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고개를 돌려보니 깐깐하게 생긴 환관이 차가운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 슬쩍 <통찰의 인장>을 사용해 보았다.
[제갈참]
타입 : NPC
종족 : 인간
성별 : 중립 (중성화)
나이 : 41
레벨 : 170
등급 : 일류
신분 : 환관
소속 : 동창
직업 : 교관
특징 : 동창의 훈련소에서 훈련생들을 가르치는 교관 중 하나.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깐깐함을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훈련생들을 아끼는 따스한 마음을 지니고 있을지도…?
어쩌면.
무림 서버는 특이하게도 레벨에 따라 등급이 세분화되어 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무림 서버 등급표>
하수 (10레벨~)
중수 (30레벨~)
삼류 (50레벨~)
이류 (100레벨~)
일류고수 (150레벨~)
절정고수 (200레벨~)
초절정고수 (250레벨~)
화경 (300레벨~)
현경 (500레벨~)
저 제갈참이란 이름을 가진 교관의 레벨이 170.
그러니 등급이 <일류>다.
후후.
공부한 내용이 맞네.
그나저나 특징 뭐야?
깐깐하고 차가운 인상에 안 어울리게 츤데레라는 건가?
“여긴 어디죠?”
“동창 내 훈련소다.”
“그러니까 제가 왜 동창 안에 있는 훈련소에 있는 겁니까?”
“금의위 위사 곽말풍이 너를 동창에 추천했다.”
곽말풍?
그게 누군데?
“모르는 사람인데요?”
“잘 알 텐데?”
제갈참 교관이 곽말풍이 누구인지 이야기해 주었다.
빠직!
이야기를 들은 내 이마에 빡! 하고 힘줄이 섰다.
아~ 그 눈치 없는 새끼?
“절 왜 추천했답니까? 킁.”
“듣기로 네놈의 재능을 높이 샀다더군. 본래 금의위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네놈이 이미 수술을 받았단 이야기를 듣고 동창에서 데려가면 좋겠다고 제안했다더군. 그의 입장에선 호의를 베푼 셈이다.”
“꼴에 보는 눈은 있나 보네요.”
…라고 말했지만 생각해 보니 또 화가 났다.
잠깐.
‘그럼 이제 더 탈출하기 힘들어진 거잖아?’
평범한 환관으로 허드렛일만 해도 탈출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첩보기관에 날 낙하산으로 꽂았다고?
이게 호의를 베푼 거라고?
엿 먹인 거지?
이 눈치 없는 새끼.
진짜 눈치라고는 1도 없는 새끼.
“일단 받아라.”
제갈참이 웬 비단주머니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네놈의 소중한 것이다.”
“예…?”
“수술로 자른 네놈의 소중한 것을 썩지 않게 잘 말린 것이니, 소중히 간직하도록.”
x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알림: <소중한 비단 주머니>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도대체 이걸 왜 주는데?
[소중한 비단 주머니]
자른 환관의 땅콩(!)이 들어 있는 주머니.
소중하게 잘 간직하도록 하자.
분류 : 상징물 (비단 주머니)
등급 : 희귀
내구도 : 1 / 1
효과 :
- 감성 +999
- 슬픔 +999
- 후회 +999
- 미련 +999
참고 : 환관들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소중하고 슬픈 물건이므로,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윽.
제갈참이 넋이 나간 내 목에 노란색 깔때기 모양의 칼라를 씌워주었다.
[알림: <노란 견장 깔때기>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이건 또 뭔데?
내가 무슨 댕댕이냐?
중성화수술 당했다고 이젠 넥카라까지 씌워 주게?
“그만… 이제 그만… 그만 능욕해… 이 미친놈들아….”
눈물이 절로 나왔다.
[노란 견장 깔때기]
중성화 수술을 마치고 갓 환관이 된 이들에게 씌워 주는 깔때기.
명 제국 황실의 전통 예복으로, 신참 환관임을 뜻하는 기간제 아이템이다.
분류 : 의류 (깔때기)
등급 : 일반
내구도 : 1 / 1
지속시간 : 720시간 (착용 시점으로부터 30일)
효과 :
- 선배 환관들로부터 받는 배려 +300
- 선배 환관들로부터 받는 친절 +300
- 선배 환관들로부터 받는 보호 +300
- 실수를 저질렀을 때 벌을 받지 않음.
- 선배 환관들이 텃세를 부리지 않고, 괴롭히지도 않음.
참고 : 이 깔때기를 벗는 순간 가차 없이 지적·태움·체벌·인격모독·가혹행위가 들어오므로 미리미리 잘하도록 하자.
아무래도 <노란 견장 깔때기>는 일종의 초보자 보호기간 효과를 제공하는 아이템인 게 분명했다.
“어쨌든 입소 첫날이니 차근차근 동창 요원이 되는 법을 가르쳐 주도록 하겠다. 30분 후에 훈련장으로 나오도록.”
여담이지만, 이 세계에서 시간은 현실과 마찬가지로 시·분·초로 표기한다.
도량형의 경우에도 사용자의 국적에 맞추어 이해하기 쉽게 자동으로 필터링해서 표기해 준다.
동양 세계관이 익숙하지 않은 게이머들도 게임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괜히 BNW가 갓겜이겠어?
* * *
‘일단은 성질부리지 말고 물 흘러가듯이 따라가 보자.’
전략을 바꿨다.
부캐를 파고 새 게임을 시작한 만큼, 그 옛날 처음 BNW를 접했던 때의 초심을 떠올릴 필요가 있단 생각에서.
이럴 땐 머리를 써야 한다.
고작 1레벨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걸 인정하고, 상황을 지켜보며 기회를 노려보는 거다.
판타지 서버 랭킹 1위 자리는 딱지치기해서 딴 게 아니다.
1레벨이지만 전성기 시절 겪었던 경험들.
내 가장 큰 자산이라 할 수 있는 <짬>은 어디 가지 않았다.
레벨이 낮다고 순간순간의 임기응변, 센스, 정확한 상황 판단 등 뇌지컬까지 발휘할 수 없는 건 아니잖아?
“일단 이 옷으로 갈아입도록.”
제갈참이 허름한 짙은 보라색의 운동복을 내 앞으로 툭! 던져 줬다.
“지금부터 네놈이 동창의 요원이 될 자격이 있는지 시험할 것이다.”
“안 하면 안 되나요?”
“뭐라?”
“그냥 평범한 환관으로….”
그때.
촤라락!
제갈참이 번개처럼 부채를 휘둘렀다.
“히익?!”
잘린 머리카락 몇 올이 나풀나풀 흩날렸다.
‘뒈, 뒈질 뻔했잖아!’
슬쩍 물러섰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이마가 둘로 쪼개졌을 게 분명하다.
“명 제국의 환관이 된 이상 네놈의 모든 것은 황제 폐하의 것이다.
네놈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다. 황제 폐하의 소유물로서 본분을 다하지 않겠다면….”
제갈참이 부채 끝으로 내 이마를 지그시 누르며 경고했다.
“폐기 처분하는 수밖에.”
“히, 히익?!”
“요령을 피우거나, 게으름을 부리거나, 혹은 일부러 무능한 척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네.”
아 씨.
잘못 걸렸네.
“먼저 한 가지만 물어보도록 하겠다.”
“살살 물ㅇ… 아, 아닙니다.”
“개방 출신이라 들었다. 그럼, 무공을 익힌 적이 있느냐?”
“있죠.”
아무렴 없겠어?
댁이 상상하지도 못할 고차원적인 무공―무술―들 많이 익혔지.
“개방에서 배웠느냐?”
“거기선 배운 적 없는데요.”
“그럼 누구에게 배웠느냐.”
“제 사부님께 배웠죠.”
“네 사부란 자가 누구냐.”
어어?
그 발언 상당히 위험한데?
“말씀하셔도 모르실 겁니다.”
“으음. 네 사부는 세상을 등지고 은거한 기인이란 말이냐?”
“맞습니다.”
딱히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세상을 등지고 은거해서 살아가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니.”
제갈참은 제멋대로 해석해 버리고는,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떤 무공을 익혔느냐?”
“글쎄요.”
내가 판타지 서버에서 사용하던 스킬들을 줄줄이 늘어놔 봤자 못 알아들을 테고, 솔직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내가 즐겨 쓰던 <이레이저 스웜>이란 스킬을 어떻게 동양식으로 표현해?
“음. 선풍각, 질풍권, 폭풍낙하, 천둥작렬….”
<내 스킬> 항목을 보고 제갈참이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스킬 이름들을 불러줬다.
“강타, 연쇄강타, 건곤합벽, 만천화우….”
“뭣이?”
제갈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갑자기 왜 그래요?
“건곤합벽? 만천화우?”
“네.”
“지금 건곤합벽과 만천화우를 배웠다고 말한 게 맞느냐?”
“네, 맞는데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옛날부터 잘 써먹었죠. 제 주력 기술들이거든요.”
“그래?”
“건곤합벽이 한 방은 진짜 셉니다.”
<건곤합벽>은 판타지 서버에서 <죽음의 한 방>라 이름 붙은 스킬로, 그 데미지는 어마어마하다.
어지간한 적들을 한 방에 골로 보내 버리다 못해서, 육체와 영혼을 미립자 단위로 분해해 버릴 정도다.
“타격감은 만천화우가 좋고요. 촤라락! 하면 수천 개의 표창들을 뿌려서 죽음의 폭풍우를 만들어 내죠. 숙련도가 높아지면 기로 빛의 검들을 만들어 내서….”
그 순간.
퍼억!
제갈참의 발길질이 내 복부를 찍었다.
“꽥!”
비명을 지르며 날아간 나.
“끄으응!”
피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레벨 차이가 심하다 보니, 내가 아무리 반응을 잘해도 속도에 밀린단 말야….
“왜!”
내가 빽! 소리쳤다.
“왜 때려요! 왜! 묻는 말에 성실하게 대답하는데!”
“감히 본 교관을 능멸하다니.”
제갈참이 차가운 분노가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허풍을 떨어도 유분수지… 파멸황의 무공인 건곤합벽과 사천당문의 비기인 만천화우를 팔아?”
엥?
뭔 소리야?
파멸황은 누구고 사천당문은 뭔데?
도와줘요!
시스템!
* * *
<파멸황>은 약 300년 전에 활동했던 강자로서 <건곤합벽>이란 무공으로 그 시대 모든 강자들을 단 한 방에 때려눕힌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사천당문>이란 사천이란 지역에 자리한 당씨 가문을 가리키는 말로, 그 가문 사람들은 독과 암기―주로 기습에 사용되는 작은 투척 무기들―를 잘 다룬다고 했다.
그 사천당문에서 가장 유명한 무공이 <만천화우>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소싯적에 읽었던 무협소설에서 본 것 같기도 하네.
“한 번만 더 본 교관을 능멸한다면 네놈을 능지처참할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마지막 경고다.”
억울하다.
근데, 맞아 죽을까 봐 입을 못 열겠다.
<건곤합벽>은 사부님에게 배운 내 주력 스킬.
만천화우는 내 또 다른 스승님 중 하나인 <샤키로>라는 NPC에게 배운 거다.
그리고 뭐가 아쉬워서 무림 서버의 이름난 NPC들과 스킬 이름을 팔아먹겠냐고!
“더는 네놈의 허풍에 놀아날 생각 없으니, 질문 따위는 안 해도 되는 것이겠지.”
제갈참이 품속에서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툭 던져 주었다.
“동창의 요원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무력이 필요하다. 무력이 필요하니 무공을 익힌다. 제대로 된 무공을 펼치기 위해서는 기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 책은 기를 다루는 방법, 즉 심법에 관한 것이다.”
이건 알지.
판타지 서버의 마나운용법을 여기서는 <심법>이라고 부른다면서?
즉, 저 책은 마나운용법이 적힌 스킬북이다.
참고로 스킬북은 <비급>이라고 부른단다.
마나운용법을 가르쳐 주겠다라… 뭘 가르쳐 줄 건데?
책을 주워 들고 먼지를 툭툭 턴 뒤에 표지에 적힌 제목을 확인해 보았다.
[알림: <소녀공 비급>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