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설마 동창무고에서도 사고를 치진 않겠지?’
녀석이 동창무고에서도 사고를 친다면, 그땐 정말 끝장이었다.
징계를 받는 중 사고를 치면 기본 10년은 받을 테고.
괘씸죄까지 더해진다면?
최소 20년은 연옥에서 푹 썩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녀석은 자신의 재능을 한창 꽃피워야 할 시기에 연옥에서 썩으며 비운의 천재로 남게 될 터.
‘더는 그런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제갈참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창무고를 찾았다.
혹시나 녀석이 또 사고를 칠까 봐 틈틈이 들여다보기로 한 것이다.
녀석은 이미 퇴근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벌써 퇴근하고 자기 세계로 돌아갔나 보군.’
NPC들의 입장에서, 천인들은 매우 특이한 존재였다.
천인들은 본래 자신이 속한 세계와 제갈참이 속한 세계를 넘나드는 존재로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이 세계가 게임 속 세상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는 NPC들로서는,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쿠울. 쿠우울.”
사서 말달필 영감이 비단 담요를 덮은 채 책상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연로하셔서 그런지 아직 퇴근 시간도 되지 않으셨는데 졸고 계시는군. 하긴. 말달필 어르신께서도 이제 은퇴하실 때가 되긴 했지. 어르신을 위해서라도 녀석이 여기서 징계를 받는 동안 별일 없어야 할 터인데.’
제갈참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달필을 깨웠다.
곧 동창무고를 닫을 시간이었기에….
그래야 은퇴를 앞둔 이 늙은 환관도 숙소로 돌아가 편히 잠을 청할 테고.
그러던 중.
“음?”
제갈참은 말달필이 필사하던 중인 것으로 보이는 <숙녀공> 비급에 빼곡하게 주석이 달린 걸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숙녀공>은 현역으로 활동하는 동창 요원들의 절반 이상이 주로 사용할 만큼 대중화된 심법.
하지만 제갈참이 아는 한 <숙녀공> 비급은 저렇게 빽빽하지 않았다.
‘말달필 어르신께서 후배들을 위해 주석을 달아 두신 건가?’
하지만 말달필의 무공수위는 형편없는 수준이라, 비급에 주석을 달 만한 실력이 되지 못했다.
‘이상하군.’
제갈참은 뭔가 잘못된 <숙녀공> 비급을 차근차근 뜯어 보았다.
‘누군가 수정을 해 놓은 게 분명하다. 누가 감히 이런 미친 짓을?’
심법에 함부로 손을 대는 건 금기시되는 행동이었다.
체내에서 움직이는 기의 흐름은 엄청나게 민감하다.
그렇기에 조금만 잘못되어도 어마어마한 부작용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잘못된 심법을 익혔을 때 손발이 영구적으로 마비되는 건 운이 좋은 경우다.
반신불수나 식물인간이 되는 경우도 흔하고, 심할 경우 완전히 미쳐 버려서 닥치는 대로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광인이 되곤 한다.
그렇기에 이미 완성된 심법을 수정하는 건 최소 화경의 경지에 오른 초절정고수들만의 특권이었다.
그마저도 심법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초절정고수라면, 심법을 수정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게 현실.
안정적으로 심법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현경의 경지에는 올라야 한다고 했다.
‘설마 연오랑 이놈이 심법에 장난을 쳐놓은 것인가?’
정말 그런 것이라면, 이건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누군가 함부로 수정된 심법을 익히고 폐인이 되기라도 한다면, 충분히 살인죄를 적용받고도 남는다.
왜?
잘못된 심법을 유포하는 건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한 테러행위나 다름없었으니까.
‘연오랑 이 구제불능 같은 놈! 또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내 너를 위해 교육감에게 무릎까지 꿇었거늘!’
염치도 없지!
연옥에 갇히는 중형을 면한 지 고작 하루 만에 이런 대형사고를 치다니!
제갈참은 녀석의 철없는 행태에 분노하면서, 수정된 비급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기를 이런 식으로 움직이면… 음?’
뭔가 이상했다.
어째 느낌이 묘했다.
‘되나?’
제갈참은 검증되지 않은 심법에 손을 대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수정된 심법에 따라 기를 움직여 보았다.
그 결과.
‘헉!’
제갈참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강력한 기의 흐름에 당황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기가 강력해지긴 했지만, 그만큼 안정적이었다.
기의 흐름이 물 흐르듯 매우 자연스러워서, 도저히 잘못된 것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 말도 안 돼!’
제갈참은 수정된 <숙녀공>의 위력에 경악했다.
수정된 <숙녀공>은 제갈참이 알던 심법이 아니었다.
더욱 강력할뿐더러, 안정적이기까지 했다.
‘이쯤 되면 아예 다른 심법이라고 봐도 좋다. 숙녀공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상승의 심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맙소사.’
제갈참은 전율했다.
기존의 심법을 수정해 새로운 심법을 만들어 낸다는 것.
그건 이 세계의 용어로 일대종사[一代宗師]의 경지에 오른 자들만의 전유물이었다.
<일대종사>는 한 시대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다는 위대한 스승이란 뜻.
그러니 <숙녀공>을 더욱 진일보시킨 녀석은 가히….
‘만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란 말인가?’
제갈참은 녀석이 다른 세계에서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 *
나는 10년 정지를 피하기 위해 하루 4시간 <관대한 처분> 일일 퀘스트를 클리어하며 시간을 보냈다.
동창무고를 쓸고, 닦는 청소는 물론.
말달필 영감님을 도와 무공비급을 정리하거나, 혹은 무공비급을 열람하러 오는 동창 요원들을 안내해 주기도 했다.
그밖에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잡일까지.
도서관 사서의 조수 역할을 수행했다고나 할까?
이것도 나름 게임의 재미 중 하나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체험하는 것 말이다.
그러던 중 궁금한 게 생겼다.
“근데 저기 있는 책들은 뭡니까?”
동창무고 가장 깊숙한 곳에는 세 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마법진 같은 곳 안에 있는 데다가 부적까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딱 봐도 <함부로 접근했다간 뒈짐>이라고 적혀 있는 것 같다.
딱히 지키는 사람은 없어도 저렇게까지 보관하는 걸 보면 분명 비싼 거겠지?
저걸 훔쳐서 내다 팔면 얼마나 받을까?
“동창삼보 말이냐?”
“동창삼보요?”
“우리 동창에서 가장 뛰어난 무공 세 가지를 이르는 말이니라.”
“아하!”
“네 녀석은 명색이 동창의 교육생이라는 놈이 그것도 몰라?”
“헤헤헤헤.”
“웃기는.”
“그래서 그 세 가지 무공이 뭔데요?”
“규화보전과 벽사검법과 섭혼무다.”
“어떤 무공입니까?”
“규화보전은 우리 환관들이 익힐 수 있는 심법 가운데 제일이다. 가히 천하제일의 심법을 논할 만한 신공이지.”
“그럼 벽사검법은요?”
“역시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검법이다.”
“섭혼무는요?”
“역시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신법이다.”
아하!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심법·검법·신법이 한 세트란 말이지?
“끌끌끌!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무공이라니 눈빛부터 달라지는구나. 저것들을 모두 익혀서 동창 최고수가 되고 싶겠지? 끌끌끌!”
말달필 영감이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훗.
영감님이 알긴 뭘 알아요?
익히긴 개뿔.
훔쳐서 내다 팔면 딱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듣자 하니 네 녀석이 비범한 재능을 지녔다고 들었다.”
“벌써 소문이 그렇게 났어요? 안 되는데….”
“…….”
“아무튼, 익히면 강해지는 무공들이란 거죠?”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동창삼보는 단 하나만 익혀도 천하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상승무공들이다!”
“아, 예.”
“하지만 네 녀석이 아무리 뛰어난 자질을 지녔다 한들, 동창삼보 중 하나라도 익히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요?”
“우리 동창 역사상 동창삼보를 모두 익힌 사람은 현 동창제독 각하뿐일 정도이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마.”
“그럼 저것들을 훔쳐서 내다 팔면 엄청 비싸겠네요?”
“그야 당연….”
멈칫.
말달필 영감이 눈을 부릅떴다.
“이놈이 뚫린 입이라고! 우리 동창의 보물인 동창삼보를 내다 팔 생각을 해? 그것도 훔쳐서? 네놈이 아주 정신머리가 단단히 나갔구나!”
말달필 영감이 들고 있던 곰방대를 휘둘렀다.
휘릭!
피했다.
“이놈이? 피해?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게 서라!”
“헤헤헤헤!”
쫓아오는 말달필 영감님을 피해 달아났다.
에헤이~
거, 농담입니다! 농담!
훔칠 수 있어야 내다 팔든 말든 하….
퍼억!
“꽥!”
뭔가에 부딪혀 나가떨어진 나.
으으.
엉덩이야.
꼬리뼈 부러진 거 아냐?
“아니, 사람이 부딪혔으면 사과를 해야… 헉?”
고개를 들어보니 제갈참 아저씨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과 부릅뜬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 씨.
X됐네.
* * *
“이놈.”
제갈참 아저씨가 엄격·근엄·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이놈! 했다.
“또 무슨 사고를 친 것이냐?”
“예? 제가요? 그런 적 없는데요? 제가 무슨 사고를 쳐요. 하하하하하!”
그때.
“이보게! 제갈 교관! 아니 이놈이 글쎄….”
헉.
“동창삼보를 훔쳐서 내다 팔 생각을 하질 뭔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이….”
야 이 입 싼 노친네야!
농담이라고 했잖아!
“어르신 말씀이 정말이냐?”
“그, 그게 아니라….”
“따라오너라.”
“눼에….”
아.
진짜 X됐네.
제갈참 아저씨를 뒤따라가는 내 발걸음이 꼭 도축장에 끌려가는 가축 같다.
‘에라이. 개기지도 못하겠네.’
제갈참 아저씨가 날 커버쳐 주느라 무릎까지 꿇었단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미안해서 대들지도 못하겠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10년 정지를 막아 준 셈이니까.
그래도 진짜 사고를 친 건 아니니까, 적당히만 넘어가 줬음 좋겠는데 말이지….
제갈참 아저씨는 나를 동창무고 뒤편에 자리한 으슥한 곳으로 데려갔다.
설마 비밀친구 하자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툭!
제갈참 아저씨가 내 발밑으로 책을 한 권 던졌다.
“이 책, 네 녀석 짓이냐?”
“네에?”
“숙녀공 말이다.”
제갈참 아저씨가 다 안다는 듯한 눈빛으로 물어왔다.
이 아저씨, 쓸데없이 예리하다.
말달필 영감님은 헛다리였는데….
“네 녀석 짓이겠지?”
“눼에….”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심법이 적힌 무공비급을 훼손하는 건 금기시되는 행위다. 황궁에서는 최소 20년 형에 처할 정도의 중죄로 다스린다.”
“헉?”
“무슨 생각으로 심법에 손을 댄 것이냐?”
“어. 음. 그게.”
아 씨.
뭐라고 변명하지?
“그게 그러니까. 음. 어. 에.”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으면 크게 경을 칠 것이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요?”
“그렇다.”
“진짜로?”
“약속하겠다.”
“정말ㄹ… 히익!”
부채의 날이 눈앞을 스쳤다.
오싹!
으.
이번엔 진짜로 뒈지는 줄 알았네.
“마지막으로 묻겠다. 솔직하게 대답해라.”
“정말 솔직하게 말합니다?”
“바라는 바다.”
“그냥… 너무 쓰레기라서 좀 고친 것뿐인데요.”
“뭐라?”
“제가 그런 걸 보면 못 넘어가는 성격이거든요. 너무 조잡하기도 하고, 군데군데 틀린 부분이 너무 많아서 고쳤… 헉.”
어어?
아저씨 표정 굳어진다.
괜히 말했나?
아 씨.
“제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좋은 의도로 그런 건데 좀 봐주시면 안 되나요… 책에 낙서 좀 했다고 20년 형은 너무한 거 아닙니까? 제가 알고 그런 것도 아니고, 모르고 그런 건데….”
“지금… 낙서라 했느냐?”
“헉!”
“낙서라 했느냐는 말이다.”
“그… 제가 표현을 좀 잘못했네요… 하하… 하하하… 낙서라고 말하긴 했는데 나름 30분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악!”
순간 제갈참 아저씨가 내 멱살을 움켜쥐고 벽에 날 처박았다.
이번엔 못 피했다.
지금 내 레벨로는 언감생심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할 속도라.
“크윽!”
숨을 못 쉬겠다.
근데 왜 날 벽에 처박아?
설마….
“비, 비밀친구는 못 해 드리는ㄷ….”
“네놈.”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표정을 한 제갈참 아저씨가 내게 물었다.
“정체가 무엇이냐.”
예?
제 정체요?
……고자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