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다음 날.
“가자.”
“네? 어딜요?”
“가 보면 알 것이다.”
“어어?”
로그인하자마자 제갈참 아저씨에게 붙들려 어디론가 끌려가게 됐다.
설마 날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서….
‘나랑 비밀친구 하겠나?’
오싹!
으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지금부터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고, 언행을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뭘 그런 걸 걱정하고 그러세요.”
“……?”
“제가 얼마나 예의가 바르고 말을 예쁘게 하는데요. 어른들한테도 인기 많아요, 저.”
뭐야?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세요?
“후우.”
제갈참 아저씨가 눈을 질끈 감고, 꾹꾹 눌러 담는 목소리로 말했다.
“명심해라. 말조심해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그 자리에서 혀가 뽑히고 목이 날아갈 터이니.”
“협박인가요?”
“경고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 명심 또 명심해라. 그러지 않으면….”
“눼에.”
하도 신신당부를 해 대는 통에 귀에 딱지가 앉고 곰팡이까지 피겠네.
그건 그렇고.
여긴 또 어디야?
제갈참 아저씨는 뭔가 음침하고 어두운 기운이 풀풀 풍기는 듯한 거대한 전각으로 날 데려갔다.
건물 입구 현판에 날카로운 글씨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동집사창[東緝事廠]
들어서 안다.
저게 동창의 정식 명칭이었지, 아마?
그렇담 여긴 동창의 본부라는 거겠지.
“동창제독 각하를 만나 뵐 것이다.”
“두목님을요? 악!”
왜 때려!
왜!
“말조심하라 그리 이르고 일렀거늘.”
“눼에….”
“어딜 동창제독 각하를 두목님이라고 부르느냐. 제발 부탁하마. 부디 말 좀 조심해 다오.”
“네.”
사정사정하니까 안 들어줄 수야 없지.
그래도 나름 날 챙겨주는 사람이잖아?
“동창제독 각하께서 네 녀석을 한 번 만나 보고자 하시니, 제발 그놈의 입 좀….”
“눼에, 눼에.”
귀에서 피나겠다고요!
‘근데 보통 동창제독이라고 하면… 악당 아닌가?’
소싯적에 본 무협소설들에서, 동창제독이라고 하면 대체로 악당으로 묘사되곤 했다.
아니, 100퍼센트 악당이다.
그런 거 있잖아.
어둠 속에 숨어서 음흉하게 웃으면서 음모를 꾸미는….
보통 어떻게 생겼더라?
깡마르다 못해 손가락에는 뼈밖에 없고.
피부에는 검버섯이 풍년이고.
음.
또 뭐가 있더라?
기괴하게 새빨간 입술?
쭉 찢어진 입?
얼굴에는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하고?
그런 외모를 가진 60~70대의 교활하고 사악한 노친네.
그게 딱 내가 상상하는 동창제독의 모습이다.
윽.
난 그런 애들 보면 속이 울렁거려서 못 참겠던데.
“훈련교관 제갈참이오. 동창제독 각하를 뵈러 왔소.”
“들어가시오.”
전각 꼭대기 층에 위치한 동창제독의 집무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고, 집무실 내부 풍경이 보였다.
“두목ㄴ… 아니. 동창제독 각하 안 계신 거 같은데요?”
그렇게 말한 이유는, 집무실 안에는 검은색 옷을 입은 키 큰 여자분 한 명만 우두커니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누구지?
궁녀는 아닌 거 같고.
황족인가?
“인사 올려라.”
제갈참 아저씨가 내게 속삭였다.
“동창제독 각하이시다.”
“에에?”
“어서 인사 올리지 못할까.”
쨍그랑!
머릿속에 든 고정관념이 산산조각으로 박살 나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기출변형 뭐야?
왜 음흉하고 사악한 마귀 할아범이 아닌 거냐고!
* * *
아쉽게도 동창제독은 내가 상상하던 그런 음흉하고 사악한 노친네가 아니라, 그저 키가 큰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부들부들…!!!
무협소설 작가 놈들!
이게 다 당신들 때문이야!
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놈들 고지식한 인간들 같으니!
[견쌍섭]
타입 : NPC
종족 : 인간
성별 : 중성
나이 : 39
레벨 : 399
등급 : 화경
신분 : 환관
소속 : 동창
계급 : 병필태감
직위 : 동창제독
특징 : 환관으로 이루어진 황제 직속 첩보조직 동창의 현 우두머리.
황실삼대고수 중 하나로서, 동창이 자랑하는 무공인 동창삼보를 모두 익힌 절대고수.
규화보전을 심도 깊게 익힌 덕분에 여성화가 이루어져서, 이제는 남성으로서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외모가 되었다.
기본적으로 상냥하고 나긋나긋하지만, 첩보조직의 수장답게 때로는 무서우리만치 냉혹하고 잔인할 때도 있다.
뭐야?
규화보전을 익히면 여자가 되는 거였어?
그나저나 고수는 고수네.
399레벨이면 어느 세계를 가나 강자로 인정받고, 한자리 꿰찰 수준이긴 하지.
“잘 오셨어요.”
견쌍섭 형님… 이 아니라.
누님이라고 불러야 되는 건가?
아.
모르겠다.
일단 두목님이라고 하자.
아무튼 두목님이 내게 다소곳하고 우아하면서도 정적인 움직임으로 인사를 건넸다.
“아, 예.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연오랑 훈련생이라고 했던가요? 제갈참 교관께는 말씀 많이 들었어요. 대단한 재능을 지니셨다더군요.”
어?
목소리가 묘하게 중성적이다.
여자치곤 굵고.
남자라기엔 얇은.
“하하하. 별말씀을요. 하하.”
“차 한잔 드릴게요. 그리고 제갈참 교관님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두목님이 제갈참 아저씨에게 물었다.
“예, 동창제독 각하.”
제갈참 아저씨가 발걸음을 옮기며 내게 눈빛을 보냈다.
제발 말조심해라.
제발 말조심해라.
제발 말조심해라.
눈빛으로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가능하구나.
“연오랑 교육생님은 어떤 차를 좋아하시나요?”
“아, 예. 제가 무식해서 차는 잘 모르는데요.”
“따로 선호하는 향이 있나요?”
“시원한 청량감에 달콤쌉싸름한 거? 민트초코에이드라고 말씀드리면 아시려나요?”
“그게 뭐죠?”
“제가 속한 세계에 있는 음료인데….”
두목님께 내가 최고로 애정하는 음료 <민트초코에이드>에 대해 설명해 드렸다.
“아. 마침 서역에서 들여온 박하 잎으로 만든 차가 있군요.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에?”
“잠시만요.”
두목님이 싱긋 웃고는, 뚝딱뚝딱 음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
이제 보니 알겠다.
얼굴선이 묘하게 굵어서, 중성적인 느낌이 나는 인상이네.
보이쉬한 매력의 키 큰 서양 누님 같은 이미지라고나 할까?
쪼르르르….
두목님은 박하 잎을 진하게 우려낸 차에 얼음을 타서 차갑게 식히고, 거기에 탄산수를 섞고, 마지막으로 초콜릿 시럽을 듬뿍 뿌렸다.
어?
초콜릿이 있어?
“교극력(巧克力)이라 해요. 서역에서 들여온 귀한 양념이랍니다. 쌉싸름한 향을 가지고 있죠. 여기에 설탕을 섞으면 그 맛이 특별하죠.”
하긴.
시계도 있고 안경도 있는 세계에 초콜릿쯤 있는 게 이상할 것도 없지.
무림 서버는 어디까지나 <동양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가상의 세계.
고증을 따지는 쪽이 지는 거다.
“어떤가요?”
“크으!”
이 청량감!
이 달콤쌉싸름함!
이거지!
“최고인데요?”
“고마워요.”
“잘 마셨습니다. 그런데….”
“네?”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단도직입적이시군요.”
“동창제독쯤 되시는 분이 일개 교육생을 부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죠.”
“그래요. 용무가 있어 불렀어요.”
“편하게 말씀하시죠, 편하게.”
“제갈참 교관이 말하길 연오랑 교육생이 엄청난 재능을 지녔다고 하더군요.”
“예, 뭐. 그렇게 됐습니다. 하하하.”
“무공도 무공이지만, 심법을 고치는 데도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고 들었어요.”
두목님이 자신의 책상 위에 쌓인 심법 비급들을 힐끔 가리켰다.
“직접 검토해 본 결과 놀랍더군요. 모든 심법들의 위력이 3할 이상 올라갔어요. 동창 역사상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성과죠. 연오랑 교육생의 능력에 경의를 표해요.”
“별말씀을.”
“그래서 연오랑 교육생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생겼어요.”
“어떤 부탁을 하고 싶으신 거죠?”
“규화보전도 고쳐 줄 수 있겠어요?”
킁킁.
냄새가 난다.
냄새가 나.
‘대박이다!’
난 본능적으로 두목님의 제안이 어마어마한 빅딜이라는 걸 알아챘다.
* * *
규화보전은 동창삼보에 속한 심법으로서, 이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신공[神功]이었다.
일단 입문에 성공하기만 하면 기를 쌓는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빠르고, 위력도 산을 무너뜨릴 정도에다가, 어느 무공에 적용하더라도 잘 어울리는 심법이 규화보전이었다.
하지만 규화보전에는 단점이 두 개 있었다.
첫째, 오직 거세한 남성만이 익힐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첫 번째 단점은 환관들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으므로, 역대 동창제독들은 모두 규화보전을 익혀 강력한 고수가 되었다고 했다.
문제는 규화보전의 두 번째 단점.
규화보전은 경지가 10성 이상이 되면, 여성화가 되어 버린다는 아주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치명적인 단점이었느냐 하면, 화경의 경지에 올라 환골탈태를 해도 땅콩(?)이 다시 생기지 않는단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여자가 되지도 않아서, 지금 두목님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제3의 성별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는 중이란다.
“…규화보전에 그런 부작용이 있었군요.”
에라이.
훔쳐서 내다 팔까 했더니.
이런 심법을 누가 돈 주고 사?
아무튼.
두목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하셨을까?
환골탈태까지 했는데 땅콩이 자라나기는커녕 여성화해 버리시다니….
“그래서 규화보전의 부작용을 해소해 볼 방법을 찾고 있단 말씀이시죠?!”
“그래요.”
“그 마음 잘 압니다.”
그래도 나는 희망이라도 있지.
규화보전을 안 익혀서 환골탈태하면 다시 땅콩이 자라나잖아.
“기껏 환골탈태까지 했는데 땅콩이 다시 안 나면 얼마나 절망적이겠어요.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면… 부작용을 고쳐서 진정한 사나이로 되돌아가고 싶으시단 말씀이시죠?”
“아뇨.”
두목님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본 태감이 바라는 바가 아니에요.”
“네?”
“저는.”
두목님이 눈을 질끈 감고는 내게 말했다.
“완벽한 여성이 되고 싶답니다.”
에에?
“다시 남자가 되고 싶었다면 화경의 경지에 오른 순간 규화보전의 기를 모두 흩어버렸을 테죠. 그럼 환골탈태를 하면서 다시 양물이 자라났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건 본 태감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어요.”
“예. 어. 음. 그러니까.”
“부작용을 극대화시켜서 본 태감이 완벽한 여자가 될 수 있도록 규화보전을 고쳐 줄 수 있겠어요?”
그, 그러니까.
여자가 되고 싶으시단 거죠?
…진짜 어질어질하네.
띠링!
어?
눈앞에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알림: <동창제독의 은밀한 부탁>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동창제독의 은밀한 부탁]
내용 : 규화보전의 부작용을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고쳐서, 동창제독 견쌍섭이 완벽한 여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자.
타입 : 스페셜 퀘스트
진행률 : 0% (0/1)
보상 :
- 각종 특혜
- 은자 500,000냥
- 환관 신분에서 벗어남
- 동창제독으로부터 받는 총애 +99,999,999
참고 : 각종 특혜는 퀘스트를 수행하는 도중에도 누릴 수 있으며, 퀘스트 완료 이후에는 더욱 강화된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의 : 실패하면 동창제독이 엄청나게 분노할 것 같으니, 자신 없으면 여기서 포기하고 목숨이라도 건지도록 하자.
과연 정보국의 수장이라는 권력자의 부탁답게, 보상이 어마어마했다.
이 세계에선 은자 1냥이 대략 10만 원 정도의 가치라고 했지, 아마?
50만 냥이면 무려 500억.
저 정도 금액이면 무림 서버에서 돈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게다가 두목님의 총애와 각종 특권도 달달할 테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환관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된다는 거였다.
굳이 탈출해서 대제국을 적으로 돌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
“만약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결코 섭섭지 않게 보답하겠어요. 동창제독으로서의 지위를 걸고.”
“아이고오.”
두목님께 넙죽 엎드려 절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객님… 아니 동창제독 각하.”
“수락하시는 건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헤헤헤헤!”
[알림: <동창제독의 은밀한 부탁>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그때.
“뀨우! 누님 뭐 하냐! 햄찌가 도성에서 맛난 전병 사 왔다! 뀨!”
안 본 사이에 토실토실 살이 찐 햄찌 놈이 전병이 가득 담긴 봉투를 들고 쪼르르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난 이성을 잃었다.
“야 이 쥐새끼야!”
“뀨우?”
“너 오늘 뒤졌어!”
딱 대!
털 다 뽑아 버리게!