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알림: 로그인 성공!]
[알림: <무림서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대명 제국 황궁.
동창무고[東廠武庫]
엥?
여기 어디야?
로그인해 보니 웬 퀴퀴한 냄새가 가득한 도서관 같은 곳이었다.
뭐지?
어제까지만 해도 영창에 갇혀있었던 거 같은데?
“왔느냐.”
안경을 쓴 늙은 환관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말달필]
타입 : NPC
종족 : 인간
성별 : 중립 (중성화)
나이 : 74
레벨 : 55
등급 : 삼류
신분 : 환관
소속 : 동창
직업 : 사서
특징 : 동창의 무공비급들이 보관되어 있는 동창무고의 관리인.
곧 은퇴를 앞두고 있는 노년의 환관이다.
“여긴 어딥니까?”
“동창의 무공비급들이 보관되어 있는 동창무고이니라.”
“저 왜 여기 있죠?”
“네 녀석은 오늘부터 이곳 동창무고를 청소하는 임무를 받았다.”
“네?”
“네 녀석이 벌인 짓에 비하면 아주 관대한 처분일 테지. 끌끌끌. 동창제독 각하께서 특별히 선처를 베푸신 것이니, 앞으로 한 달간 이곳 동창무고를 깨끗하게 청소해 놓도록.”
이게 뭔 소리야?
내가 왜 여길 청소해?
14박 15일 영창 가는 거 아니었어?
띠링!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관대한 처분]
내용 : 30일 동안 하루 4시간씩 말달필을 도와 동창무고를 청소하고 관리하자.
타입 : 일일 퀘스트 (30회 한정)
진행률 : 0% (0/30)
보상 : 없음
지난 한 달 동안 뺑이 친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이젠 청소를 하라고?
또 한 달 동안이나?
미친!
안 해!
아니, 못 해!
※ 주의사항 이 퀘스트를 수락하지 않거나 중도에 포기하면 10년 동안 <연옥>에 갇히게 됩니다.
시, 십 년 정지라고?
선배님들 좀 주물러 드리고, 활동복 몇 벌 빌렸단 이유로?
솔직히 좀 억울하다.
안 그래도 햄찌 놈한테 통수 맞아서 빡쳐 있었는데, 선배란 놈들이 똥군기를 부리려고 하는 걸 어떻게 참아?
“이 정도로 끝나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예?
뭐가요?
“네놈이 친 사고 때문에 제갈참 그 녀석이 얼마나 고초를 겪은 줄 아느냐?”
“고초요?”
“제갈참 그 녀석이 교육감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네놈의 선처를 빌었다. 명문가인 제갈세가의 장남 출신인 그 녀석으로서는 큰 결심을 한 게야. 그 콧대 높은 원칙주의자 녀석이 네놈 같은 사고뭉치 때문에 무릎을 꿇다니.”
뭐라고요?
무릎을 꿇어?
왜???
“교육감도 제갈참의 얼굴을 봐서 선처를 해 주고 싶었지만, 네놈이 친 사고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 동창제독 각하께도 보고가 올라갔다고 하더군.”
“아?”
“동창제독 각하께서 특별히 네 녀석을 용서해 주시고 기회를 주셔서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네놈은 지금쯤 연옥에 갇혔을 테고, 10년 동안 푹 썩었을 게야.”
“그, 그렇군요.”
“그러니 여기 있는 동안이라도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짱박혀 있다가 나갈 생각이나 하도록 해라. 그러지 않으면 연옥으로 끌려갈 터이니.”
“눼에….”
10년 정지라니.
그건 좀 무섭다.
지난 3년 동안 BNW를 못해서 무기력증에 우울증 초기 증세까지 겪었던 나다.
그런데 기껏 판 부캐가 10년 정지를 먹는다면….
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옜다.”
툭.
말달필 영감이 내게 빗자루 하나를 던져주었다.
“노부는 잠시 마실 좀 나갔다 올 터이니, 그때까지 깨끗하게 쓸어놓도록 해라.”
노부[老父]란 무림서버에서 늙은 NPC들이 스스로를 가리키는 말이라나?
“에라이.”
빗자루를 집어 들고 분통을 터뜨려봤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10년 정지 먹기 싫으면 얌전히 청소나 하는 수밖에.
그래도 한 달은 너무 심한 거 아냐?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고!
X발!
‘제갈참 그 녀석이 교육감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네놈의 선처를 빌었다. 명문가인 제갈세가의 장남 출신인 그 녀석으로서는 큰 결심을 한 게야. 그 콧대 높은 원칙주의자 녀석이 네놈 같은 사고뭉치 때문에 무릎을 꿇다니.’
왠지 제갈참 아저씨가 맘에 좀 걸린다.
그 엄격·근엄·진지한 아저씨가 나 때문에 무릎까지 꿇었다고?
그 아저씨가 날 그렇게 아꼈어?
쩝.
괜히 미안해지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본의 아니게 은혜를 입어 버렸네.
앞으로는 아저씨 입장도 좀 헤아려야겠다.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순 없으니까.
그건 그렇고.
일단 청소부터 하자.
* * *
청소는 쉽지 않았다.
하도 오랫동안 청소가 안 되어 있었는지, 쓸어도 쓸어도 먼지가 끝도 없이 나왔다.
[알림: 퀘스트 완료까지 2시간 39분 11초… 10초… 9초….]
시간도 잘 안 간다.
이걸 한 달 동안 하라고?
‘휴. 당분간은 얌전히 있자. 렙이 좀 올라야 도망치든 말든 하지.’
탈출하기도 전에 연옥에 갇히면 나만 손해.
제갈참 아저씨가 해 준 것도 있으니까, 당분간은 고분고분 따라줘 볼까?
일단 좀 내려놓자.
지금의 나는 판타지 서버의 지크프리트 폰 프로아가 아니라, 무림 서버의 연오랑이니까.
초심을 찾는 거다.
“다 쓸었느냐?”
마실 다녀온다던 말달필 영감님이 돌아와 물었다.
“열심히 쓸고는 있었는데 끝도 없네요.”
“끌끌끌. 수십 년 동안 쌓인 먼지가 어디 하루아침에 사라지겠느냐. 시간도 많으니 매일 조금씩 천천히 하도록 해라.”
“네.”
“저기 쌓여 있는 책들이 보이느냐?”
“네.”
“아궁이에 넣고 태워버리도록 해라. 엊그제 정리한 책들인데, 무공비급이 아니라 아무짝에도 없는 불쏘시개들이더구나.”
마침 빗자루질도 지겹던 참이라, 심부름이 반가웠다.
화륵, 화르륵!
말달필 영감님의 부탁에 따라 책들을 들고 아궁이로 향했다.
“뭔데 태우라는 거야?”
불쏘시개로 내던지기 전에, 궁금해서 책 제목들을 슥 훑어보았다.
“투명룡전기?”
번역하면 <투명드래곤 이야기> 정도?
설마 무림 서버에는 투명드래곤도 있는 건 아니겠지?
판타지 서버에서도 투명드래곤 같은 건 없다고.
“화산공격 남궁수비, 철운거왕 엄복돈, 옥보단, 소림축국, 가마수두라….”
살펴보니 죄다 이상한 내용들만 기록된 소설이거나, 혹은 잠자리 테크닉에 관한 성인 잡지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왜 불쏘시개들이라고 했는지 알겠네.
그러던 중.
툭.
불태우려던 책 사이로 사각형으로 접힌 양피지 뭉치가 떨어졌다.
[똥 묻은 양피지]
똥이 잔뜩 묻어서 굳어 버린 양피지.
누군가 휴지 대용으로 쓴 것 같다.
뭔가 많이 적혀 있기는 한데, 똥이 많이 묻어서 내용을 도저히 알아볼 수 없다.
타입 : 잡동사니 (양피지)
등급 : 일반
내구도 : 1 / 1
참고 : 복원을 전문으로 하는 기술자에게 맡기면 내용을 알아볼 수 있을지도?
“윽. 냄새.”
왼손 집게손가락으로 코를 막고,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똥 묻은 양파지>를 집어 인벤토리에 넣었다.
[알림: <똥 묻은 양피지>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바지에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대충 슥슥 문질러 닦았다.
위생은 철저히 관리해야지!
‘혹시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무슨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지고 있기로 했다.
도둑질도 아니잖아?
어차피 불태워 없애 버릴 거였는데, 내가 갖는다고 무슨 문제가 되겠어?
더럽고 추잡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내 습관 같은 거라서 어쩔 수 없다.
전생에 고물상이었는지, 난 아무리 쓸모없어 보이는 잡템이라도 일단 먹고 보는 습성이 있었다.
심지어 버리지도 않는다고?
“으이차!”
책들을 다 태운 후 몸을 일으켰다.
쪼그려 있었더니 다리가 아프다.
일퀘 마저 끝내러 가야지.
* * *
슥슥.
빗자루질을 하면서 일퀘를 깨는 동안 말달필 영감은 동창무고에 보관되어 있는 책들을 새로운 책에 필사―손으로 베껴서 복사함―하는 작업을 했다.
“그걸 왜 하세요?”
“노부의 나이가 벌써 일흔넷이니라. 몇 달 있으면 퇴궐하여 낙향할 예정이라, 그 전에 낡은 비급들의 내용을 새 책에 옮겨 두려 하느니라.”
“아.”
직업의식 대단하시네.
이렇게 정리해 두고 은퇴하시려는 거 보면.
본받을 만한 점이네.
“노부가 능력만 있었다면 이곳에 있는 무공들을 수정하고 보완해서 정리해 두었을 터인데… 그럴 수가 없는 것은 조금 아쉽구나.”
“하하하.”
“그래도 이렇게나마 낡은 무공비급들을 새 책에 옮겨 놓으면, 후배 환관들이 볼 수 있지 않겠느냐. 그것만으로도 노부의 소임은 다할 것이겠지.”
“응원합니다, 어르신.”
“오냐.”
슥슥.
나는 빗자루질을 하고.
슥슥.
말달필 영감은 무공비급을 필사하고.
조용한 가운데 정적인 소음만이 들려오는 시간이 계속됐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알림: <관대한 처분> 퀘스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1/30)]
일퀘가 끝났다.
말달필 영감님이랑 각자 말없이 맡은 바 일에 열중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모양이다.
노가다가 이게 무서워.
시간 가는 줄 모른다니까?
영감님께 보고하고 퇴근해야겠다.
할 것도 없는데 접속해 있어서 뭐 해?
“영감님?”
“…….”
“저어… 영감님?”
“…….”
“영감님!”
대답이 없다.
‘설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호, 혹시 돌아가신 거 아니죠?”
“…….”
“영감님, 영감님!”
“쿠우울….”
“으응?”
“쿨… 쿠울….”
“에라이.”
연로하셔서 그런지, 말달필 영감님은 붓을 쥔 채로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져 있었다.
이 영감탱이가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그러다 감기 드십니다. 곧 은퇴도 앞두신 양반이.”
책상 옆에 있던 비단 담요를 잠든 말달필 영감님에게 덮어 주었다.
“숙녀공?”
말달필 어르신이 필사하고 있던 무공비급에 눈길이 갔다.
<숙녀공>이라는 이름의 그 무공은, 내가 익힌 <소녀공>의 상위호환 격인 심법이었다.
“뭐야. 처음부터 제일 구린 걸 준 거야? 치사하게.”
하긴.
말단 교육생한테 좋은 심법을 가르쳐 줄 리가 없지.
“어디 보자….”
문득 든 호기심에 <숙녀공> 비급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비급에는 <숙녀공>의 기 흐름이 아주 자세히 적혀 있었다.
스르륵!
내가 가진 심법인 <우주근원진기>와 <숙녀공>의 기 흐름을 비교해 주는 상태창이 떠올랐다.
오호라?
이런 기능도 있었어?
“심법 이렇게 하는 거 아닌데.”
상태창을 통해 비교해 보니 <숙녀공>의 기 흐름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물론 난 심법에 대해서 잘 모른다.
많은 심법들을 경험해 본 게 아니니까.
하지만 왕도[王道]가 뭔지는 잘 안다.
그러니까, 기를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지향점을 안다는 이야기다.
내 <우주근원진기>를 기본값으로 놓고 <소녀공>과 비교하면, 답이 나왔다.
<숙녀공>은 처음부터 잘못 만들어진 심법이다.
내가 익힌 <소녀공>은 말할 것도 없고.
처음부터 설계 자체가 잘못됐으니, 아무리 발전시키려고 해도 꼬이는 게 당연하지.
‘잘못된 설계를 근본부터 뜯어고치려면 아예 새 심법을 만드는 게 낫겠지? 그렇다고 아예 이걸 안 쓸 순 없을 테고. 그럼 일단 만들어진 구조 내에서 최대의 효율을 발휘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건데.’
붓을 들었다.
슥슥.
그런 뒤 <숙녀공>의 잘못된 부분들을 하나하나 고쳐나갔다.
어휴, 조잡해.
막상 시작하니 고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귀찮아서 내버려두고 싶지만, 성격상 그게 잘 안 된다.
처음부터 안 봤다면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본 이상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다.
으으.
이런 성격은 좀 고쳐야 할 텐데….
“끝.”
<숙녀공>의 잘못된 부분들을 다 고쳐 놓고 보니 어느새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윽. 늦었네. 오늘 하체 하는 날인데.”
서둘러 로그아웃했다.
내 나이 30대 중반.
이제 하체 운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게을리했다간 더 나이 먹어서 고개 숙인 남성이 될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지금부터 열심히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