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난 내상을 입고 천천히 죽어갔다.
[알림: 당신의 캐릭터가 곧 죽을 예정입니다!]
[알림: 사망하기까지 앞으로 1분!]
[알림: 59, 58, 57….]
‘이렇게 죽는다고?’
어이가 없었다.
하필 전직 거지에다 환관지망생에 빙의하질 않나.
시작 지점도 강자들이 득실거리는 황궁이질 않나.
내 땅콩을 수확하려는 놈들에게 쫓기질 않나.
‘이런 의미였구나.’
사부님이 해 주신 말씀이 뇌리를 스쳤다.
‘우주의 법칙이 네 녀석에게 온갖 페널티를 가할 테니, 온갖 사건·사고에 휘말리게 될 게다. 운도 더럽게 안 따라줄 테고.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게 될 게다. 그래도 가겠느냐?’
이제야 그 의미를 알겠다.
그래, 이 정도쯤은 감수해야지.
남들은 1개의 서버밖에 플레이하지 못하는데.
부캐를 팠는데 이 정도 고난과 역경쯤이야.
삶에 의욕을 잃고 하루하루 말라 죽어가던 나다.
그런데 고작 10분 정도 플레이한 것만으로도 너무 재밌고, 행복하다.
‘그냥 한번 죽지 뭐. 죽는 게 나아, 지금은.’
죽으면 캐릭터가 사라지면서 가까운 부활 지점에서 부활하겠지?
어차피 1레벨이라 사망 페널티 따위 하나도 안 무섭다.
죽으면 레벨이 하락하고, 지니고 있던 아이템 중 하나가 랜덤하게 떨어진다.
근데 난 1레벨이라 떨어질 레벨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서 템을 떨굴 걱정도 안 해도 된다.
그 말은 뭐다?
응~ 49시간 있다가 부활하면 그만이야~
햄찌가 좀 걱정되긴 했지만, 어차피 녀석은 대정령.
만약 죽어도 정령계에서 부활했다가 다시 날 찾아올 테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복귀하자마자 죽어서 좀 아쉽긴 한데, 별수 없잖아?
지난 3년도 잘 참았는데 까짓것 49시간쯤 못 참을 것도 없겠지.
기다리는 동안 뭐하고 시간 때울지나 생각해 봐야겠다.
‘와이프랑 같이 강원도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한 2박 3일 바닷바람 좀 쐬고, 맛있는 회도 먹고.’
한참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는데.
“이런!”
금의위 위사가 다가와서 내 손목에 제 손가락을 포갰다.
한의사 선생님이세요?
“죽일 생각은 없었다. 내 잠시 분노를 참지 못했구나. 조금만 참아라.”
예?
“조금 아플 것이다.”
금의위 위사가 나에게 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어어?
“자, 잠깐. 지금 이게 뭐 하는.”
“입을 열지 마라. 불어넣은 기가 흩어지면 치료가 어려워진다.”
“치료? 아니! 치료를 왜 해! 치료하지 마! 이 미친놈아! 누구 멋대로 살려! 그냥 죽게 내버려두….”
금의위 위사가 내 몸 이곳저곳을 푹푹! 찔렀다.
[알림: 상태이상!]
[알림: <아혈>을 짚여 <상태이상 : 침묵>에 걸렸습니다!]
[알림: 지금부터 30분 동안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점혈이 뭐였더라?
무협소설 본 지 하도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알고 계셨나요?]
<점혈법>이란 무협 세계관에 자주 등장하는 수법으로, 신체의 특정 부위―혈자리―에 기를 주입해 상태이상 효과를 일으키는 공통 스킬입니다.
주로 적을 죽이지 않고 제압할 때 많이 쓰입니다.
시전자의 레벨이 높을수록 유지시간이 길어집니다. (기본 5분)
예시)
마혈 : 마비
수혈 : 수면
아혈 : 침묵
훈혈 : 기절
사혈 : 사망
“읍! 읍읍!”
<아혈>을 짚여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읍! 읍읍! 으으으으읍! 읍!”
(야 이! 그냥 뒈지게 두라고!)
“두려워하지 말고, 조금만 참아라.”
“으으으으읍!”
(살리지 마아아아아아아아아!!!)
“그래, 그래. 아무 걱정 마라. 내가 널 살릴 것이다.”
(내가 언제 걱정을 했어어어! 이 미친놈아아아아아!)
금의위 위사는 기어코 나를 살려냈다.
[알림: 내상이 회복되었습니다!]
[알림: 체력이 회복되었습니다!]
[알림: 기가 보충되었습니다!]
[알림: 생명력이 회복되었습니다!]
무섭게 폭락하던 생명력이 하락을 멈췄다.
그런 건 주식 할 때나 반가운 거지 지금은 아니야!
“이제 되었다. 의원에게 치료를 받으면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것이다.”
금의위 위사가 나를 내려다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이 눈치 없는 새끼.
존나 눈치 없어.
* * *
나는 즉시 의원으로 옮겨졌다.
“어디 보자.”
의사처럼 하얀 옷을 입은 환관이 들것에 실려 온 나를 내려다보더니, 맥을 짚었다.
동양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세계답게 의료행위도 한의사 스타일이었다.
“위험할 뻔했는데 다행히 응급조치가 빨랐구려.”
“다행이구려.”
뭐가 다행인데!
뭐가!
“어찌 된 일이오?”
“내서당에서 도망친 환관예비후보생 같은데, 녀석이 본 위사를 공격하기에 나도 모르게 손이 세게 나갔던 것 같소.”
“하늘이 도왔소. 즉사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동의하오.”
“아무튼 알겠소. 이 녀석은 내가 치료할 터이니, 위사께서는 일 보시오.”
“그럼, 부탁하오. 아, 그리고. 녀석 손이 매서우니 조심하시오.”
“알겠소.”
금의위 위사가 떠난 후.
“내상 때문에 기가 많이 허해졌구나. 우선 기를 되찾는 게 급하니, 침술과 탕약으로 널 치료할 것이다.”
환관은 내 몸 곳곳에 수십 개나 되는 침을 꽂더니, 쓰디쓴 탕약까지 먹여가며 치료해주었다.
[알림: 내상이 회복되었습니다!]
[알림: 기가 보충되었습니다!]
[알림: 체력이 보충되었습니다!]
[알림: 생명력이 회복되었습니다!]
덕분에 살게 생겼다.
안 되는데.
[알림: 상태이상!]
[알림: 약 기운으로 인해 <상태이상 : 수면>에 걸렸습니다!]
[알림: 당신의 캐릭터가 한숨 푹 자고 일어날 예정입니다!]
[알림: 한숨 푹 자는 동안에는 캐릭터 조작이 불가능해집니다!]
[알림: 준비하세요!]
[알림: 잠들기까지 앞으로 10초!]
[알림: 9, 8, 7….]
나른한 브금이 들려왔다.
아기들이 졸 때나 깔리곤 하는 그 느릿느릿한 멜로디다.
[알림: 취침 소등하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눈앞이 캄캄해졌다.
[알림: <상태이상 : 수면> 해제까지 앞으로 360분!]
[알림: 359분 59초!]
[알림: 359분 58초!]
진짜 가지가지 한다, 가지가지 해.
“으. 내가 다 졸리네.”
이대로 있다간 캡슐 안에서 잠들 것 같아 뚜껑을 열어젖혔다.
6시간 동안 게임도 못 하는 거, 굳이 캡슐 안에 있을 필요도 없겠지.
‘운동이나 다녀오자.’
게임은 이따 하고.
* * *
그날 저녁.
띠리리리- 띠리리리-
아내와 TV를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알람이 울렸다.
캐릭터가 깨어나기까지 5분이 남았단 알람이었다.
“헉!”
“응? 갑자기 왜 그래? 알람은 또 뭐고?”
“게임해야 돼! 게임!”
“게임? 켜놨어?”
“그게 아니라….”
“얼른 가봐.”
아내가 등을 떠밀었다.
아내는 내가 게임하는 걸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아한다.
하긴.
프로게이머 출신 겜돌이·겜순이 부부가 게임하는 걸 싫어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유부남 여러분!
부러우면 여성 프로게이머나 게임 좋아하는 겜순이랑 결혼하셨어야죠!
호다닥!
캡슐방―요즘엔 가상현실게임 시대에 발맞춰 고급 주거지에는 캡슐을 보관해두는 방이 따로 있다―으로 달려가 캡슐 뚜껑을 열고 몸을 뉘었다.
[알림: BNW 클라이언트 실행!]
[알림: 로그인 성공!]
[알림: 서버를 선택해주세요!]
판타지·무림·어반 3개의 서버 중 무림 서버를 클릭했다.
[알림: 서버에 접속합니다!]
[알림: 로딩 중….]
[알림: 로딩 완료!]
[알림: <무림> 서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접속했지만 아직 눈앞은 캄캄했다.
[알림: <상태이상 : 수면> 해제까지 앞으로 4분 21초!]
[알림: 4분 20초… 4분 19초….]
캐릭터가 깨어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그럴싸한 계획을 세웠다.
‘깨어나면 바로 적들을 쓰러뜨린다. 그다음 옷을 뺏어 입고 환관으로 위장하는 거야. 그리고 유유히 빠져나가는 거지. 그다음에는 햄찌 이 자식 찾아서 합류하고. 그런 다음에 황궁을 빠져나가서 멀리멀리 도망치는 거다.’
…라는 것이 내 계획이다.
[알림: <상태이상 : 수면> 해제까지 앞으로 10초!]
‘집중.’
[알림: 9, 8, 7, 6, 5, 4….]
[알림: 3, 2, 1!]
[알림: <상태이상 : 수면>이 해제되었습니다!]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때려눕힌다.’
일단 주먹부터 움켜쥐고.
서걱!
어?
뭔 소리야?
왠지 섬뜩한 소리가 들렸는데?
욱신!
뭐야?
아랫도리에서 느껴지는 이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한 통증은…?
서, 설마?
띠링!
알림창이 떠올랐다.
[알림: 축하드립니다!]
뭘 축하하는데…?
[알림: 중성화수술에 성공하셨습니다!]
[알림: 땅콩을 수확하셨습니다!]
아.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