했다.
<벌집> 직원들은 그런 놈들이다.
중증의 관음증 환자들.
놈들은 게이머들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는 걸 즐긴다.
지금쯤이면 내가 환관 놈들에게 붙잡혀서 고자가 될지, 안 될지에 대해 베팅을 걸고 있겠지.
두고 보자!
이따 로그아웃하면 전용기를 타고 미국에 있는 본사로 날아간 다음에, 날 비웃은 놈들을 모조리 해고해 버릴 거야!
* * *
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삐! 삐! 삐!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경고음이 울려 퍼지고.
“뭐, 뭐야!”
“불인가?”
“대피합니까?”
상황실에서 근무하고 있던 직원들은, 난데없는 비상사태에 크게 당황했다.
“무슨 일이지?”
때마침 상황실을 둘러보고 있던 <벌집>의 오펜하이머 부회장이 상황실 실장에게 물었다.
“더, 더블 오 세븐이.”
<더블 오 세븐>이란 한태성에게 붙은 코드네임.
“무림 서버에… 새로운 캐릭터를… 생성했습니다.”
“하, 한태성 선수가?!”
“그렇… 습니다.”
“맙소사.”
오펜하이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은퇴 후 지난 3년 동안 조용히 지내던 태성이 불쑥 무림 서버에 캐릭터를 생성할 줄이야.
슈퍼계정의 원인 모를 오류 때문에 태성의 부캐 생성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한태성 선수가 복귀했다고? 무슨 수로? 설마 본캐를 삭제한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나 싶어 판타지 서버의 데이터베이스를 뒤져 봤는데, 태성 선수의 본캐는 멀쩡합니다.”
“그럼 어떻게? 슈퍼계정으로도 다른 서버에 캐릭터 생성이 불가능했을 텐데?”
“아직은 파악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히든 NPC 데우스가 개입한 것 같습니다!”
“하하하….”
오펜하이머의 입에서 허탈함 가득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데우스.
999레벨의 히든 NPC.
그라면 충분히 슈퍼계정에 생긴 오류를 해결해낼 수 있었다.
왜?
데우스는 게임 BNW 세계관을 통틀어 가장 강한, 무적의 힘을 손에 넣은 존재였으니까.
“무림 서버에 난리가 나겠군.”
태성은 상식과 룰에 얽매이지 않았다.
행동패턴도 예측하기가 힘들어서, 무엇을 예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 주곤 했다.
규격 외 존재.
오죽하면 태성이 은퇴한 지 3년이 지났음에도 최고레벨이 갱신되기는커녕, 그 근처에도 간 게이머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직도 태성은 판타지 서버 부동의 랭킹 1위였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고.
‘보고, 보고를 드려야 한다.’
오펜하이머는 서둘러 회장 천종호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태성의 복귀는 결코 가볍게 넘길 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무림 서버에 또 하나의 최상위권 랭커가 탄생할지도 모르는 사건이 벌어진 셈.
어쩌면 랭킹 1위가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만큼 태성의 복귀는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다.
전 세계 BNW 게임팬들이 열광하는 건 물론.
회사 주가는 차트를 뚫고 화성까지 갈 테지.
그러니 벌집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태성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는 건 당연했다.
오펜하이머가 상황실을 떠나고.
메인 전광판에 태성의 개인화면이 떠올랐다.
“오오!”
“레전드의 복귀라니!”
상황실에서 근무하는 모든 직원들은 전설의 귀환에 전율했다.
그것도 잠시.
“자자! 빨리빨리 베팅합시다! 다들 돈 줘요! 돈!”
누군가 상황실을 돌아다니며 돈을 걷기 시작했다.
“잘린다는 데 200달러!”
“에이~ 한태성이 누군데? 절대 안 잘리지! 안 잘린다는 데 100달러!”
“난 잘린다는 데 800달러 걸게!”
태성의 예상대로, 상황실 직원들은 베팅을 하고 있었다.
태성이 중성화수술을 당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 * *
일단 [내 정보]부터 확인해 보았다.
내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연오랑]
타입 : 게이머
종족 : 천인 (인간)
성별 : 남
나이 : 21
레벨 : 1
등급 : 없음
신분 : 평민
소속 : 내서당
계급 : 훈련병
직업 : 환관예비후보생
특징 : 늦은 나이에 환관이 되기 위해 내서당에 들어온 늦깎이 환관예비후보생.
환관에 지원하기 전에는 거지들의 집합소인 <개방> 북경지부에 소속된 거지였다.
환관이 되기 위한 첫 관문인 중성화수술을 받기 직전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돌연사하고 말았다.
[알고 계셨나요?]
<개방>이란 거지들이 모여서 만든 문파―길드―랍니다!
개방 정도는 안다.
소싯적에 무협소설 좀 읽었다고!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죽은 사람한테 들러붙은 거네.”
뭐.
상관없지.
고인이 되신 분께는 정말 안 된 일이지만….
그래도 기왕 이렇게 된 거, 남겨 주신 육체는 제가 잘 쓰겠습니다.
[기본 스킬]
- 모든 무기 숙련 Master! (12성)
- 무적류 기본기 숙련 (1성)
- 질풍각 (1성) / 유성권 (1성)
- 폭풍낙하 (1성)
- 진 : 폭풍낙하 (사용불가)
- 천둥작렬 (1성)
- 진 : 천둥작렬 (사용불가)
[심법] [무공] [술법] [잡기술] [제작] (중략)
본캐의 스킬 체계는 무사히 잘 계승된 것 같다.
스킬 이름이 동양식으로 바뀌어 있어서, 다 파악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차근차근 알아보면 되겠지.
띠링!
알림창이 떠올랐다.
[알림: 50레벨을 달성하면 계승되어 있는 스킬체계가 오픈됩니다!]
[알림: 50레벨 달성 시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가 오픈됩니다!]
[알림: 경험치를 획득해 레벨을 올려 보세요!]
“50레벨은 너무한데.”
볼멘소리가 절로 나왔다.
대충 몬스터 몇 마리 잡다가 10레벨쯤 전직하는 게 국룰 아니었나?
근데 난 왜 50레벨에 스킬이 해금되는 거냐고!
왜!
‘근데 얘는 도대체 어디 간 거야? 나처럼 빙의라도 한 건가? 아니면 다른 데 떨어진 건가? 다른 서버로 간 건 아니겠지?’
햄찌는 또 다른 세계인 정령계에 속한 존재라 어떻게 되었을지 잘 모르겠다.
이 세계에 무사히 도착하긴 한 걸까?
아니면….
“뀨우우우우! 주인놈아!!!”
고개를 돌려보니 햄찌가 저 멀리서 나를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 * *
엥?
근데 너 어떻게 날 알아보냐?
지금의 난 본캐인 <지크프리트 폰 프로아>가 아니고, 이 세계의 거지 출신 환관지망생 연오랑인데?
대정령쯤 되면 주인님 몸이 바뀌어도 알아볼 수 있는 건가?
하긴.
우린 영혼의 듀오니까.
“야! 햄찌야! 우리 좆됐어! 빨리 와! 당장 여길 떠….”
그때.
“요괴는 게 서라! 어딜 도망가느냐!”
“잡아라!”
“절대 놓쳐선 안 된다! 저 거대 쥐새끼를 잡는 자에게는 큰 상을 내릴 것이다!”
한 무리의 병사들이 우르르! 햄찌를 뒤쫓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요괴로 오해를 받아 쫓기게 된 모양.
대형견만 한 크기의 쥐새끼―사실 햄스터지만―가 흔한 건 아닐 테니까.
잠깐.
어어?
어어어?
“오, 오지 마!”
내가 소리쳤다.
“반대로 뛰어! 반대로!”
“뀨우우우! 주인놈아! 나 좀 살려줘라! 뀨우우우!”
“반대로 뛰라고! 역돌격하라고! 역돌격!”
“주인놈아아아아아!”
“야 이 미친놈아! 몹 끌고 오지 마! 같이 죽을 일 있냐아아아아아아아!”
간신히 도망쳤는데!
나까지 잡히게 생겼잖아!
하여간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