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버프로 무림정복-14화 (14/115)

제14화.

부들부들!

울컥!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누군 한 달 내내 제갈참 아저씨한테 붙잡혀 온갖 수모와 굴욕을 겪고 있는데!

이 새뀌는 영혼의 듀오라는 놈이 지 혼자 가마를 타고 다녀?

“야! 햄찌야!”

빨래하러 가다 말고 호다닥!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너 어디 있었어! 내가 얼마나 찾은 줄 아냐?”

“뀨우?”

내가 부르는 소리에 햄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인놈아 거기서 뭐 하냐?”

“넌 거기서 뭐 하는데?”

“햄찌 황궁 밖에 간식 사러 간다! 뀨우! 동창제독 누나가 허락해 줬다! 뀨!”

“동창제독…?”

[알고 계셨나요?]

<동창제독>이란 동창의 수장 병필태감으로서, 환관 서열 제2위에 해당하는 높으신 분입니다.

현실로 따지자면 국정원장과 똑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답니다!

“너 동창제독이랑 친해진 거냐?”

“뀨! 그렇다! 동창제독 누나 햄찌 귀여워한다! 뀨우! 햄찌한테 벼슬도 줬다! 뀨! 햄찌 이제 생원이다! 생원!”

“…….”

“근데 주인놈 왜 목에 넥카라 차고 있냐? 뀨우?”

“어? 이, 이거?”

아차.

목에 차고 있던 <노란 견장 깔때기>를 깜빡했다.

이거 유통기한이 언제까지였더라?

어제까지였나?

“뀨! 그거 중성화 수술받은 신참 환관들이나 차고 다니는 거 아니냐?”

“헉!”

“설마 주인놈… 중성화 수술 당한 거냐? 뀨우?”

“아, 아니야!”

황급히 깔때기를 벗어 던졌다.

“뀨! 아니긴 뭐가 아니냐! 뀨우! 입은 옷도 훈련받는 동창 교육생들 활동복 아니냐! 뀨!”

“진짜 아니라니까?”

“뀨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햄찌가 자지러지듯 웃으며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주인놈 중성화 당했다! 뀨우! 이제 주인놈 남자 아니다! 뀨! 그냥 치마나 입고 다녀라! 뀨우우우우!”

“아, 아니라고!”

“뀨우우우! 주인놈 왜 아직까지 살아 있냐? 뀨우? 햄찌 같으면 벌써 혀 콱! 깨물고 죽었다! 뀨우우우우우!”

“…….”

“햄찌가 소문 다 낼 거다! 뀨우우! 주인놈 고자 됐다! 뀨우우우! 고자다! 고자! 뀨우우!”

“소문을… 낸다고?”

“뀨우! 이런 소식을 어떻게 햄찌 혼자만 알고 있겠냐! 뀨! 이건 동네방네 소문내야 한다! 뀨우!”

“그, 그러지 마! 나 그럼 죽어!”

“뀨우우우! 소문낼 거다! 뀨! 소문을 내자~♪ 소문을 내보자~~♬ 소문을 내자~♪ 소문을 내보자~~♬”

“이게 진짜!”

내 속도 모르고 놀려대는 햄찌 놈의 만행에 울화통이 터진다.

“너 오늘 뒈졌어! 아주 끝장을 보자! 쒸익! 쒸익!”

털을 모조리 쥐어뜯어 줄 생각으로, 씩씩대며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그래, 좋아.

오늘 너 죽고 나 살….

“꾸웩!”

가슴팍에 발길질을 얻어맞고 나가떨어진 나.

“이놈!”

햄찌 놈의 수행원 역할을 하던 무관―판타지 세계로 따지면 기사―이 눈을 부릅뜨며 내게 불호령을 내렸다.

“감히 서생원 나으리께 이 무슨 망발이냐!”

“크윽!”

“여기 서생원 나으리께서는 동창제독 각하의 총애를 받고 계시는 분이시다! 어딜 감히 교육생 주제에 맞먹으려 드는가! 만약 한 번만 더 서생원 나으리께 무례를 저질렀다간 그땐 네놈 목이 100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햄찌 놈도 가마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냉혹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주인놈.”

“뭐.”

“주제 파악해라.”

“……!”

“햄찌는 생원이고, 주인놈은 말단 교육생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주제에 맞게 밑바닥에서 x뺑이나 치란 말이다.”

햄찌 놈은 그렇게 말하고는 냉혹한 목소리로 가마꾼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자.”

“예, 나으리.”

햄찌 놈이 탄 가마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으… 으으으으으…!!!”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몸서리쳤다.

햄찌 이 의리 없는 새끼… 나를 배신해…?

너… 딱 두고 보자….

진짜 너… 가만 안 둬….

힘만 되찾으면 제일 먼저 네놈부터 조진다!

가만 안 둘 거라고 이 쥐새끼야!

* * *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이 의리 없는 새끼!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아?

털 하얀 짐승인가?

아무튼 기분이 더럽다.

살다 살다 햄찌 이 자식한테 통수 맞을 줄 누가 알았겠어?

뭐?

동창제독 각하의 총애를 받아?

이 권력에 빌붙어 기생하는 쥐새끼 같으니라고!

주인은 중성화까지 당하고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고 있는데!

펫이란 놈이 권력자한테 빌붙어서 주인을 업신여기고 멸시해?

이 쳐 죽일 놈!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빨래장에 도착하자마자 웃통을 벗어 던지고 빨래를 시작했다.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빨랫방망이로 벗어 던진 상의를 미친 듯이 내리치며 분노를 다스리다 보니 기분이 좀 풀리는 것도 같다.

어?

이거 좀 괜찮은데?

이래서 사람들이 스트레스받을 때 설거지 같은 걸 하는 건가?

문제는 그다음.

[알림: <동창 교육생 활동복 상의>의 내구도가 0이 되었습니다!]

으응?

“뭐, 뭐야.”

알림창에 당황해서 확인을 해 보니, 활동복 상의가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아차.

스트레스 푼답시고 빨랫방망이질을 너무 심하게 했더니 옷이 다 찢어졌나 보다.

하여간 쓸데없이 디테일한 게임이라니까?

근데 어떡하지?

혼나겠지?

보급품 관리 미흡 같은 사유로?

“어이, 네놈.”

응?

고개를 돌려보니 교육생들 대여섯 명이 팔짱을 낀 채로 날 둘러싸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참 아닌가? 제갈참 교관님에게 일대일 교육을 받는다던.”

“그런데요?”

“하늘 같은 선배님들을 뵈었으면 퍼뜩 달려와 인사를 해도 모자랄 판에.”

“안녕하세요.”

“……?”

“인사했잖아요. 뭐 문제라도?”

“큭.”

선배가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버르장머리가 없단 이야기가 들려오긴 했어도 이 정도일….”

“제가요? 저 되게 예의 바른 편인데?”

“감히 하늘 같은 선배님이 말씀하시는데 말대답을 해? 이거 안 되겠구나. 오늘 네놈을 단단히 혼쭐을 내주어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 놓으리라!”

선배들이 날 둘러싸기 시작했다.

“하.”

겨우 억눌렀던 짜증이 울컥 솟구쳐 올랐다.

안 그래도 햄찌 놈한테 통수 맞아서 기분도 더러운데 감히 나한테 똥군기를 시전해?

“지금이라도 용서를 빈다면 변소 청소 정도로….”

빠악!

헉?

나도 모르게 때려버렸다.

“커헉!”

내가 휘두른 빨랫방망이에 턱주가리를 얻어맞은 선배가 철푸덕! 쓰러졌다.

우수수!

피 묻은 옥수수들이 흩날린다.

“……!”

“……!”

“……!”

선배들이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감히!”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화가 난 선배들이 나에게 덤벼들었다.

“흐으.”

웃음이 절로 나온다.

안 그래도 열 받아 죽겠는데 시비를 걸어?

그래, 마침 잘 걸렸다.

오늘 칼춤, 아니 빨랫방망이춤 좀 춰?!

“우리 선배님들께서 오늘 몸이 좀 근질거리신가 보네요. 그럼 이 후배가 긁어 드려야죠.”

가렵다는데 긁어 드려야지.

암, 그렇고말고.

* * *

“으… 으으으으으으…!!!”

제갈참은 급하게 올라온 보고를 받고 혈압이 올라 까무러칠 뻔했다.

‘그새를 못 참고 사고를 쳐?’

녀석이 빨래장에서 선배들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줄줄이 엎드려뻗쳐 시켜 놓고 줄빠따를 쳤단다.

그거로도 모자라 빨래건조장에서 활동복 상의 5개를 훔쳤단다.

그런 주제에 태연하게 숙소로 돌아가 코까지 골아대며 낮잠을 퍼질러 자던 중 내부수사과 소속 환관들에게 체포당했단다.

지금은 하극상·폭행·절도·공무집행방해·도주 등등의 죄목으로 영창에 갇혀있다나?

훈련이 끝난 지 불과 2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지끈지끈!

제갈참은 치솟는 혈압 때문에 눈앞이 어질어질해져서,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저어… 제갈 교관님?”

“말해라.”

“교육감님께서 보자십니다.”

“후우. 알겠다.”

제갈참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단 생각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교육감은 첩보기관인 동창 내부의 교육훈련을 총괄하는 직책으로서, 동창 내 서열 7위에 해당했다.

여러 교관들 중 하나인 제갈참에게는 까마득히 높은 상사인 것이다.

‘이런 대형사고라면… 중징계를 받아도 할 말이 없을 터. 수습이 될지 모르겠군.’

연오랑이 친 사고는 그냥 웃어넘길 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위계질서가 칼 같은 황궁에서 터진 하극상이라서, 결코 가볍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

제갈참은 무거운 마음으로 교육감을 찾았다.

“제갈 교관.”

“예, 교육감 어르신.”

“자네가 가르치던 놈이 무슨 사고를 쳤는지는 전해 들었겠지?”

“예.”

“이번 건은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 없네. 우리 동창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면 더더욱.”

“외람된 말씀이오나….”

제갈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녀석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뭐라?”

“녀석이 무거운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은 저 역시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하지만 녀석은 그저 천둥벌거숭이에 불과합니다. 사리 분별조차 제대로 못 해 천방지축으로 날뛴 것뿐이지,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허어!”

“아직 깔때기도 벗지 못한 녀석을 참형에 처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 생각됩니다.”

“이보게, 제갈 교관. 자네는 현명하고 사리 분별이 확실한 사람이야. 자네 같은 원칙주의자가 도대체 그런 녀석을 왜 그리 감싸고 도는 겐가? 특별히 일대일 교육까지 해 주면서?”

“그건….”

제갈참이 대답했다.

“녀석의 재능이 너무나도 아깝기 때문입니다.”

“재능이라….”

“녀석은 잘만 가르친다면 황실 최고수가 되어 황제 폐하를 보필할 것이고, 나아가 제국의 번영에 이바지할 놈입니다.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을 지닌 놈을 이렇게 연옥에서 썩힐 순 없습니다.”

<연옥>이란 NPC들이 불로불사의 존재인 천인―게이머―들을 가두어두는 감옥이었다.

여기에 갇히게 되면 절대 탈출할 수 없다.

다른 게임으로 치면 비매너 행위로 인해 정지를 먹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란 말인가? 그 아이의 재능이?”

“예, 교육감 어르신.”

“흐음.”

“제가 이렇게 빌겠습니다.”

제갈참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만약 녀석이 또 이런 사고를 친다면, 그때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저 역시 똑같은 벌을 받겠습니다.”

“어허! 제갈 교관! 이 사람이 왜 이래?”

“부탁드립니다.”

“자네가 이렇게까지 한다면 나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지만서도…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내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순 없을 것 같네. 일단 동창제독 각하께 보고 후 선처를 부탁드릴 터이니, 좀 기다려 보게.”

“교육감 어르신께 감사드립니다.”

제갈참이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이제 녀석의 운명은 내 손을 떠났다. 이제는 동창제독 각하의 자비를 바라는 수밖에.’

제갈참은 여기까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걸 알았다.

일개 교관으로서는 이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비운의 천재가 생기는 일만큼은 막아야 한다. 그런 비극은 다시 일어나선 안 되는 것이다. 절대로.’

제갈참은 옛일을 떠올리며, 부디 녀석에게 행운이 함께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천부적인 재능이 만개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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