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이 비급들도 한번 봐줄 수 있겠느냐?”
로그인하자마자 제갈참 아저씨가 수십 권의 비급을 책상 앞에 쿵! 내려놓으며 내게 물었다.
아이고, 호갱님 오셨습니까!
“물론 봐드릴 수 있죠.”
대환영이지.
안 그래도 열정페이를 받은 것 같아서 단단히 벼르고 있었거든요.
후후.
“그럼 이 비급들도 한번 고쳐 보도록.”
“그냥은 안 됩니다.”
“음?”
“교관님이 절 도와주셔야 저도 교관님을 도와드리죠.”
“대가를 바라는 것이냐?”
“그럼 공짜로 해 드려요?”
“이놈! 너는 대명제국의 환관이다! 황제 폐하께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이바지하는 것이 네놈의 당연한 의무이거늘! 어찌 대가를 바란다는 말이더냐!”
“환관 본연의 업무에는 심법을 고치는 게 없을 텐데요? 아무리 동창의 요원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첩보조직이지 무공 연구 기관은 아니잖아요.”
“그, 그건!”
“그리고 저, 엄연히 교육생입니다만?”
히히!
이 아저씨 표정 움찔거리는 거 보소?
“왠지 지금부터는 잘 몰라서 못 고칠 거 같네요?”
“이, 이놈이?”
“교관님. 솔직히 좀 서운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저 같은 고급인력을 맨입으로 부리시게요? 이거 노동착취 아닙니까?”
대답을 못 한다.
후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테지!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이거지!
“요괴 사냥 훈련시켜 주세요.”
“시켜주마.”
“어제처럼은 안 됩니다.”
“음?”
“한 줄 고칠 때마다 요괴 3마리씩 받을게요.”
“뭐, 뭣이?!”
“솔직히 이 가격이면 싸지 않아요? 비싸다 싶으면 다른 사람한테 맡기시죠. 싸게 해 주는 사람 찾아보시면 되겠네요.”
이 아저씨 또 말이 없다.
하긴.
심법을 수정하는 게 쉬웠으면 나한테 질척거릴 이유가 없겠지.
나는 무림 서버에 대해서 잘 모른다.
아무리 각종 커뮤니티를 보고 공부를 좀 했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수박 겉핥기 정도 수준밖에 안 된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안다.
판타지 서버든 무림 서버든 스킬을 뜯어고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는 거.
그러니까 제갈참 아저씨는 내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는 말씀.
셋, 둘….
“알다시피 그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교육감께 보고해 볼 터이니, 잠시 기다리도록 해라.”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제갈참 아저씨가 교육감을 만나러 간 사이 <운기조식 : 흡기>를 했다.
[알림: <힘세고 강한 아침!> 퀘스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알림: 기가 영구적으로 10 올랐습니다!]
[알림: 경험치가 50 올랐습니다!]
일일 퀘스트는 꼭 깨 줘야지.
암, 그렇고말고.
“교육감님께서 요괴 사냥 훈련을 허락하셨다.”
“야호!”
“단, 시간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보는 눈이 없는 밤에 진행해야 한다.”
“저도 이제 늙어서 밤샘은 좀 힘든데….”
“그건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너는 지금 동창제독 각하의 명령으로 근신 중인 몸이다. 그런 네가 버젓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누가 징계를 두려워하겠느냐?”
“쳇.”
“입 내밀지 마라. 지금 너는 엄청난 특혜를 받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특혜 좋죠.
아.
맨날 특혜받고 살고 싶다.
“다른 교육생들과의 형평성을 위해서라도, 너의 요괴 사냥 훈련은 비밀에 붙여야 한다.”
“눼에.”
“그럼 천천히 하고 있도록. 요괴 사냥 훈련은 밤에 진행할 것이니.”
“네.”
원하는 걸 얻었으니 ‘일단은’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 * *
그날 새벽.
심법을 고쳐 준 대가로 얻어낸 요괴들을 사냥하며 경험치를 먹고, 레벨을 올렸다.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중략)
[알림: 축하드립니다!]
[알림: 레벨이 올랐습니다!]
[알림: 14레벨 달성!]
(중략)
[알림: 25레벨 달성!]
[알림: 25레벨을 달성하며 <비무> 시스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아?
이게 그건가?
[알고 계셨나요?]
<비무>란 PVP 시스템의 일종으로 정정당당히 서로의 무[武]를 겨루는 대련이랍니다!
<비무>란 쉽게 말해 대련이다.
하지만 그냥 대련은 아니다.
무림 서버의 <비무>란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는 또 다른 레벨업 방법의 하나다.
같은 게이머들끼리는 경험치, 혹은 레벨을 걸고 대련하는 것도 가능하다나?
그냥 투기장을 따로 만들지 않고, 아예 시스템으로 넣어 둔 거라고 이해하면 된단다.
아무래도 무림 서버는 판타지 서버보다 PVP 성향이 짙다 보니 PVP를 생활화하라는 의도 같다.
뭐.
아님 말고.
‘그래도 오늘 레벨 엄청 올렸네.’
밤늦게까지 심법들을 열심히 고친 보람이 있다.
근데 기분이 좀 이상하다.
몬스터는 사냥하는 건데, 이건 사 먹는 거잖아.
어떤 미친놈이 몬스터를 사 먹냐고!
에라이.
그냥 사냥이나 하자.
밤도 늦었겠다, 일단 훈련장의 요괴들을 때려잡는 데 집중했다.
‘오. 다음 렙업까지 1퍼? 한 마리만 더 잡으면….’
경험치 바가 알이 꽉 찬 제철 꽃게처럼 풀로 차 있었다.
“그만.”
아 뭔데!
“약속한 요괴를 다 잡았으니 오늘 훈련은 끝이다.”
“벌써요?”
“그렇다.”
“한 마리만 더 잡으면 안 될까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마리만 더요.”
한 마리만 더 잡으면 렙업이라고오오오오오!
“약속, 아니 거래는 거래다.”
“제발요….”
“미안하지만 사정을 봐주고 싶어도 요괴의 재고가 떨어져서 더는 훈련을 시켜 줄 수가 없다.”
네?
뭐가 떨어져요?
“네 녀석이 훈련장에 풀어놓은 요괴들을 모조리 사냥해 버리는 바람에 더 이상은 재고가 없다.”
“에이, 설마요.”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느냐? 게다가 훈련장 전체적으로 요괴들의 재고가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다. 일주일 후에 재입고 예정이니 그때까지는 나도 어쩔 수 없다.”
야 이!
뭔 놈의 몬스터가 품절이냐고!
“물론 아직 남아 있는 요괴가 없는 건 아니다만.”
“있어요?”
“지금 네 녀석이 상대하기엔 조금 버거울 것 같구나.”
“상관없어요! 바로 가죠!”
“네 의지가 그렇다면야 시켜 줄 수도 있겠지만….”
으응?
“맨입으로 해 줄 수야 없지 않겠느냐?”
“그럼 제가 특별히 한 줄 더 고쳐드릴게요. 원래 한 줄 고치는 데 요괴 세 마리인 거 아시죠? 할인해 드리는 겁니다.”
“이번만큼은 한 마리에 비급 한 권으로 하자.”
“뭐라고요?”
“지금 급한 사람은 너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도 모르느냐? 시간을 사고 싶거든 대가를 치러라. 지금 비싼 값을 치르든지, 아니면 1주일을 기다리든지.”
무슨 되팔렘이세요?
뭔 몬스터에 피를 붙여서 파냐고오오오오오오오오!
그리고 레벨업까지 1퍼 남았는데 1주일을 어떻게 기다려?
나강박걸려.나강박걸려.나강박걸려.나강박걸려.나강박걸려.나강박걸려.나강박걸려….
‘눈탱이 맞는 건 진짜 딱 질색인데. 이건 내가 너무 손해잖아. 이거 사면 지는 거라고. 절대 안 되지. 흥.’
근데 로그아웃 버튼에 손이 안 간다.
‘찜찜해서 잠이나 오겠냐고. 으으으.’
앞으로 1주일을 어떻게 기다려!
그러던 중 좋은 생각이 났다.
“교관님?”
“결정했느냐.”
“저랑 싸나이 크럽 한번 가시죠.”
“싸나이… 크 뭐?”
제갈참 아저씨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하긴.
무림 서버 NPC가 싸나이 클럽을 어떻게 알겠어?
“그런 거 있잖아요. 진정한 상남자들끼리만 모여서 어울리는 그런 모임이요.”
“상남자회 같은 것 말이냐?”
예?
그게 뭐죠?
도와줘요! 시스템!
[상남자회]
<상남자>란 이 세계의 사교집단인 십할상남자회[十割上男子會]의 줄임말입니다.
상남자회의 회원들은 하나같이 알아주는 상남자들이라서, 겁쟁이들은 가입할 수 없답니다!
오.
여기도 이런 바람직한 모임이 있네?
근데… 땅콩 없어도 받아주나?
흑흑.
* * *
어쨌든, 제갈참 아저씨에게 내기를 제안했다.
바가지를 쓰는 것보다는 내기가 낫잖아?
“싸나이답게 저랑 내기 한번 하시죠. 화끈하게.”
“내기?”
“비무 해서 제가 이기면 요괴 한 마리 내 주시고, 제가 지면 비급 3권 공짜로 해 드리죠.”
“이놈.”
제갈참 아저씨가 인상을 구겼다.
“네놈이 아무리 천인이라 한들, 벌써부터 나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에이. 그럴 리가요. 아직 멀었죠.”
아직 계승된 스킬 해금도 못했는데 170레벨 일류고수를 어떻게 이겨?
아무리 나라도 그건 절대 무리다.
“그런데 감히 비무를 하자?”
“형평성은 맞춰야죠. 공평하게.”
“기를 쓰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무기도 쓰지 말죠. 싸나이답게 맨주먹으로 하죠.”
물론 이것도 불리하긴 마찬가지다.
기를 못 쓴다고 해서 레벨 차이가 없어지는 게 아니란 말씀.
레벨이 오르면 근력·지구력·방어력·항마력 등 기본 스탯들도 같이 올라간다.
레벨이 깡패란 말이 괜히 있겠어?
“세 대 먼저 때리는 쪽이 이기는 걸로 해요. 어때요?”
“오직 순수 실력으로만 겨뤄 보자는 말이렷다?”
“바로 그거죠.”
“좋다.”
걸려들었어!
“잠시만요.”
<비무> 시스템을 가동해 모드를 설정했다.
뭐 이렇게 복잡해?
나 이제 30대 중반이야!
아재라고!
[비무]
형태 : 공평한 대련
승리조건 : 공격 3회 적중 시 승리 / 상대방 생명력 70퍼센트 이상 감소시키기
승리보상 : 경험치 +2,300
제한 : 기 사용 금지
참고 : 공평한 대련은 의도적으로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단, 레벨 격차가 심한 경우 죽일 수도 죽을 수도 있으니 주의하세요!
됐다.
이런저런 모드가 많아서 좀 헤매긴 했지만.
[알림: 이 조건으로 <제갈참>과 비무를 하시겠습니까?]
[입력: Yes!]
[알림: <제갈참>이 비무를 수락했습니다!]
설정을 마치자 나와 제갈참 아저씨를 중심으로 농구코트 반 정도 크기의 황금색 원이 생겨났다.
[알림: 준비하세요! 10초 후 비무가 시작됩니다!]
[알림: 10, 9, 8….]
주먹을 느슨하게 쥐고 자세를 취했다.
“먼저 오너라.”
제갈참 아저씨가 내게 손짓했다.
강자의 여유라 이거지?
“예, 갑니다.”
사양 같은 거 안 한다.
양보하면 넙죽 엎드려 절하고 받아먹어야지.
지금은 내가 약잔데.
* * *
5분 후.
“안녕히 주무세요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녀석은 꾸벅 배꼽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이 정도였나.”
제갈참은 조금 전 녀석에게 얻어맞았던 명치를 어루만지며, 믿을 수 없다는 듯 혼잣말했다.
아프지 않다.
그런데, 아프다.
무슨 개소리겠냐마는,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제갈참 입장에서 녀석의 주먹은 그저 솜주먹에 불과해서,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욱신욱신!
그런데도 아프다.
모르긴 몰라도 심리적인 영향이 상당하리라….
‘아무리 기를 사용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30년 넘게 무공을 수련해 온 나와의 내기에서 이기다니.’
녀석의 움직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금의위 위사 곽말풍이 그랬던 것처럼.
‘녀석은 부정할 수 없는 천재다. 녀석이 강해지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하다. 천하제일인, 어쩌면 고금제일인이 될지도.’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가장 강한 자.
중원 대륙 역사상 그 칭호를 거머쥐었던 사람은 오직….
‘녀석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니다. 동창제독 각하께 보고해야 한다.’
제갈참은 더는 보고를 미루지 않기로 했다.
좀 더 지켜보려 했건만, 녀석의 천재성이 너무나도 뛰어났다.
그래서 자꾸만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통에, 이제는 의심하거나 부정하지 못할 지경까지 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가자.’
제갈참은 즉시 동창제독인 병필태감의 처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