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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버프로 무림정복-17화 (17/115)

제17화.

정체가 뭐냐고 묻는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연오랑인데요.”

제갈참 아저씨의 질문에 답했다.

“뭐라…?”

“정체가 뭐냐고 물어보셔서 말씀드렸잖아요. 연오랑이라고.”

“이놈이!”

깜짝이야!

“누가 지금 그걸 물었더냐? 네놈의 진짜 정체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음?”

“네놈은 다른 세계에서 강림한 천인이다.”

“그렇죠.”

“그럼 다른 세계에서 네놈은 무엇이었느냐?”

아?

질문이 명확해졌다.

“정확히 어떤 세계를 말하시죠?”

“어떤 세계?”

“제가 속한 세계가 하나가 아니라서….”

“다 말해 보아라.”

“진짜 제가 속한 세계에서라면… 그냥 유명인사 정도로 해 두죠. 그 이상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자세히 말해 보라지 않았느냐.”

“말씀드려도 못 알아들으실 텐데요?”

“알아듣고 말고는 내가 정할 것이다.”

“그래요? 그럼 말씀드릴게요. 저는….”

말해 달라니 말해 주는 수밖에.

“제가 속한 세계에서 프로게이머로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필터링 시스템이 발동되며 내 말의 마지막 ‘머’ 자가 삐- 처리되었다.

그게 뭐냐고?

게이머가 NPC들에게 지나치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면 목소리가 삐- 처리가 되는 거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게이머는 NPC에게 이 세계가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게임 속이라는 걸 알리지 못한다.

그런 발언을 하면 필터링 시스템이 발동돼 NPC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내용으로 받아들인다.

NPC들의 AI가 인간과 완전히 똑같은 만큼, 자신이 사는 세계가 가상현실이며 이 모든 게 허상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큰 충격을 받을 게 당연하잖아?

그래서 막아 놓은 거다.

만약 NPC들이 현실을 깨닫게 된다면 게임 속 세상이 붕괴되고 말 테니까.

“그러니까 네놈이 본래 속한 세상에서는… 프로게이였다는 것이냐?”

아니야!!!

프로게이 아니고 프로게이머라고오오오오오!

거봐!

못 알아듣고 엉뚱하게 받아들이잖아!

“프로게이가 무엇이냐?”

어감이 좀 이상하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해 두죠.”

“평범한 사람이었다라.”

제갈참 아저씨의 눈빛에 불신이 가득하다.

“그게 전부인 것이냐?”

“전부는 아니죠.”

“그럼?”

“다른 세계에도 속해 있긴 합니다.”

“그럼 또 다른 세계에서 네놈은 무엇이었느냐?”

“알면 놀라실 텐데요?”

“상관없다.”

그럼 이것도 말해 주지 뭐.

“황제였죠.”

“……!”

“대제국의 황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까지 올라간.”

“그, 그런!”

“자신이 만든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나타난 창조주를 쳐부쉈다고 말씀드리면 믿으실….”

따악!

“악!”

왜 때려!

“네놈이 정녕.”

내게 꿀밤을 먹인 제갈참 아저씨가 으르렁거렸다.

“아무리 믿어 주려고 해도 도가 지나치다!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어찌 믿겠느냐?”

“지, 진짠데….”

“시끄럽다.”

언제는 사실대로 다 말해 달라면서요?

믿고 싶은 것만 믿을 거면 왜 물어봤어요?

“네 녀석이 다른 세계에서 어떤 존재였든지 간에, 그건 중요한 것은 아닐 터.”

“…….”

“숙녀공의 비급을 어떻게 고친 것이냐. 어떻게 숙녀공을 상승무공으로 수정할 수 있었던 것이냐는 말이다.”

“그냥 고친 건데요? 말씀드렸잖아요. 쓰레기라서 고쳤다고.”

“그냥?”

“올바른 방향성에 맞게끔 수정했을 뿐이지, 어떻게 고칠 수 있느냐고 물어보시면 딱히 대답해 드리기가 어렵네요. 저도 막 이론적으로 생각하고 고친 건 아니라서.”

“으음.”

제갈참 아저씨는 뭔가를 한참 생각하는 듯하다가, 내게 말했다.

“따라오너라.”

“어디 가는 겁니까?”

“가보면 알 것이다.”

“눼에….”

어디로 끌고 가는 거지?

설마 진짜로 10년 정지 때리는 건 아니겠지?

* * *

‘올바른 방향성에 맞게끔 수정했을 뿐이지, 어떻게 고칠 수 있느냐고 물어보시면 딱히 대답해 드리기가 어렵네요. 저도 막 이론적으로 생각하고 고친 건 아니라서.’

제갈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녀석이 했던 말로 가득 차 있었다.

‘올바른 방향성이라. 딱히 대답해 드리기 어렵다? 이론적으로 생각하지 않아? 그렇다는 말은… 녀석이 본능적으로 기의 흐름에 대해 통달했다는 뜻. 역시 녀석은… 천재다. 만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천재.’

제갈참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까지 올라간 대제국의 황제에다, 창조주를 쳐부쉈다는 녀석의 허풍을 어떻게 믿겠는가?

믿어주고 싶어도, 허풍도 그쯤 되면 사람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놀리기 위한 것 같아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대사건이다. 이런 재능을 가진 아이라면 우리 동창뿐 아니라 황궁무학들까지 진일보시킬 수 있을 터. 어디서 이런 천재가 굴러들어왔단 말인가?’

하지만 제갈참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아직 보고하기엔 이르다. 아직 완벽하게 검증된 것은 아니니, 당분간은 지켜보다가 확실해지면 동창제독 각하께 직접 보고한다.’

제갈참은 신중한 성격답게, 녀석을 조금만 더 지켜보기로 했다.

녀석이 <숙녀공>을 상승무공으로 수정한 게 어쩌면 만에 하나, 즉 천운이 따라주어 얻어걸린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심법이라는 건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다뤄야 하는 사안이기도 했고.

* * *

응?

다시 동창무고야?

혼나는 건 아닌 건가?

툭.

제갈참 아저씨가 웬 책 한 권을 던져 주었다.

“이게 뭐예요?”

“독사공이란 심법의 비급이다.”

“독사공…?”

“체내의 기를 독으로 바꿔 주는 심법이다. 적을 중독시켜서 제압하기 위해 익힌다.”

아.

내가 또 독이라면 일가견이 있지.

“이 심법도 올바르게 수정할 수 있겠느냐?”

“가능은 하겠죠?”

“좋다. 그럼 지금부터 이 독사공을 네가 생각하는 대로 올바르게 수정해 보아라.”

“싫은데요?”

“뭣이?”

“귀찮습니다.”

아무리 제갈참 아저씨가 날 커버쳐 줬다고 해도 싫은 건 싫은 거다.

심법 수정하는 게 이래저래 신경 쓸 곳도 많아서 머리 아프단 말야….

또 하긴 싫다.

“지금 교관인 내 지시를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정당한 지시를 안 따르는 건 지시불이행이지만, 불합리한 지시를 안 따르는 건 정당한 제 권리 아닙니까?”

“그, 그건….”

“어느 교관이 일개 교육생한테 그런 무거운 임무를 맡깁니까? 교관님 말마따나 심법에 함부로 손대는 건 최소 20년 형에 처해질 중죄라면서요.”

“…….”

“저 지금 집행유예 기간이라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할 때인데, 그런 중범죄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빗자루를 집어 들고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빨리 일퀘하고 마트에 운동하러 가야지.

오늘은 어깨 운동하는 날이란 말씀.

“자, 잠깐!”

이 아저씨 왜 이렇게 질척거려?

“어떻게 하면 독사공 수정을 하겠느냐?”

“네?”

“원하는 게 무엇이냐.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내 들어주마.”

오?

이거다!

“정말요?”

“물론이다.”

“그럼 요괴 사냥 훈련시켜 주세요.”

“그건 좀….”

“왜요?”

“지금 네 녀석은 징계를 받고 근신 중인데, 요괴 사냥 훈련을 시켜 주면 다른 교관들과 교육생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형평성에 맞지 않는 일이다. 요괴 사냥 훈련은 네 근신이 끝나면….”

“수고하세요.”

다시 빗자루를 들었다.

“자, 잠깐!”

“네?”

“내게도 사정이라는 게 있지 않겠느냐? 우선 독사공부터 수정하고….”

“책장 위나 닦아야지. 어휴. 여기 먼지 쌓인 거 봐.”

이번엔 걸레를 들었다.

“아, 알겠다.”

제갈참 아저씨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렸다.

“요괴 사냥 훈련을 시켜 줄 테니, 독사공을 수정해라.”

“정말요?”

“지금 당장은 무리이니, 내일부터 시켜 주마.”

“그럼 저도 내일부터 수정할게요.”

“…….”

“전 외상 같은 거 안 받거든요. 어음도 안 받고요. 현찰박치기 아니면 거래 자체를 안 하죠.”

“잠시만… 기다려 줄 수 있겠느냐? 내 교육감님께 이야기해 보겠다.”

훗.

그러셔야죠.

세상에 공짜가 어딨습니까?

* * *

1시간 후.

“교육감님께서 특별히 요괴 사냥 훈련을 허락하셨다.”

제갈참 아저씨가 돌아와 말했다.

“끼요오오오옷!”

신난다!

렙업이다!

“하지만 남들 보는 눈이 있으니,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단 2시간 동안만 이용할 것을 허락하셨다.”

참고로 이 세계에는 시계가 있다.

무협소설들처럼 시간을 각(15분), 식경(30분), 시진(2시간)으로 어렵게 표현할 필요가 없단 말씀.

어차피 동양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세계라 고증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지만….

“그럼 청소는요?”

“청소…?”

“하루에 4시간 동안 쓸고 닦는 게 얼마나 피곤한데요.”

“…….”

“심법을 고치다가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어떡하죠? 그럼 고친 심법을 익힌 사람이 꽥! 하고 죽을지도 모르잖아요.”

“…면제해 주마.”

후후후.

거래는 이렇게 해야지.

“좋습니다. 그럼 이따가 새벽 2시에 올게요.”

“심법을 고치는 건?”

“요괴 사냥 훈련 끝나고 해야죠. 선불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

“저 갈게요. 이따 봬요.”

새벽에 게임하는 것도 오랜만인데?

운동 갔다 와서 좀 자다 일어나서 접속해야지.

* * *

그날 밤.

제갈참 아저씨와 함께 훈련장으로 가 9등급 요괴들을 사냥했다.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중략)

[알림: 축하드립니다!]

[알림: 레벨이 올랐습니다!]

[알림: 11레벨 달성!]

[알림: 12레벨 달성!]

[알림: 13레벨 달성!]

신나게 요괴들을 때려잡다 보니 어느새 13레벨을 찍었다.

크으!

좋다, 좋아.

역시 게임은 레벨업이지.

사냥이 쾌적하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사냥터에서 나 혼자만 사냥을 하니까, 왠지 VVIP가 된 거 같다.

얼마나 편해?

몬스터 찾아서 헤맬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들이랑 경쟁할 필요도 없잖아.

이 기세를 몰아서 14레벨까지….

“이제 그만!”

뭐야?

“시간이 다 되었다.”

“벌써요?”

“허락된 시간은 딱 2시간이다. 그 이상의 훈련장 사용은 규정 위반이다.”

“힝.”

쩝.

아쉽다.

얼마 만에 레벨업인데 여기서 끊기네.

“나는 약속을 지켰다. 그러니 네 녀석도 약속을 지켜라.”

“눼에.”

아쉽지만 약속은 약속.

못내 아쉬워서 입이 삐죽 튀어나오지만 어쩌겠어.

“자, 보자….”

동창무고로 돌아와 <독사공> 비급을 훑어보았다.

“어휴. 이것도 쓰레기네.”

쯧쯧.

조잡하다 못해 못 쓸 물건이다.

“이러면 의도치 않게 아군까지 중독시키겠는데. 낭비도 너무 심하고. 비효율의 끝판왕이네.”

다시 말하지만, 난 독에 관해선 일가견이 있다.

옛날에 본캐로 창세기에 태어난 악신[惡神]이었던 블랙 드래곤의 심장을 흡수해서, 방사능 에너지를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설계부터 잘못됐네요. 고친다 해도 영 못 써먹을 물건 같은데요. 그냥 버리시죠.”

“그래도 일단 고쳐 봐라.”

“네.”

슥슥.

비급에 적힌 기의 흐름을 올바르게 수정했다.

근데 초기 수련법이 왜 이렇게 무식해?

독사의 독을 모은 대야에 손을 푹 담그고 독기를 흡수한다고?

“휴 끝났네.”

<독사공>을 고치는 데는 3시간이나 걸렸다.

독 관련 심법이다 보니 신경 쓸 게 한두 개여야지.

시간을 보니 벌써 아침 7시다.

와.

진짜 오래간만에 밤새웠네.

“끝났느냐?”

“네.”

“고생했다. 검수는 내가 할 터이니, 가서 쉬도록 하여라.”

“수고하세요. 하아아암.”

아 졸려.

빨리 자야지.

로그아웃하고 샤워를 하는데, 문득 너무 싸게 해 줬단 생각이 들었다.

‘심법 하나 통째로 뜯어고쳐 주는데 고작 사냥 2시간 시켜 주는 건 너무한 거 아냐? 이거 노동착취잖아. 안 되겠다. 앞으로는 찔끔찔끔 해 주면서 받을 건 다 받아내야지.’

지금까지는 초기 고객 확보를 위한 전략이라고 생각하고, 마케팅 비용 썼다고 생각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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